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에서 불타오른 동학농민혁명, 이제는 제대로 기억하고 기념해야...
김양식 기념재단 이사, 충북연구원 충북학연구소장
들어가는 말
500년이란 긴긴 세월동안 생명을 유지하던 조선왕조는 19세기 후반에 이르러 안팎으로 큰 위기에 직면하게 된다. 안으로는 낡고 썩은 조선사회를 개혁하고, 밖으로는 밀려오는 외세를 물리쳐야만 하였다. 사상과 이념도 새로운 시대 변화에 맞게 새롭게 변해야만 하였다. 이러한 위기는 조선왕조 500년 역사에서 가장 큰 위기이자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갈 수 있는 기회였으니, 시대적 위기에 맞서 분출한 역사적 대사건이 바로 동학농민혁명이었다.
동학농민혁명은 특정 지역을 넘어서 전국적으로 전개되었고, 참여한 층도 기층인 농민층을 중심으로 다양한 세대와 계층이 함께 한 민족적 거사였다. 그 때문에 현재 확인된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는 비록 전라도가 가장 많은 56.1%이나, 나머지는 전국적인 분포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이들 지역 가운데 동학농민혁명이 활발히 전개되었던 황해도의 경우 통일이 되면 확인 가능한 참여자가 더 증가할 것이다.
<표 1>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지역 분포 현황
지역 | 경기 | 충청 | 전라 | 경상 | 강원 | 황해 | 평안 | 함경 | 미상 | 계 |
명 | 95 | 1,100 | 2,066 | 214 | 77 | 111 | 2 | 2 | 14 | 3,681 |
% | 2.6 | 29.9 | 56.1 | 5.8 | 2.1 | 3.0 | 0.1 | 0.1 | 0.4 | 100 |
* 자료 :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내부자료.
동학농민혁명이 전국적인 거사였다는 사실은 현재 확인된 유적지 분포만 보아도 알 수 있다. 현재 확인된 전국 동학농민혁명 유적지 및 기념시설은 총 355개인데, 전라도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전북을 중심으로 거의 전국적으로 분포되어 있다. 그만큼 동학농민혁명이 전국적으로 일어났기 때문에 그 유적지 역시 전국적인 분포양상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표 2> 전국 동학농민혁명 유적지 및 기념시설 분포 현황
합계 | 서울 | 경기 | 강원 | 울산 | 경남 | 대구 | 경북 | 광주 | 전남 | 전북 | 충남 | 충북 |
355 | 2 | 3 | 13 | 1 | 3 | 3 | 27 | 3 | 80 | 157 | 40 | 23 |
* 자료 :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내부자료.
이 때문에 동학농민혁명을 기념하는 지역 단체도 (사)동학농민혁명유족회를 비롯해 서울 1개, 전라도 12개, 충청도 12개, 경상도 5개, 강원도 1개 등 총 32개 단체가 전국에서 활동하고 있다. 이것이 가능하였던 것 역시 동학농민혁명이 전국적으로 일어난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이를 좀 더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몇 가지 역사적 사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충청도 동학도들도 참여한 전주성 점령
갑오년 4월 27일 전주성을 점령한 동학농민군은 전라도 출신으로만 구성되어 있는 것으로 대부분 알고 있으나, 그렇지 않다. 충청도에서 내려간 동학도들도 동학농민군부대에 합류하여 전주성에 무혈입성하였다.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기 전부터 충청도는 변혁을 꿈꾸는 이들의 움직임이 활발하였다. 동학도들은 이미 1890년대에 들어와 정부를 상대로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기독교는 1882년 미국과의 조약으로, 천주교는 1886년 프랑스와의 조약으로 자유롭게 포교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학은 여전히 탄압을 받았을 뿐 아니라, 동학도들에 대한 수탈과 억압은 오히려 날로 커져만 갔다. 이에 분개한 동학도들은 1892년 10월 20일 공주에 집결하여, 동학에 대한 탄압을 중지하고 일본과 서양 오랑캐의 문란을 바로잡아줄 것을 충청감사에게 요구하였다.
동학도들은 공주집회가 효과가 없자, 전라도 삼례로 내려가 두 차례 집회를 가졌고, 그 다음해 1월에는 직접 서울로 올라가 광화문 앞에 엎드려 왕에게 직접 호소하였다. 3월에는 금강의 물줄기가 닿는 충북 보은에서 전국의 동학도 2만여 명이 모여 집회를 열고 동학의 자유와 수탈 금지를 요구하였다. 보은에 모인 동학도들은 20여 일 동안이나 농성을 하면서 시위를 벌였으나, 정부의 강제 진압에 밀려 자진 해산하였다.
1892-1893년 충청도에서 거세게 분출한 동학운동은 정부의 탄압으로 일시적으로 소강국면에 들어갔으나 갑오년 새해가 되면서 다시 새로운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농민들은 동학 중심의 운동에서 벗어나 근본적인 사회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이런 분위기에서 충청도 남부 금산에서 대대적인 동학도들의 봉기가 일어났다. 동학도 수천 명은 3월 8일 금산 제원역에 모여 10개조의 폐정개혁을 요구하며 집단시위를 벌여, 금산군수의 약속을 받아내는 성과를 얻었다.
그 무렵 전라도에서는 모종의 혁명의 씨앗이 싹트고 있었다. 1894년 1월 10일 전라도 고부에서 농민항쟁을 이끈 전봉준은 탄압을 피해 무장(지금의 고창군)으로 피신하여 손화중을 비롯한 동학도들과 혁명을 모의하였다. 곳곳에 통문을 보내 세력을 규합하는 동시에 함께 할 동지를 모아갔다. 드디어 3월 20일 고창 무장에서 동학농민혁명을 선언한 뒤 4월 27일 호남의 심장부인 전주성을 점령하기에 이르렀다.
3월 8일 금산에서의 동학도 봉기 역시 전라도 전봉준세력과 기맥이 통한 듯하다. 이들은 4월 1일 1천여 명이 진산에 다시 집결하였으나 공격을 받아 114명의 사망자를 낸 뒤 부안으로 내려가 전라도 동학농민군에 합세하였다. 금산 외에 회덕, 진잠, 목천 등지에서도 동학도들이 봉기하여 굶주린 농민들에게 돈과 곡식을 나누어주고 일부는 전라도로 내려갔다. 동학도들이 갑오년 봄 새로운 세상을 만들고자 전라도에서만 봉기한 것이 아니라 금산과 회덕 등 충청지역 동학도들도 봉기하였고, 일부는 전라도로 내려가 전봉준이 이끄는 동학농민군에 합류하여 전주성을 점령하였다.
특이한 점은 홍계훈의 전주성 탈환작전에 충청병영 소속 군대도 동원되었다는 점이다. 충청병영군 1백 명은 탄약 20궤를 가지고 5월 1일 청주를 출발하여 전주성 탈환작전에 투입되었다. 이들은 동학농민군이 전주성을 빠져나온 뒤에도 전주에 남아 있다가 5월 17일 홍계훈이 서울로 돌아간 뒤 다시 청주로 귀환하였다. 이처럼 1차 동학농민혁명 전개과정은 이미 전국적인 사건으로 확대되는 과정에서 전봉준 등이 이끄는 동학농민군에 의해 전라도 중심으로 전개되었을 뿐이다. 따라서 1차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이해 역시 전국적인 사건으로 자리매김한 뒤 접근해야만 올바른 실체를 알 수 있다.
갑오년 여름을 바라보는 두 가지 관점
전주성을 함락시킨 동학농민군은 5월 8일 정부와 화약을 맺고 철수하였다. 전봉준이 이끄는 동학농민군은 각 지역을 순회하며 정부 측과 협의, 서로 협조하기로 약속하고 전라도 각 지역에 집강소를 설치하고 치안질서를 유지하면서 잘못된 정치를 바로잡아나갔다. 그 결과 전라도 정세는 다소 안정되어갔다. 이것이 기존에 갑오년 여름을 바라보는 고정된 관점이었다.
그러나 충남지역은 뜻밖의 사건이 발생하였다. 바로 청일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면서 전장터로 변한 것이다. 청국군은 전라도 동학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5월 3일 아산 백석포에 상륙하여 주둔하였다. 조선 침략의 기회를 엿보던 일본 역시 6월 21일 경복궁을 무력으로 점령하였다. 6월 26일에는 천안 성환에서 일본군과 청국군 사이에 첫 전투가 벌어졌다. 청일전쟁이 일어난 것이다.
청일전쟁은 민족적 위기로 이어져, 시국을 관망하던 동학도들은 5∼6월의 침묵을 깨고 6월 말부터 다시 들고일어나기 시작하였다. 갑오년 여름 공주를 비롯한 충청도 일대는 사실상 행정과 치안질서가 마비된 상태에서, 동학농민군들이 도소를 설치하고 이를 중심으로 활발한 개혁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자 풍전등화의 위기에 빠진 정부는 동학도로 하여금 집강소를 설치해 치안질서를 바로잡도록 하였다. 전라도에서는 동학농민군 지도자 전봉준과 정부를 대표하는 전라감사 김학진 사이에 서로 협력하는 화약을 맺어져 집강소가 7월 6일부터 전면적으로 운영되었다. 정부는 충청도에서도 동학교단의 협조를 받아 동학지도자들을 집강으로 임명하여 도내의 치안질서를 바로잡으려 하였으나, 전라도와 달리 충청도 집강들은 정부의 제안을 수용하지 않았다. 청일전쟁으로 나라의 위기를 눈앞에서 목격한 동학농민군들은 앞 다투어 다시 동학에 들어가고 집회를 여는 등 시국을 관망하던 자세에서 벗어나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며 적극적인 행동을 보였으며, 이는 경상도와 경기도 및 강원도로 확산되는 추세였다.
전국에서 일어난 항일의병전쟁
갑오년 여름 전국 어느 곳이나 동학의 세상이 되었으나 나라 정세는 점점 위기가 고조되었다. 경복궁을 점령한 일본은 조선을 개혁한다는 구실로 내정을 간섭하였고 청일전쟁에서 연속 승리하면서 그 여세를 몰아 동학농민군을 무력으로 진압하고자 하였다.
그에 따라 9월에 들어와 민족적 위기를 해결하고자 전국의 동학농민군은 한 뜻으로 봉기하였다. 항일의병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그래서 전봉준은 집강소체제를 깨고 다시 봉기하였고, 최시형이 이끄는 동학교단 역시 9월 18일부터 무장봉기하여 뜻을 같이 하였다. 9월말 정부에서는 “호남과 호서의 비류가 근래에 다시 영남과 관동과 경기와 황해도 등지에서 만연하였다”고 우려할 정도였으니, 10월에 이르면 사실상 일본세력과 동학농민군 사이에 전국적인 전선이 형성되었다.
제2차 동학농민혁명은 한 마디로 항일의병전쟁이었다. 동학농민군 스스로 자신들을 의병이라 칭하였으며, 동학농민군의 주적은 일본군이었다. 특히 갑오년 10월부터 12월까지 3개월 동안 전국적으로 대규모의 전투가 벌어졌으니, 이 시기 전개된 동학농민혁명 10대 전투는 다음과 같다.

먼저 10월에 있었던 경상도 진주 고승산전투, 강원도 홍천 서석전투, 충청도 천안 세성산전투와 홍주성전투를 들 수 있다. 이들 전투는 전라도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일본군 또는 관군과의 전투였는데, 이들 전투에서 동학농민군 수백 명이 죽었고 확대되던 전선이 충청도와 전라도와 좁혀지는 양상을 보였다.
11월에 있었던 전투는 공주 우금치전투와 청주의 청주전투를 꼽을 수 있는데, 이 전투를 계기로 승승장구하던 동학농민군 기세는 꺾이고 점점 전라도로 내몰리는 상황이었다. 그리하여 전봉준은 11월 26일 태인전투를 끝으로 부대를 해산하였고, 11월 20일경 나주성전투를 끝으로 호남을 지키던 손화중도 더 이상 버티지를 못하였다. 그 결과 전라도 남단으로 내몰린 동학농민군은 12월 14일 장흥 석대들전투를 끝으로 최후의 길을 걸었고, 일본군과 정부군의 포위망을 뚫고 북으로 향하던 최시형부대도 12월 17일 보은 북실전투를 끝으로 모진 겨울을 보내야만 하였다.
이와 같이 항일의병전쟁이었던 2차 동학농민혁명은 전국 곳곳에서 전개되었고, 그 기억은 참여자를 통해서, 또는 유적지를 통해서 명확하게 확인되고 있다. 더욱이 분단의 결과 아직은 그 실체가 명확하게 규명되지 못하고 있는 황해도지역에서의 동학농민군 활동까지 염두에 두고 우리의 인식이 확장시켜보면 동학농민혁명이 전국에 걸쳐 있음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나오는 말
이와 같이 동학농민혁명은 전국적으로 전개된 역사적 대사건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이해는 전라도와 전봉준 중심으로 접근하는 나머지, 동학농민혁명의 진실에 다가서지 못하고 있다. 설령 머리로 이해하더라고 공감의 정도가 떨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것은 지난 20세기의 굴절된 우리 역사의 결과이다. 일제 식민사관은 동학농민혁명을 전라도에서만 일어난 반란으로만 국한시키려 하였고, 제도권 교육을 통해 주입시켰다. 이러한 협소한 이해는 해방 이후에도 비판 없이 지속되었다. 그 결과 오늘날 한국인 대다수는 잘못 된 역사교육으로 동학농민혁명을 바라보는 시각이 국지적인 사건 내지 특정인 중심으로만 이해하게 된 것이다. 다행히 동학농민혁명 100주년이었던 1994년을 계기로 관련 자료가 집대성되고 많은 연구가 축적되면서, 동학농민혁명을 이해하는 공간도 전라도에서 벗어나 전국으로 확장되었고, 전봉준 중심에서 탈피하여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모두에게로 확대되기에 이르렀다.
이제는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이해가 갑오년 전후를 관통하는 시간의 흐름과 한반도 전체를 시야에 넣는 공간 확대를 통해 동학농민혁명의 전체상이 올곧게 정립되어야 할 것이다. 그를 통해 3.1운동을 거쳐 해방 이후에도 면면히 이어져온 밑으로부터의 자유와 평등, 그리고 사람이 하늘이라는 생명의식을 바탕으로 ‘모두가 존엄 받는 대동사회’를 이룩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