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소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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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여름 44호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김수병의 증손자 김용선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김수병의 증손자 김용선


일시 : 2021. 4. 14.(수) 11시

장소 : 고창동학농민혁명유족회 사무실



 

문) 이번 호 『녹두꽃』유족 인터뷰에는 참여자 김수병(金琇炳 1866~1894) 님의 증손자 김용선 선생님을 모셨습니다. 선생님 반갑습니다. 먼저 간략하게 자기소개를 해주시기 바랍니다.


답) 네, 반갑습니다. ‘사람이 하늘이다’는 고결한 정신을 바탕으로 일어난 동학농민혁명의 숭고한 정신을 범국민적으로 확산시키기 위해 애쓰시는 기념재단에 늘 감사하고 있습니다. 전국에 계시는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유족은 물론이고, 전국 각 지역에서 동학농민혁명 정신선양사업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기념사업 단체 관계자 여러분께도 감사드립니다. 덧붙여서 인쇄물과 전자책으로 제작되어 많은 분들에게 배포되는 소식지『녹두꽃』 지면을 통해 이렇게 인사를 할 수 있게 되어 기쁘고 감사합니다.



문) 네, 회장님께서는 고창동학농민혁명유족회 회장직을 수행하면서 동학농민혁명의 정신을 기리고 계승하는 일에 앞장서고 계시는데, 이밖에도 사단법인 고창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와 전국의 참여자 유족들의 모임인 사단법인 동학농민혁명유족회 임원 등으로 활동하고 계시지요? 회장님께서 활동하고 계시는 내용에 대해서도 말씀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답) 증조부님께서 나라가 안팎으로 위기에 처해있을 때 나라와 민족을 위해 자신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동학농민혁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셨다는 사실을 알고 난 후 부끄러운 후손은 되지 말아야겠다고 마음을 먹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동학농민혁명의 숭고한 정신을 가능한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야겠다는 생각에서 나름대로 이런저런 단체에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힘을 보태왔습니다. 그러다보니 고창동학농민혁명유족회 회장과 전국 유족들의 모임인 사단법인 동학농민혁명유족회 이사직을 맡고 있습니다. 현재 문화체육관광부 특수법인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의 제4기 자문위원이라는 직책을 맡고 있기도 합니다.



문) 네, 회장님.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김 수자 병자 님에 대해 여쭙겠습니다. 회장님 증조부님이신 수자 병자 님께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했다는 사실을 어떤 경로를 통해 언제 알게 되셨는지요?


답) 백부님(故김재덕)을 통해서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열세 살 때로 기억합니다. 초등학교를 다닐 때니까 60년대 후반인데, 그때 저희 백부님이 지역에서는 꽤나 이름이 있으신 분이셨어요. 고창에서 김재덕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죠. 백부님은 아주 엄하신 분이셨는데 저는 제 아버님보다는 백부님께 더 많은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때만 해도 가족들끼리 왕래가 잦아서 저는 큰집을 거의 매일 가다시피 했었습니다. 그때 가족들이 모이면 백부님께서는 “우리 집에는 족보가 없다. 이 점이 가슴 아프다”라고 자주 말씀 하셨어요. 그때는 제가 어린 나이였기 때문에 족보가 무엇인지도 몰랐고, 그래서 백부님께서 하신 말씀의 뜻을 잘 알아듣지 못하였지요. 그런 제게 백부님께서는 족보란 우리 조상님들 때부터 내려오는 혈통과 집안의 내력을 적은 책이라고 설명해주셨습니다. 그러시면서 “증조부님께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셔서 우리가 역적의 후손으로 낙인찍혀 숨어 다니느라 족보가 없다.”라고 덧붙여 말씀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그렇게 백부님을 통해 증조부님께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셨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문) 백부님께서 60년대 후반 회장님께 증조부님의 동학농민혁명 참여 사실을 말씀해주셨다는 것인 일정하게 일리가 있는 것 같습니다. 반란사건으로 치부되던 갑오년의 역사가 1963년 10월 3일 정읍 황토현 정상에 ‘갑오동학혁명기념탑’이 세워지면서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역사인식이 조금씩 변화하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실제로 1968년 정읍시 고부면 신중리 주산마을에서 사발통문이 발견되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고, 그 이듬해인 1969년 4월 그 마을 앞에 ‘동학혁명모의탑’이 세워지거든요. 이런 사회적 변화와 백부님께서 당신의 조부님이신 김자 수자 병자 어른의 동학농민혁명 참여사실을 회장님께도 말씀하신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후 1994년을 전후하여 동학농민혁명 100주년 기념사업이 전국적으로 펼쳐졌고, 그 노력의 결실로 2004년 동학농민혁명 특별법이 제정되었습니다. 이후 특별법에 따라 2004년 9월 동학농민혁명참여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위원장: 국무총리)가 설치되어 참여자와 유족을 조사하고 등록하게 되었지요. 증조부님의 참여자 등록 관련 업무는 어느 분이 맡아보셨는지요?


답) 증조부님을 참여자로 등록해달라고 신청하고, 그에 따른 유족등록 위한 일들은 제 아버님이신 고 김 재자 수자님께서 맡아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는 1993년 유족회가 창립을 준비하던 때부터 적극적으로 유족회 활동을 하셨습니다. 이후 특별법이 제정되어 참여자와 유족등록 업무를 추진할 때 제 아버지께서 김 수자 병자 당신의 조부님에 대한 서류를 준비하여 참여자 등록을 신청하시고, 아버님을 포함해 손자녀 5명을 유족으로 등록하셨습니다. 특별법 제정 이듬해 가을, 그러니까 2005년 9월에 신청서를 접수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후 저를 포함하여 총 14명의 증손자녀가 유족으로 등록하였습니다. 심의위원회에서 서면조사와 인터뷰 등을 통해 접수된 내용에 대한 사실관계 등을 확인하는 절차를 거쳤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참여자 유족으로 현재 등록되어 있는 사람은 19명인데 저희 큰 집과 저희 집 가족들만 유족으로 등록되어 있습니다. 아직 등록하지 못하고 있는 유족들이 대략 50여 명쯤 되는데, 관련서류 등을 준비해서 차차 등록해나갈 생각입니다.



 

문) 인터뷰를 하러 오기 위해 증조부님 관련 자료를 좀 살펴봤습니다. 증조부님께서는 김해김씨(金海金氏)로 전라북도 고창군 고창읍내리에 태어나서 동학농민혁명 당시에 고창지역 농민들을 규합하여 혁명에 가담시키기 위해 주도적인 역할을 하셨던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동학농민혁명 당시 청년부대와 천민부대의 기포장으로 활약했다는 점도 볼 수 있었는데, 증조부님에 대해 전해들은 얘기가 있으면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답) 백부님께서 말씀하시길, 저희 증조부님께서는 기골이 장대하여 힘이 장사였고, 의지가 굳어 오달진 성품이 넘쳐 주변의 젊은이들 속에서 늘 우두머리로 활동하셨다고 얘기해주셨어요. 고창에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셨는데 청년부대와 천민부대를 규합하여 기포장으로 활약하셨다고 합니다. 그때는 고창이라는 동네가 좁아서 고창사람들은 저의 증조부님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알려진 분이었다고 합니다. 고창문화원장을 지내신 이기화 선생님도 저에게 제 증조부님에 대한 얘기를 백부님과 비슷하게 많이 해주셨어요.



문) 증조부께서는 청년부대 기포장으로 활동하시다가 우금티 전투 때 패배한 이후 도피생활을 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여기에 대해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답) 고창 숲정이 거리라는 곳이 있습니다. 지금 그곳에 가면 ‘동학농민혁명군 사형터’라는 표석이 있어요. 증조부님께서 무장기포 때부터 적극적으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셨다가 우금티 전투에서 패배한 이후 고향으로 숨어들어 피신하셨고, 숨어 있다가 관군의 밀고로 잡히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고창 숲정이 거리에서 처형을 당하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세상에나 일본놈들 정말 무지막지한 놈들이예요. 저의 증조부님께서 ‘관솔형’이라는 형을 받고 돌아가셨답니다.



 

문) ‘관솔형’이라구요? 화형이나 참형, 교형 등은 들어봤는데, 저는 관솔형이라는 형벌을 처음 들어봅니다. 어떤 형을 말하는 것인가요?


답) 네, 정말 무지막지해서 얼른 입에 담기조차 꺼려집니다. 관솔이라고 있잖아요?  소나무 진액이 엉겨 붙은 옹이 박힌 나무끌텅이, 그걸 전라도에서 관솔이라고 하잖아요? 송진이 엉겨 붙은 거라서 불에 잘 붙고, 불이 한 번 붙으면 오래오래 타들어가는 것이 관솔 아닙니까? 그 관솔을 사람의 머리 중심부 숨구멍에 박은 후 그 관솔에 불을 붙이면 계속 타들어가다가 나중에 펑~~ 하고 골이 터진다고 합니다. 그 무지막지한 형이 관솔형이랍니다. 세상에나, 제가 어렸을 적에 그 얘기를 듣고서 얼마나 치가 떨리고, 울컥하고... 그랬습니다.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형벌로도 가장 참혹한 형벌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정말로 왜놈들은 천인공로 할 짓을 서슴없이 저질러놓고도 반성은커녕 지금도 저렇게 뻔뻔스럽게 독도가 지네 땅이네 뭐네 지껄이고 있잖아요?



 

문) 아, 네.... 말을 이어가기가 좀.... 회장님, 증조부님은 어디에 모셔져 있는지요?


답) 네, 증조부님은 고창군 고창읍 남쪽에 위치한 노동리라고 하는 곳이 있는데 그곳에 모셔져 있습니다.



문) 동학농민혁명은 지난 한 세기 동안 반란사건으로 축소‧왜곡되었고, 그 후손들은 숨죽이며 살아야했지요? 선생님 집안도 힘든 세월을 보내셨을 것으로 여겨지는데 어떻습니까?


답) 지금도 일부 보수 우익세력들은 ‘동학농민혁명은 국가를 전복하려고 한 역모이자 반란이다.’라고 매도하는 경향이 남아있습니다. 하지만 1차 기포지인 무장포고문의 어느 한 구절, 단 한 글자도 반란이라고 볼 수 있는 표현은 없습니다. 도리어 포고문에는 임금을 칭송하고 백성의 안위와 나라를 걱정하는 보국안민의 정신이 표방되어 있어요. 아주 명문으로 작성된 무장포고문을 한 번이라도 제대로 읽어보고 그 뜻을 헤아린다면 감히 동학농민혁명을 반란이네 뭐네 지껄일 수 없을 겁니다. 그런데도 이런 숭고한 정신을 부정하는 자들에게 동학농민군이 말도 못하게 탄압을 받았다고 들었습니다. 저희 조부님은 증조부님이 돌아가신 후에 태어났어요. 말하자면 조부님은 유복자입니다. 증조부님이 처형을 당하신 후에 조부님이 태어나셨는데, 관에서 사람이 나오면 증조모님께서는 어린 조부님을 치마 밑에 감추곤 했답니다. 당연히 학교도 못 다니셨죠. 하지만 조부님께서는 참 영리한 분이셨다고 백부님께 들었습니다. 조부님께서는 증조부님을 아주 많이 닮으셨다고 합니다. 조부님 성품도 아주 강직하셨는데, 겉모습만이 아니라 성품도 꼭 증조부님을 닮으셨다고 증조모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조부님께서 많이 들으셨다고 합니다. 하여간 유복자로 태어나셔서 그랬는지 몰라도 저희 조부님은 후세에 대한 욕심이 많으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저희 조부님 자손이 5남 3여, 8남매예요.(웃음)



 

문) 동학농민혁명으로부터 110년만인 2004년 특별법이 제정되었고, 125년만인 2019년 2월에 동학농민혁명기념일이 제정되어 매년 정부(문화체육관광부) 주최로 동학농민혁명 기념식이 거행되고 있습니다. 오는 5월 11일에는 제127주년 동학농민혁명 기념식이 경복궁 흥례문 마당에서 개최됩니다. 참여자 유족의 한 사람으로서 감회가 남다를 것 같은데, 어떻습니까?


답) 네, 감회가 새롭지요. 동학농민혁명 100주년 기념사업이 추진되던 때와 특별법이 제정되던 무렵까지 제 아버지께서 유족회 활동에 적극적으로 임하셨기 때문에 저는 그때까지만 해도 동학농민혁명 정신선양사업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후 제가 적극적으로 기념사업에 나서고 있습니다. 정부에서 동학농민혁명 기념일을 제정해주고, 매년 기념식을 거행해준 것에 대해서 고맙고 또 고마운 마음입니다. 아쉬운 것은 아직도 정부에서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를 독립유공자로 서훈하는 일에 적극적이지 않아 보인다는 점입니다. 다행스럽게 지난 해 말부터 국회나 국가보훈처 등에서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를 일제 국권침탈에 맞선 반일의병으로 인식하고, 독립유공자로 서훈을 추진하려는 움직임이 보여 기대를 갖고 있습니다. 다음 달인 5월 6일 국회에서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독립유공자 서훈을 위한 학술회의를 개최하고자 준비 중이라는 얘기를 들었고, 5월 20일에는 국가보훈처에서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를 독립유공자로 서훈하기 위한 학술회의가 준비 중이라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제 증조부님을 포함한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분들의 숭고한 구국애민의 정신이 너무너무 늦었지만 이제라도 제대로 평가가 이루어지기를 간절하게 소망하고 있습니다.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를 일제에 항거한 독립운동으로, 독립유공자로 서훈하기 위해 노력하시는 모든 분들에게 깊이 감사드립니다.



문) 고창군과 사단법인 고창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는 매년 1월 전봉준 장군 탄신 기념제를 거행하고 있습니다. 전봉준 장군께서 1855년 을묘년 12월 3일 출생하셨는데, 양력으로 치면 1856년 1월 10일경이어서 거기에 맞춰 탄신제를 모시고 있지요?


답) 네, 전봉준 장군 탄생지는 고창군 고창읍 죽림리 당촌 63번지입니다. 그런데 1990년대 중반 이전까지만 해도 전봉준 장군이 전주에서 태어나셨다, 태인 동곡리에서 태어나셨다, 정읍 이평면 조소리에서 태어나셨다, 고부에서 태어나셨다 등등 주장이 많았습니다. 동학농민혁명이 일제강점기 등을 거치면서 반란사건으로 치부되어 전봉준 장군이 반란군 수괴(?)로 매도되던 때는 자기 고향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을 꺼려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연구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한 1994년 동학농민혁명 100주년을 전후하여 최고 지도자 전봉준 장군의 태생지가 자기 고향이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하여간 그렇게 전봉준 장군에 대한 탄생지가 논란이 되어오다가 1996년인가? 그 어간에 열린 학술회의에서 우리나라에서 족보에 대해서는 최고의 권위자로 자타가 인정했던 고 진기홍 선생님을 비롯하여 이기화 당시 고창문화원장님 등이 전봉준 장군 태생지가 고창군 고창읍 죽림리 당촌마을 63번지라는 사실을 천안전씨 족보를 비롯하여 제반 사료들을 근거로 논증하는 논문이 발표되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이후 역사학계의 많은 연구자들의 연구와 논의를 거쳐 전봉준 장군이 고창 당촌 태생이라는 것이 확인되었고, 이를 근거로 얼마 전에는 전봉준 장군 생가 터가 전라북도 지정문화재 기념물 제146호로 등록되기까지 했습니다.



 

문) 네, 저도 전봉준 장군 생가 터가 전라북도 도지정문화재로 등록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사실 저는 거의 매년 빠짐없이 전봉준 장군 탄신제에 참석하였는데, 그때마다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심정에 빠져들곤 합니다. 전봉준 장군께서 1894년 12월 2일 순창 피노리로 관군에게 붙잡히셨는데 그 다음 날이 전봉준 탄신일이거든요. 전봉준 장군 출생일이 1955년 12월 3일이잖습니까? 그러니까 전봉준 장군께서는 생일 전날 관군에게 붙잡히신 겁니다. 이후 서울로 압송되어 일본 영사관 순사청에 유치된 상태에서 의금부 권설재판소를 오가며 재판을 받았고, 이듬해 음력 1895년 3월 30일, 양력으로 4월 24일 의금부 건너편 전옥서에서 교수형을 받고 순국하셨잖습니까? 순국하신 4월 24일은 한 해 전인 1894년 4월 25일 동학농민군 무장기포 바로 하루 전날입니다. 우연치고는 너무나 가슴 아픈 우연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생각 때문에 1월 10일 탄신제와 4월 25일 무장기포 기념 때 한없이 마음이 무거워지곤 합니다.


답) 아 네.... 그렇군요. 문부장님 얘기를 듣고 보니 정말로 그렇네요? 생각지도 못했는데 우연의 일치라고 치부하기에는 뭔가 가슴을 멍하게 만드는 것이 있네요. 참 가슴이 아프네요. 그동안 수많은 동학농민혁명 연구자나 기념사업 관계자, 참여자 유족들을 만났지만 문부장님이 방금 하신 그런 얘기는 처음 듣습니다. 정말 맥락을 놓고 생각해보니 그렇네요. 전봉준 장군께서 체포된 날이 생신 전날이고, 순국하신 날이 이듬해지만 무장기포 전날이라.... 가슴이 아프네요.



문) 네, 회장님. 고창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에서 고창군에 전봉준 장군 동상을 건립하기 위해 고창군민은 물론이고 전국적으로 건립기금을 모금하고 있지요? 전봉준 장군 탄신 166주년이 되는 2022년 1월 10일을 기해 제막할 계획이라고 하는데, 추진상황에 대해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답) 전봉준 장군 고향인 고창에 그분 동상이 없다는 건 가슴 아픈 일이에요. 우리 근현대사의 암울한 상황 때문에 그분 고향이 고창이라는 게 밝혀진 것이 늦어서 그런 것이기도 하겠지만 어쨌거나 아직까지도 녹두 전봉준 장군 고향 고창에 동상이 세워져 있지 않다는 것이 고창에 살고 있는 사람으로서 좀 멋쩍습니다. 그래서 지난 2018년에 고석원 전 전라북도의회의장님을 위원장으로 ‘전봉준장군동상건립위원회’를 구성하여 동상 건립사업을 추진했었어요. 그래서 2019년도 전봉준 장군 동상 건립사업비를 고창군비로 세웠어요. 그랬는데 그때 전라북도에서 추진하는 ‘전라 천년’이라는 사업의 일환으로 고창군이 파랑새공원 조성사업을 추진하면서 전봉준 장군 동상 건립사업을 이 공원사업에 연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이 제기 되어 이에 따라 전봉준장군동상건립위원회와 논의도 없이 전봉준 장군 동상 건립사업비가 빠지는 일이 생겼어요. 그러다가 2020년으로 들어서서 다시 전봉준 장군 동상을 고창군에 건립하자는 논의가 재개되어 지금 고창군민은 물론이고 전 국민을 대상으로 건립기금을 모금하고 있고, 다시 동상건립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논의를 해나가면서 행정적인 절차를 함께 밟고 있는 상황입니다. 동학농민혁명 전공연구자는 물론이고,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이 힘을 모아 제대로 된 전봉준 장군 동상을 건립하기 위하여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경향각지의 뜻 있는 분들과 고창군민의 성금으로 세워질 이번 동상 건립사업은 전봉준 장군과 여러 장군님들, 그리고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치신 무명 동학농민군의 정신을 담아낼 수 있는 참 동학농민군상 건립으로 이어졌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문) 네, 회장님 여러모로 정말 수고가 많으십니다. 끝으로, 회장님의 증조부님을 비롯하여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신 수많은 분들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고 계승‧발전시키기 위해 앞으로 어떤 사업이 추진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는지요?


답) 동학농민혁명의 여러 측면에서의 연구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동안 전봉준 장군 중심으로 많은 연구가 이루어졌지만, 앞으로 이름 없이 순국하신 무명 동학농민군에 대한 연구도 적극적으로 진행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또한, 재작년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열린 제125주년 동학농민혁명 기념식 때 이낙연 국무총리께서 기념사를 통해 “동학농민혁명은 우리나라 근대 최초 민주주의운동이고, 우리나라 근대 최초 민족주의운동이고, 우리나라 근대 최초 반부패개혁운동”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동학농민혁명의 역사적 의미와 그 위상에 대한 대중적인 역사인식은 저조한 형편입니다. 공영방송에서 동학농민혁명을 주제로 감동적인 드라마로 만들어서 방영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많은 국민들이 동학농민혁명의 역사적 의미와 그 역사적 위상에 대해 바르게 인식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올해는 동학농민혁명 기념식 때 꼭 대통령께서 참석해주셨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있습니다. 기념재단에서 많이 힘써주시기 바랍니다.



문) 네, 선생님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바쁘신 중에도 인터뷰에 응해주신 것에 대해 깊이 감사드립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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