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소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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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겨울 42호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송상옥의 손녀 송마지, 증손녀 송영례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송상옥의 손녀 송마지, 증손녀 송영례



왼쪽부터 증손녀 송영례, 손부 이채현, 손녀 송마지


문) 이번 호 『녹두꽃』유족 인터뷰에는 참여자 송상옥(宋相玉, 1867~1909) 님의 손녀 송마지, 증손녀 송영례 두 분과 참여자 분의 손부이자 송영례 선생님의 어머니이신 이채현 선생님 이렇게 세 분을 모셨습니다. 선생님 반갑습니다. 증손녀이신 송영례 선생님께서 손녀이신 송마지 선생님에 대한 소개와 함께 본인 소개를 함께 해주시기 바랍니다.


답) [송영례] 안녕하세요. 제 고모이신 송마지 선생님은 송 상자 옥자의 큰아들 송판철의 7남매 중 막내인데, 1942년생이시니까 올해 79세입니다. 저는 송 판자 철자 님의 셋째아들 송광호 님의 5남매 중 셋째인데, 1960년생으로 올해 예순 하나입니다.



문) 송영례 선생님께서는 현재 사단법인 동학농민혁명유족회 이사직을 맡아 활동하고 계시죠? 유족회 활동에는 언제부터 참여하셨는지요? 그리고 유족회 활동을 하면서 기억에 남는 일이 있으면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답) [송영례] 동학농민혁명유족회 활동을 시작한 것은 동학농민혁명참여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에서 참여자와 유족등록을 받을 때 그러니까, 동학농민혁명유족회 고문으로 계시는 정남기 선생님이 회장으로 애쓰셨고, 손주갑 선생님이 총무를 맡아 애를 쓰시던 때니까 대략 15년 전, 그러니까 2005년 그 정도일 것입니다. 처음 유족회 활동을 시작했던 때는 뭘 잘 모르니까 유족회에서 행사가 있다고 연락을 해오거나 그러면 만사 제쳐두고 열심히 참석했습니다. 그렇게 15년을 한결같이 모임에 잘 참석하니까 부족한 제게 임원을 권유하여 지금은 이사직을 맡고 있습니다.



증손녀 : 송영례


문) 송마지 선생님께 여쭙겠습니다. 조부님께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했다는 사실은 어떤 경로로 알게 되었는지요? 아울러 참여자와 유족등록은 어느 분이 추진하였는지요?


답) [송마지] 부친(송판철)께서 조부님이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셨다는 이야기를 해주셨는데 그때는 제가 너무 어려서 새겨듣거나 그러지를 못했어요. 동학농민혁명 그게 뭔가는 잘 모르겠지만 조부님께서 좋은 일을 하셨구나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저는 좀 어려서 그렇게만 생각했지만 제 셋째오빠(故 송광호)는 아버지의 말씀을 새겨듣고 조부님께서 참여한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공부도 많이 하고, 자료도 찾고 하여간 조사를 많이 했어요. 그렇게 셋째오빠가 모은 자료들을 영례가 가지고 가서 서울시청에 신청하였습니다.



문) 송영례 선생님께 여쭙겠습니다. 동학농민혁명 당시 농민군은 일상에서 사용하던 농기구를 직접 또는 변형시켜서 무기로 사용한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동학농민혁명 당시 증조부이신 송상옥 참여자께서 직접 무기를 만들기도 했다고 하셨는데 이점에 대하여 전해들은 얘기가 있으면 보다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답) [송영례] 아버지(故 송광호)께서 말씀하시기를 증조부(송상옥)께서는 부여 가중리에서 태어나셨고, 재산도 많았다고 합니다.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난 1894년 갑오년 당시 증조부님은 27세인가 그랬다고 합니다. 그 당시 조부께서 공주인지 부여인지 하여간 농민군이 사용할 창과 칼 등 무기를 만들었다고 들었습니다. 또 아버지께 들은 얘기로는 증조부님께서 동학농민혁명 때 많은 군자금을 대시고 젊은이들을 농민군에 가입하도록 모집도 했다고 해요. 그러면서 그 많던 재산을 탕진하셨다고 합니다.



문) 참여자 송상옥 님은 여산송씨(礪山宋氏)로 충청남도 부여군 은산면 가중리에서 태어나 동학농민혁명 당시 공주, 부여 등지에서 활동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어느 전투에선지 다리에 총상을 입어 한쪽 다리를 절고 다니셨다고 하는데....


답) [송마지] 조부님은 1894년 11월 우금치전투에서 왼쪽 다리에 총탄을 맞아서 부상을 입으셨다고 들었어요. 전투 이후에 몇몇 곳으로 피신을 다니시다가 나중에 고향 근처에 들어와서 사시다가 돌아가셨다고 들었어요. 돌아가셨는데 묘를 대명천지에 내놓고 쓸 수가 없어 고향 선산에 모시지 못하고 고향 가중리마을과 가까운 초동마을(충남 부여군 규암면 수목리로 추정) 길가 야산에 모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나중에 고향 선산으로 묘를 옮겨왔는데, 이장할 때 외삼촌(송판철씨 부인의 남동생)이 조부님 유골 중 왼쪽 무릎아래 다리뼈가 없는 것을 확인했다고 합니다.



 

문) 송마지 선생님께 여쭙겠습니다.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유족으로서 어렵게 살아오셨을 텐데 어떻게 살아오셨는지에 대해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답) [송마지] 장남이셨던 조부님(송상옥)께는 딸이 한 분 있었다고 해요. 그런데 손이 없으셔서 저의 부친(송판철)을 어릴 때 양자로 들이셨어요. 제 부친(송판철)은 고향 가중리에서 둘째까지 낳으셨고, 가중리 옆 외가가 있는 신성리(충남 부여군 규암면)로 이사를 갔어요. 그곳에서 셋째부터 막내인 저까지 낳으셨다고 해요. 부친은 농사를 지으시면서 7남매를 키우셨는데 먹고살기가 힘든 시절이라서 부친과 큰오빠(송창호)가 돈을 벌려고 부여 근처에 광산으로 일을 다녔대요. 큰오빠는 결혼을 했었는데 일제강점기 때 강제징용으로 일본으로 끌려가서 노역을 하고, 나중에는 철도 놓는 곳으로 끌려가서 죽도록 일만했대요. 그러다가 해방을 맞았는데 다행히 큰오빠(송창호)가 살아서 외가가 있는 신성리로 돌아왔대요. 그래서 농사를 지으면서 살고 있는데 이번에는 6.25가 터지는 바람에 농사를 접고 돈을 벌려고 서울로 올라가 살게되었고, 둘째오빠(송동호)는 해방되고 나서 경찰서에서 순사보직 제의를 받았답니다. 그런데 거절했답니다. 순사하면 일제강점기 때 친일파 이미지가 강하게 남아서 거절했다고 합니다. 셋째오빠(송광호)는 저희 7남매 중에 제일 아는 게 많았어요. 그 오빠가 조부님의 동학농민혁명 참여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자료를 조사하는 등 오랫동안 많은 노력을 기울였어요.



문) 참여자 송상옥 그분은 언제, 어디서 돌아가셨는지 확실하게 알고 계시는지요?


답) [송마지] 조부님은 우금치전투에서 패한 후 전봉준 장군이 이끄는 부대를 따라 논산, 전주방향으로 퇴각했다고 해요. 그런데 조부님께서 다리에 총상을 입으셨잖아요? 그래서 동료들의 부축을 받으면서 후퇴하다가 자기가 짐이 될 수는 없다는 생각으로 동료들과 헤어져 이리(현재 전북 익산시) 근처 여산송씨 집성촌이 있는데 그곳 친인척 집에 몸을 숨기셨다고 들었어요. 그곳에 숨어 있다가 상황이 잠잠해지자 고향인 부여군 가중리(충남 부여군 은산면)로 돌아오려고 했는데, 끝내 고향으로 돌아오지는 못했다고 해요. 그때까지도 관헌들의 끈질긴 추적과 탐색이 계속되었을 뿐만 아니라 마을주민들의 눈총도 따가웠다고 합니다. 그래서 고향으로 못 들어오신 거지요. 한쪽 다리까지 잃어 온전하지 못한 상태에서 치료도 받지 못하고.... 혹시나 가족들에게 피해가 갈까봐서 본가에 알리지도 않고 식구들을 만나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그렇게 고생고생하시다가 1909년 11월 3일(양력) 부여군 초동마을에서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지금도 조부님을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문) 송마지 선생님, 조부님은 현재 부여군 가중리 선산에 모셔져 있지요?


답) [송마지] 저희 태어나기 전부터 친인척들은 조부님(송상옥)이 가매장 상태로 초동마을에 묻혀있다는 것을 알았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제 아버지(송판철)께서 나라를 위해 큰일을 하신 분을 제대로 모시지 않고 가매장 생태로 두는 것은 후손의 도리가 아니다면서 남의 이목을 피해 밤에 양지바른 곳으로 이장하고, 비석도 세웠다고 들었습니다. 그렇게 이장을 하고 난 후 1980년쯤인가?! 그 자리에 새로운 도로가 나면서 다시 묘를 옮겨야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고향인 부여군 가중리 선산으로 모시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장을 2번이나 한 것이지요.



문) 증손녀이신 송영례 선생님은 2007년 동학농민혁명참여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에서 참여자 및 유족 등록 관련 조사를 할 당시에는 서울특별시 강동구에서 살고 계셨지요?


답) [송영례] 참여자 및 유족등록을 추진하던 무렵부터 말씀을 드리는 게 맞겠어요. 아버지께서는 부여 신성리에서 살고 계셨어요. 5남매 중 4남매를 신성리에서 낳으셨고 막내는 서울에서 69년에 나았다고 합니다. 그 시절에는 누구나 다 어려웠잖아요. 경제적으로도 어려웠고, 그래서 저의 아버지께서는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1966년엔가? 가족을 데리고 서울로 올라왔어요. 그렇게 아버지를 따라 이사를 다니면서 88년도에 결혼을 했고, 마포구에서 살았어요. 그 뒤 아버지께서는 송파구로 이사하셨고, 그곳에서 2000년 10월 1일에 돌아가셨어요. 그 후에 경기도 광주로 이사를 하여 제가 어머니(이채현)를 모시고 살고 있어요.



문) 2004년 3월 특별법이 제정되었고, 2019년 2월 동학농민혁명 국가기념일이 제정되어 작년과 올해 정부 주최로 기념식이 열렸습니다. 그런가 하면 정읍황토현전적(사적 295호) 일대에는 완공목표로 동학농민혁명기념공원 조성 공사가 한창입니다. 늦었지만 동학농민혁명 정신선양사업이 힘 있게 펼쳐지고 있는 것에 대해 유족의 한 사람으로서 감회가 남다를 것 같은데, 어떻습니까?


답) [송영례]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동학농민혁명 100주년을 맞아 갑오년의 역사가 빛을 보게 되어 할아버지에 대한 죄송한 마음이 다소나마 덜어진 것 같다고 말씀하시곤 하셨습니다. 지지난 해에는 특별법 제정 이후 15년 간 결실을 보지 못했던 동학농민혁명 국가기념일이 제정되어 달력에 5월 11일 동학농민혁명 기념일 이렇게 글자가 박혀 나오니까 정말로 후손으로서 뿌듯하고 고맙고 그렇습니다. 아버지께서 살아서 이런 것 보셨다면 얼마나 좋아하셨을까 생각해보곤 합니다.



문) 빠트린 얘기가 있거나 꼭 하시고 싶은 얘기가 있으면 말씀해주십시오.


답)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유족의 한 사람으로서 바람이 있습니다. 동학농민혁명 특볍법에 명시된 것처럼 2차 동학농민혁명은 일본군이 경복궁을 무단으로 점령하여 임금을 핍박하고 국정을 농단하고 청일전쟁을 도발하니까 국권을 수호하기 위하여 분연히 떨쳐 일어섰잖습니까? 이 엄연한 역사적 사실 앞에서 우리는 정직하고 숙연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일본군의 침략에 맞서 국권을 수호하고자 목숨을 기꺼이 바친 동학농민군은 마땅히 국가유공자로 예우를 받으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늦었지만 후손들이 그분들을 독립유공자로 모실 수 있도록 서훈이 서둘러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문) 네, 선생님. 선생님 말씀 가슴깊이 새겨듣고, 그 방안을 적극적으로 모색해나가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긴 시간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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