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소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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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봄 43호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임경윤의 증손자 임영섭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임경윤의 증손자 임영섭


일시 : 2021. 2. 25.(목) 11시

장소 : 경기도 안양시의회 회의실



문) 이번 호 『녹두꽃』유족 인터뷰에는 참여자 임경윤(林京允 1863~1923) 님의 증손자 임영섭 선생님을 모셨습니다. 선생님 반갑습니다. 먼저 간략하게 자기소개를 해주시기 바랍니다.


답)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저는 1941년 12월 15일생으로 참여자 임 경자 윤자 님의 증손자 임영섭입니다. 유족으로는 현재 막내 고모님 한 분과 제 형제들이 살아있습니다. 저의 조부이신 임 장자 택자 막내딸인 임근예, 그러니까 제 고모님은 고령으로 거동이 불편하시고, 제 형제들도 지방에서 생활하고 있는 까닭에 오늘 인터뷰에 함께하지 못했습니다.



문) 선생님께서는 1993년 말 그러니까 동학농민혁명유족회를 창립하기 위해 발족되었던 창립준비위원회 때부터 유족회 활동에 참여하셨지요? 이현도, 김찬영, 이종찬, 정남기, 손주갑, 이현도, 김성황 이런 분들과 함께 동학농민혁명유족회 창립준비위원회 때부터 함께하셨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처음 유족회 활동을 하던 시절의 기억들을 더듬어서 당시의 상황들을 얘기주시기 바랍니다.


답) 1993년 말로 기억합니다. 한겨레신문에 “동학농민군 후손을 찾습니다”라는 제목의 광고가 게재되었어요. 제가 그때 변호사사무실에서 사무장을 하고 있던 때였는데, 광고를 보고 서울시 중구 필동에 소재한 역사문제연구소로 찾아갔습니다. 거기에 가서 지난 해 고인이 되신 이이화 선생님을 만나 상담하였습니다. 이런 과정에서 전라도 함평 지역에서 활동하신 제 증조부님에 대해 보다 깊이 있게 알게 되었습니다. 이후 동학농민혁명 1백주년이던 1994년 1월 6일날 제가 변호사사무실 사무장으로 일하던 때라 어떤 사건 의뢰 때문에 서초동에 가서 박원순 변호사님과 이종걸 변호사님 사무실에서 대담을 하였고, 이후 동학농민혁명100주년 기념사업 추진상황에 대해 설명하고 협조를 부탁하기도 하였습니다. 제가 거의 매일 일기를 빼놓지 않고 써왔기 때문에 당시 일자까지 확인이 되는데, 제가 1994년 1월 7일 유족회 창립에 대하여 고 이이화 소장님과 통화하였고, 1994년 1월 8일 오후 3시에는 서울특별시 중구 필동에 소재한 역사문제연구소에서 신년하례식이 있었는데 여기에도 참석했었습니다. 그날 신년하례식에는 한승헌 변호사님, 박석무 국회의원님, 임원두 조계종교육원장님 등이 참석하셨고, 고 이이화 역사문제연구소장님, 역사학자인 고 우윤 선생님과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유족 정남기, 손주갑 유족분 등 30여 명은 참석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신년하례식 등에서도 얘기되고 그랬는데 당시 역사문제연구소 산하에 ‘갑오농민전쟁100주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에서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후손 증언록 제작이  논의되고 있었는데, 제 일기에 따르면 1994년 1월 24일 오후 4시에 동학농민혁명 후손 증언록 제작에 대하여 역사문제연구소 사무실에서 저를 비롯하여 김형호, 이상재, 양윤두, 이종찬, 최현식, 김영태, 함기영, 길일기 등이 고 이이화 선생님,  우윤 선생님과 만나 진지하게 논의하였습니다. 그 자리에서 후손증언록 제작 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진행해나가기로 결정하고, 김영태(전 벨기에 참사관) 선생님을 추진위원회 회장으로, 제가 총무를 맡기로 하였습니다. 그때는 참 어려웠던 때라서 모임을 하면 식사비용을 거출하거나 했는데 그날은 고 이이화 선생님이 저녁식사비를 계산하셨어요. 이이화 선생님께서 유족회 창립을 위해 참 눈에 띄게 혹은 눈에 띄지 않게 참 많은 공헌을 하셨어요. 참여자 후손을 찾기 위해 사료를 찾는 일은 물론이고 유족들의 모임을 주선하거나 하실 때면 밥값도 많이 내셨지요.



 

문) 네, 이이화 선생님께서 지난 해 그러니까 2020년 3월 18일 돌아가셨으니까 다음 달 17일이 선생님 1주기 기일이네요. 이이화 선생님께서 동학농민혁명유족회 산파역할을 수행하신 일이 역사가 되었네요. 1994년 초에 참여자 후손 증언록 출판사업이 논의되어 그 결과물로 100주년 기념사업을 다 치루고 난 연말에 『다시 피는 녹두꽃』 -동학농민군 후손 증언록이 역사문제연구소 동학농민전쟁백주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 엮음으로 역사비평사에서 출판되었지요. 선생님께서 쓰신 당시의 일기를 바탕으로 말씀하시니까 당시의 상황이 그려지네요. 그 당시의 기억나는 일들에 대해 맥락이 좀 맞지 않더라도 그냥 편안하게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답) 네, 오늘 인터뷰를 위해서 제가 그 무렵의 일기를 좀 찾아봤어요. 그랬더니 1994년 1월 27일자 일기에 박원순, 이종걸 변호사님과 상담하였고, 오후 7시에 충무로 전철역 입구 식당에서 동학농민혁명 100주년 기념사업 관련 논의와 함께 후손들 모임인 유족회 발기인 2차 모임을 가졌다고 기록되어 있더라구요. 이때 9명이 모였는데, 이 모임에서도 이이화 역사문제연구소장님과 연구소 간사님도 참가비 10만원씩 낸 것으로 기록되어 있더라구요. 이 무렵 있는 돈 없는 돈을 모으고 모아서 한겨레신문사에 할인을 요청해서 유족을 찾는 광고를 게재하곤 했는데 이날 2차 발기인 모임에서도 유족을 찾기 위한 논의가 이어졌습니다. 유족회 창립을 위한 2차 발기인 모임은 1994년 1월 28일 한겨레신문 18면에 “동학농민군 후손 발기인” 제목으로 기사가 실렸고, 경향신문에는 발기인 모임이 열리던 날인 27일자에 “동학농민 전 후손~~~ 발기인 모임”이라는 제목으로 기사가 실리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노력을 기울인 덕분에 전국에서 참여자 유족분들이 한 명 두 명 합류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렇게 유족 찾기에 힘을 기울이던 발기인 모임 구성원들은 1994년 2월 14일 오후 6시 30분에 퇴계로 충무로역 일진식당에서 회의를 갖고 2월 17일 동학농민혁명유족회 발기인대회를 갖기로 하고, 창립대회는 3월 3일 서울에서 개최하는 것으로 합의를 하였습니다.



문) 네, 제 기억으로 그 무렵 그러니까 1994년 2월 17일 유족회 발기인대회 즈음하여 이이화 선생님 장모님께서 돌아가셔서 빈소인 강남성모병원에 조문을 갔다가 그곳에서 선생님을 비롯하여 지금은 고인이 되신 우윤 선생님 등등 여러 선생님들이 유족회 창립대회에 대한 얘기를 나누었던 기억이 납니다.


답) 그랬지요. 발기인대회 하던 무렵에 이이화 선생님 장모님이 별세하셨지요. 그 무렵의  일기를 보니까 1994년 2월 21일 저녁에 일진식당에서 유족회 모임을 갖고 1994년 3월 3일에 동아일보 사옥 17층에서 동학농민혁명유족회 창립총회를 갖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그렇게 결정한 후 부산한 준비를 통해 차질 없이 동학농민혁명유족회를 창립하게 되었지요.



문) 그 무렵 전주에서는 사단법인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이사장 한승헌)에서 사단법인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이사장 염무웅)과 함께 문화체육관광부에 동학농민혁명 100주년 기념사업 추진을 위한 국비 지원신청을 하여 2억 원이 넘는 예산을 지원받았습니다. 그래서 국비로 1994년 2월 고부봉기 역사맞이굿, 4월 100주년 기념대회, 5월 100주년 기념 학술대회, 11월 우금티 추모예술제 등 성공적으로 100주년 기념사업을 전개할 수 있었어요. 100주년 기념사업의 첫 번째 행사로 2월 26일과 27일 양일에 걸쳐 정읍시 일원에서 ‘고부봉기 역사맞이굿’ 펼쳤습니다. 그때 서울에서 함기영 선생님 봉고차로 여러분이 내려오셔서 행사에 참여하셨지요?


답) 맞아요. 1994년 2월 21일 우리 유족회 발기모임 때 2월 26일 정읍으로 내려가서 고부봉기 역사맞이굿에 참여하기로 결정하고, 저를 비롯하여 최관도, 정남기, 김영신, 김재훈 등등 9명이 행사에 참석했었습니다. 정읍 황토현과 전봉준장군 고택, 이평면 말목장터 일대에서 펼쳐진 이 행사의 실무자로 동분서주하던 문부장님도 생각납니다. 벌써 30년 가까이 지났네요.



 

문) 네, 선생님 저도 그때 기억이 납니다. 100주년 때 전국적으로 11개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단체가 창립되어 그 단체의 임원진과 회원을 비롯하여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소속 전국의 문화예술단체 관계자들이 이 행사에 출연진으로 혹은 참여자로 대거 참가하였지요. 내장산 입구의 숙박업소 20여 개를 잡고 26일과 27일 이틀간 말목장터, 만석보유지, 전봉준장군 고택 등에서 행사를 펼쳤었지요. 얘기가 좀 다른 방향으로 가버렸습니다. 되돌려서 1994년 3월 3일 열렸던 유족회 창립대회에 대해 말씀해주십시오.


답)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난 후 100년 동안 반란군의 후손으로 숨죽이며 살았던 유족들이 6개월 가까이 준비모임을 갖고 동학농민혁명 100주년이던 1994년 3월 3일 오후 3시에 서울특별시 충정로 동아일보 사옥 17층에서 창립대회를 개최하였습니다. 감개무량하였지요. 사실 100주년이던 1994년 때까지만 해도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대중적인 인식이 지금처럼 그렇게 좋지를 못했어요. 그래서 전국의 유족들이 그때는 많이 참석하지 못하고 그냥 지켜본 사람들도 많았지요. 어쨌거나 동학농민혁명유족회 발기인 12명이 힘을 모아 준비한 총회였지만 파급력이 만만치 않았습니다. 창립대회 때 창의문을 낭독하는 순서가 있었는데 그 당시 부회장을 맡고 있던 제가 한복을 입고 창의문을 낭독했었습니다. 그날 창립대회 때는 유족회원 62명과 내빈 40여 명 등 100여 명이 참석하여 성황을 이루었습니다. 이날 행사에는 당시 김도현 문화체육부차관을 비롯하여 오익제 천도교령 등이 참석하였지요. 역사학자로는 지금은 두 분 다 고인이 되셨는데 이이화 선생님과 최현식 선생님이 참석하셨고, 고창문화원장으로 계시던 이기화 선생님도 함께 참석하셨지요. 창립 준비모임 때부터 역사문제연구소의 많은 분들이 참 애를 많이 쓰셨지요. 특히 이이화 선생님은 창립 전후하여 중앙의 여러 신문사에 기고를 통해 동학농민혁명 유족들이 살아온 실상을 적극적으로 알렸지요. 유족들을 찾아 인터뷰하여 한겨레신문에 동학농민혁명 지도자를 소개하는 등 아주 열과 성을 다하셨어요.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역사문제연구소 산하 동학농민전쟁100주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에서는 이이화, 신영우, 우윤, 박준성, 배항섭, 김양식 이런 분들이 전국을 다니면서 인터뷰하고 사료를 찾아 인터뷰 내용을 대비하는 등 노고를 아끼지 않고 쏟아서 1994년 말에는 동학농민군 후손 증언록 『다시 피는 녹두꽃』이라는 책을 발행되기도 했지요.



문) 그랬지요. 동학농민군 후손 증언록 『다시 피는 녹두꽃』을 역사문제연구소 동학농민전쟁100주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에서 엮어 출판되었는데, 그 책에 선생님 증조부이신 임경윤(林京允 1863~1923) 참여자의 내력도 소개가 되었었지요? 그때는 증조부님 함자가 임 경자 윤자가 아니라 임 종(鍾)자 량(良)자로 소개되었고, 선생님 성함도 임영섭이 아니라 임헌섭(林憲燮)으로 소개가 되었지요?


답) 그랬지요. 증조부님도 그렇고 저도 그렇고 호적과 실제로 사용하던 이름자가 달라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나중에 동학농민혁명 특별법이 제정된 이후 국무총리를 위원장으로 하는 동학농민혁명참여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가 구성되고 그에 따라 동학농민혁명참여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가 설치되어 참여자와 유족을 조사하여 등록할 때는 호적에 맞게 증조부님은 임 경자 윤자로, 그리고 그 유족으로 저는 임영섭으로 신청서를 작성하여 등록하였지요.



문) 네, 선생님 하도 많은 일들이 있어서 얘기가 조금 복잡해졌습니다. 동학농민혁명유족회 창립대회 전후의 얘기를 나누었으니 이제부터는 유족회 창립이후 특별법 제정 때까지의 활동에 대해 말씀해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답) 동학농민혁명 100주년을 기해 동학농민혁명유족회도 창립이 되었지만 백주년 이전부터 전국 각 지역에서 왜곡되고 축소되어온 동학농민혁명의 역사를 바로세우기 위한 노력들이 펼쳐졌어요. 그때 창립된 기념사업단체들에 대해서는 문부장님이 잘 알고계시잖아요? 사단법인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사무국장과 동학농민혁명 100주년 기념사업단체협의회 실무를 겸해서 보았지요?



문) 네, 그 당시 저는 전주에 소재한 사단법인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사무국장을 맡고 있었습니다. 지금은 기념사업단체 중에서 사단법인으로 등록한 단체가 전국에 13개 단체나 되는데 당시에는 문화체육부로부터 인가를 받은 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 관련 사단법인체는 전주에 소재한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가 유일하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사무국장으로 근무하던 전주의 사단법인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가 국비를 받았기 때문에 그에 따른 사무행정은 몰론 사업추진까지 구분 없이 수행하였습니다. 상황이 이러다보니 동학농민혁명100주년기념사업단체협의회 실무도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양정순 국장과 제가 함께 일을 보게되었습니다. 당시 기념사업단체로는 우선 1996년 서울에 설립된 역사문제연구소(소장 이이화)에서 1989년 동학농민전쟁100주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를 발족하였고, 그 이듬해로 기억하는데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에서 ‘동학농민혁명100주년특별위원회’를 발족하여 활동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1992년 6월 전주에서 동학농민혁명백주년기념사업회가 창립하였고, 1993년으로 들어서면서 진주대일군전적추모사업회(회장 김범수), 광주전남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회장 이상식), 티동학농민전쟁우금티기념사업회(회장 진영일), 정읍동학농민혁명계승사업회(회장 조광환), 상주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강효일) 등 9개 단체가 창립되어 활동하였습니다. 이들 단체가 모여 1993년 12월 13일 결성된 동학농민혁명백주년기념사업단체협의회 주최로 100주년 기념사업을 성공적으로 추진하였지요. 2004년 동학농민혁명 특별법 제정은 그 결실이라고 말할 수 있지요. 어쨌거나 동학농민혁명유족회가 창립되어 전국의 기념사업단체는 물론이고 동학농민혁명 전공연구자, 전국의 시민사회단체 등과의 적극적인 연계를 모색하여 힘을 모은 덕분에 특별법이 제정될 수 있었지요. 유족회 창립이후에도 선생님께서 유족회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셨지요?


답) 네, 동학농민혁명 100주년이던 1994년 3월 3일 동학농민혁명유족회가 창립된 후 저는 유족회 사무총장, 수석부회장 등을 맡아서 아주 적극적으로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와 그 유족의 명예회복을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2004년 동학농민혁명 특별법이 제정된 이후에 전국 각 도와 시군에 동학농민혁명참여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 실무위원을 두었는데 제가 경기도 실무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하였습니다. 그 무렵 제가 동학농민혁명유족회 사무총장을 맡고 있었고, 손주갑 유족께서 총무를 맡아서 함께 일을 하였어요. 당시에는 사정을 잘 모르는 유족들이 많았고, 참여자라고 증빙할 수 있는 기록들도 거의 확인되지 않고 그래서 참여자 및 유족등록을 위해 신청서를 제출한 분들이 그렇게 많지 않았어요. 조상으로부터 전해지는 얘기나 갖가지 소문으로는 조부 또는 증조부님 등이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인 것으로 알고 있는데 참여사실을 기록이나 증빙할 수 있는 여타의 자료 등을 확보할 수 없어서 등록을 많이 하지 못했습니다. 다행히 저는 이이화 선생님과 역사문제연구소 구성원들께서 임 경자 윤자 증조부님을 참여자로 등록하였고, 유족으로 손자녀 1명, 증손 5명, 고손자 5명 총 11명을 등록하였습니다.



문) 증조부님께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요? 그리고 증조부님에 대해 집안의 어르신들이나 기타 경로를 통해 전해들은 얘기가 있으면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답) 집안에 전해져 내려온 족보의 기록을 보고 알았어요. 그리고 증조부님 묘 앞에 세워진 비문에 간략하게 내용(두 줄)을 보고도 참여자임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장두성, 박문팔, 장병규 등 같은 지역의 장공삼, 차경동, 박문팔, 사기소, 강포수 등에 대한 얘기를 아버지께 많이 들었습니다.



문) 증조부님께서는 1894년 봄 동학농민혁명 당시 장성 월평리 전투에도 참여하셨고, 갑오년 겨울 공주우금티 전투에도 참여하셨다가 전세가 기울어진 후 피신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증조부님 활동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알고 계시는 점이 있으면 얘기해주시기 바랍니다.


답) 우금티 전투 패배 이후 고향으로 못 오시고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했던 일부 동료들과 노령산맥 끝자락 바닷가인 영광군 오동리로 숨어들었다고 합니다. 여기에도 교전(交戰)이 있었다는 얘기를 2004년 2월에 제가 오동리 마을을 방문했을 때 그 마을 노인이신 최갑희(당시 87세)씨를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그 분이 오래전에 돌아가신 제 조부님을 아신다고 하면서 반갑게 맞아주면서 증조부님에 대해 들은 얘기를 해주셨어요. 그러면서 2004년까지도 그곳 마을 한쪽에 누군지 알 수 없는 동학농민군 무명 묘가 두 기가 있어서 동네에서 마을 사람들이 벌초를 해주었다는 얘기도 하였습니다. 뒤쫓는 관군과 일본군 등과 교전하다가 동네 앞 대추나무 밭가의 개울 안개를 이용하여 퇴각했다는 얘기를 들었다는 얘기도 해주셔서 조부님께서 피신하는 과정 또한 지난하고 힘들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문) 이후 증조부님과 조부님께서는 어디로 피신하셨고, 어떻게 살아오셨는지에 대하여 얘기해주시기 바랍니다.


답) 영광군 오동리로 숨어들었다가 교전을 한 후 피신하여 충청도 계룡산으로 숨어들었다고 합니다. 거기에서 오랫동안 몸을 숨겼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조부님과 아버님이 돌아가실 때까지 계룡산 밑에 용동리라는 곳에서 살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저도 유년시절을 충청도 계룡산자락 신도안(지금은 계룡시)에서 보냈습니다.



문) 증조부님 원래 고향은 전라도 함평이지요? 증조부님의 고향에 대한 얘기와 함께 이후 조부님, 아버님, 그리고 선생님께서 살아오신 내력에 대해서도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답) 증조부님은 전남 함평군 손불면 월천리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그곳은 나주 임씨들의 집성촌이었어요. 바닷가가 접해 있었고(현재는 간척지로 변함) 증조부님의  숙부뻘 되는 분 임백규 이분이 당시 그 지역에 출중한 인물이여서 당시 나주 향교, 함평향교에서 크게 활동한 요새 말로 실세여서 이분 덕으로 중농 정도의 가세(家勢)를 유지하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증조부님은 학문도 꽤 깊이 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 시대상황이 매관매직 등으로 부패하기가 이를 데 없어서 증조부님은 동갑계원들과 함께 동학에 가담하여 세상을 한 번 바꿔보자 그렇게 논의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때 논의했던 분들이 이화진 접주, 장경삼, 장고삼 등등 30여분이었다고 합니다.



문) 선생님, 증조부님은 현재 어디에 모셔져 있는지요?


답) 함평군 손불면 월천리 흥림 선산에 모셨습니다. 다른 곳에 모셨다가 몇 년 전에 가족 묘역을 조성하면서 그곳에 함께 모셨습니다. 2004년도에는 역사문제연구소 이이화 소장님과 정남기 유족회장, 왕현종 연세대교수 등등 여러 분들이 증조부님 묘소를 방문한 적도 있습니다.



문) 2004년 3월 특별법이 제정되었고, 2019년 2월 26일 동학농민혁명 기념일이 법정기념일로 제정되어 매년 정부(문화체육관광부) 주최로 동학농민혁명 기념식이 거행되고 있습니다. 오는 5월 11일에도 제127주년 동학농민혁명 기념식을 개최하기 위하여 준비하고 있습니다. 또한, 정읍황토현전적(사적 295호)지 일대에 올해 말 완공목표로 동학농민혁명기념공원 조성공사가 한창입니다. 이렇게 동학농민혁명 정신선양사업이 적극적으로 추진되고 있는 대해 유족의 한 사람으로서 감회가 남다를 것 같은데, 어떻습니까?


답) 먼저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이사장님과 임원님, 그리고 직원 여러분들에게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많이 부족한 재단의 운영비와 사업비를 가지고 100년간 역사의 뒤안길에 묻혀온 동학농민혁명의 숭고한 정신을 선양하느라 얼마나 수고가 많을지 짐작이 가고도 남습니다. 예산이라도 많아야 동학농민혁명 정신을 범국민적으로 확산하는데 힘도 나고 일 추진도 다소 수월하고 그러는 법인데 적은 예산으로 사업하느라 애쓰시는 재단 이사장님을 비롯하여 임원진과 직원 여러분에게 거듭 감사드립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좀 서운한 마음이 있습니다. 보다 적극적으로 문체부나 기재부 예산확보를 위해서 노력을 기울여줬으면 좋겠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문) 네, 선생님 유족의 한 사람으로서 충분히 아쉬움을 가지고 대할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많은 액수의 국비가 투자되는 동학농민혁명기념공원 조성사업이 진행되는 상황에서 재단 운영비와 기타 기념사업 관련 예산을 확충하는 것에 여러 어려움이 있지만 선생님의 말씀을 가슴 깊이 새기면서 보다 적극적으로 동학농민혁명 정신선양사업을 추진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하는 일에도 힘쓰도록 하겠습니다. 앞서도 말씀 드렸습니다만 2019년 2월 26일 동학농민혁명 기념일이 5월 11일로 제정·공포되었습니다.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난 때로부터 꼭 125년 만에 이루어진 뜻깊은 일이었습니다. 기념일이 제정됨으로써 그해 5월 11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정부 주최로 제125주년 동학농민혁명기념식이 거행되었는데, 이때 국무총리께서 참석하시어 동학농민혁명을 첫째, 우리나라 최초 근대민주주의운동. 둘째, 우리나라 최초 근대민족주의운동. 셋째, 우리나라 최초 반개혁운동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유족으로서 감회와 함께 선생님께서 생각하시는 동학농민혁명의 역사적 의미 그리고 향후 동학농민혁명의 정신 계승·발전을 위해 어떤 방향으로 기념사업이 추진되어야 하는지에 대하여 말씀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답) 저는 나라와 민족을 위해 희생하신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유족의 한 사람으로서 정부에 강력하게 요청합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를 일제 국권침탈에 맞서 싸운 독립유공자로 서훈해 주시기 바랍니다.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에 대한 진정한 명예회복은 국가유공자로 서훈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동학농민혁명의 숭고한 정신, 차원 높은 인본주의 정신을 헌법 개정할 때 전문에 포함시켜 줄 것을 강력하게 요청합니다. 동학농민혁명은 일제강점기 3.1운동은 물론이고 해방이후 부패한 권력에 항거해서 일어난 4.19혁명과 5.18민주화운동 등으로 면면히 이어진 우리나라 민주주의운동, 민족주의운동의 시원입니다. 마땅히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를 국가유공자로 서훈하고, 헌법 전문에 그 정신을 포함시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문) 네, 선생님.... 긴 시간 좋은 말씀 잘 들었습니다. 끝으로 혹여 빠뜨린 얘기나 덧붙이고 싶은 말씀이 있으면 해주십시오.


답) 저는 정부와 국회에 건의합니다. 일본군을 비롯하여 서구 제국주의 열강이 조선을 침략하던 19세기말 민족의 사상인 동학이 창도되었고, 이를 사상적으로 조직적으로 바탕삼아 1894년 동학농민군이 보국안민, 척왜척양, 제폭구민 깃발을 높이 들고 일어섰습니다. 그래서 자유평등 정의와 인권을 추구하면서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고자 했습니다. 이는 대한민국 건국의 뿌리와 그 맥이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민본과 인본을 바탕에 둔 동학농민혁명 정신이 3·1운동 등으로 면면히 이어져왔습니다. 동학농민혁명으로부터 110년 만에 특별법이 제정되었고, 125년 만에 동학농민혁명 기념일이 국가기념일로 제정되었습니다. 많이 늦었지만 천만 다행스런 일인데, 문제는 지금부터라고 생각합니다. 한 세기가 넘도록 버림 받아온 동학농민혁명이 이제야 빛을 보게 되었으니 그 정신을 범국민적으로 확산하고 선양하기 위한 사업을 추진할 수 있도록 정부에서 적극적으로 예산을 반영해줄 것을 요청합니다. 그래서 하루빨리 동학농민혁명이 특정 지역에 국한된 지역적인 사건이 아니라 전국적이면서도 전민족적인 반일의병으로 발전된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우뚝한 민족운동의 봉우리로 재정립될 수 있도록 힘써주실 것을 강력하게 건의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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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겨울 6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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