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혁명 참여자 정백현의 손자 정남기
일시 : 2021. 8. 25.(수) 13시
장소 : 동학농민혁명유족회 사무실

문)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소식지 『녹두꽃』(계간, 통권 45호) 2021년 가을호에는 동학농민혁명유족회 정남기 고문님을 모셨습니다. 인터뷰를 위해 이렇게 만나 뵈니 또 다른 느낌입니다.(웃음) 녹두꽃 독자님들께서는 잘 알고 계시겠지만 그래도 간단하게 고문님 자기소개해주실 것을 부탁드립니다.
답) 반갑습니다. 동학농민혁명유족회 고문으로 활동하고 있는 정남기입니다. 1993년 하반기에 구성된 동학농민혁명유족회 창립준비위원회를 거쳐 1994년 3월에 창립된 동학농민혁명유족회의 사무총장과 회장직을 10년 넘게 장기 집권했었지요.(웃음) 제 나름대로는 40여 년을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명예회복과 우리 후손들의 명예를 회복시키는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100주년 기념사업 이듬해인 1995년 서울에서 출범하여 활동했던 ‘동학농민군 서훈 범국민추진위원회’에서 집행위원장을 맡기도 하였습니다. 특별법이 제정된 해에는 강원도,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서울·경기 등 전국 각 지역에서 활동하던 기념사업단체와 함께 설립한 재단법인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상임이사를 맡아 활동했고, 문화체육관광부 특수법인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감사직을 맡기도 했습니다. 이밖에도 언론인으로서 2005년부터 한국언론진흥재단 이사장, 고창중·고등학교총동창회 회장직을 맡아 개교 100주년 기념사업에 힘을 보태기도 하였습니다.
문) 네, 제가 1992년 6월 5일 창립된 동학농민혁명백주년기념사업회 사무처 직원으로 시작하여 동학농민혁명 100주년 기념사업, 동학농민군 지도자 유골봉환사업, 동학농민혁명 특별법과 국가기념일 제정 등의 실무를 맡아왔기 때문에 벌써 고문님과는 30년 가까이 인연을 맺어온 것 같습니다. 지난 30년 사이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역사인식이 크게 변해왔는데, 유족의 한 사람으로 이점에 대해 소회가 남다를 것 같습니다.
답) 동학농민혁명은 우리나라 민주주의 뿌리이자 반일의병전쟁이었는데 그 역사적 의미가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채 일본인 사학자와 그에 빌붙어먹은 식민사학자 등에 의해 동학이라는 사교집단의 난(亂)이라거나 전라도 고부군수 조병갑의 학정에 따른 지역적인 반란사건으로 왜곡되고 축소되었습니다. 그러다보니 혁명에 참여했던 사람은 ‘반란군’으로, 그 후손들은 ‘반란군의 자손’으로 매도당해왔습니다. 친일파나 일제에 부역한 사람들은 부귀영화를 누리고 일본군과 맞서 싸웠던 사람들과 그 후손들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한 채 살아야 했던 참 무지막지한 세월이 지난 20세기였다고 해도 그다지 틀리지 않을 것입니다.
문) 네, 그래서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후손들의 모임인 동학농민혁명유족회가 혁명이 일어났던 때로부터 꼭 100년 만인 1994년 창립되게 되는데, 창립 때부터 물심양면으로 헌신하셨던 고문님께서 하실 말씀이 참 많으실 것으로 생각됩니다.
답) 지난 시절을 어찌 말로 다하겠습니까? 어쨌거나 1980년대 민족민주운동 세력이 성장하면서 1994년 동학농민혁명 100주년을 전후하여 우리 사회의 분위기가 크게 바뀌면서 유족회 창립도 가능했지요. 19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을 기점으로 민주화의 바람이 거세지면서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대중적인 역사인식도 크게 바뀌었는데, 이 대목에서 고(故) 이이화 선생님을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어요. 재작년 봄에 돌아가신 이이화 선생님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 아립니다. 이이화 선생님은 우리 동학농민혁명유족회 창립의 산파(産婆) 역할을 하신 분이에요. 1986년도에 ‘역사문제연구소’를 설립하였잖아요? 서울 중구 필동에 사무실이 있었는데, 이 연구소에서 ‘동학농민전쟁백주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1989)를 발족한 후 전국 각 지역에 흩어져 있던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유족들을 찾아다니셨지요. 그때 역사문제연구소의 젊은 학자들을 비롯하여 전국의 민주화교수협의회 근현대사를 전공하신 진보적인 역사학자들이 애를 많이 쓰셨지요. 우리 유족회에게는 아주 고마운 분들이예요. 지금은 고인이 된 우윤 선생을 비롯하여 신순철, 신영우, 배항섭, 김양식, 왕현종, 김선경, 박준성 등등 참 많은 분들이 동학농민혁명의 역사적 의미와 그 위상을 바로세우고자 강단과 유적지 등을 답사하면서 사회적 분위기 전환에 크게 기여하였지요.

문) 동학농민혁명유족회가 1993년 창립준비위원회를 거쳐 1994년 3월 3일 서울 고려대 교우회관에서 개최되었는데, 이때 1980년대 학생운동의 상징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 임종석, 임수경 두 국회의원이 참석했었지요. 기억을 되살려서 그때의 감회를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답) 감회, 어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겠어요. 가슴이 벅차기도 했고, 너무 늦게 후손으로서의 도리를 한 것 같아 송구스럽기도 하고 그랬지요. 창립대회 때 임종석 국회의원과 임수경 국회의원이 참석해서 축사를 했었지요. 몇 년 전에 돌아가신 우리 유족회 고(故) 김재훈 선생이 참석하라고 연락해서 두 국회의원이 참석했었어요. 김재훈 선생 아들이 김세진 열사잖아요.
문) 네, 저도 1980년대 학생운동을 했기 때문에 김세진 열사를 잘 알지요. 전대협이 창립되기 한 해 전인 1986년 서울대 자연대 학생회장이었던 김세진 열사가 1986년 4월에 대학생 전방입소 반대투쟁을 하면서 ‘반전반핵, 양키고홈’을 외치고 분신하였지요. 그래서 병원에서 치료를 받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5월 초에 사망했었어요. 김재훈 선생님 살아계실 때 만나면 제가 늘 고개를 들 수 없었던 기억이 지금도 또렷합니다.
답) 우리 유족회 김재훈 선생이 김세진 열사의 아버지였기 때문에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활동도 적극적으로 하셨고, 그런 연고로 1980년대 학생운동에 몸담았던 사람들은 대체로 유족회 일이라면 적극적으로 응해주었어요. 유족회 창립대회 임종석과 임수경 두 국회의원이 참석하여 축사를 했던 것도 그런 인연 때문이었어요. 그런데 유족회 일부가 빨갱이 잔치를 벌이는 것이냐고 낯을 붉히기도 했었어요. 그래서 제가 그 몇몇 우리 유족회 회원들에게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빨갱이 운운이냐 창피한 줄 알아야 한다. 동학농민군의 후예라면 응당 사회변혁에 적극적인 것이 맞지 그 반대인 것이 맞느냐? 무슨, 여기가 보수 민보군 유족회냐!” 라고 소리쳐서 상황을 제지했던 기억이 나요. 하여간 그런 저런 일들이 있었지만 유족회 창립대회는 아주 성황리에 마칠 수 있었지요. 창립대회 뒤풀이 자리에서 이이화 선생님과 제가 눈을 마주쳤는데 괜히 가슴이 뭉클해지고 눈시울이 언뜻 붉어졌던 기억이 지금도 선명하네요. 어쨌거나 유족회가 창립될 수 있었던 건 무엇보다도 동학농민혁명 100주년 기념사업이 성공적으로 추진되어 반란사건이라는 기존의 역사인식이 부서지고 우리나라 근대 민주주의 뿌리로, 일제의 침략에 맞선 반일구국의병전쟁으로 재인식된 것이 큰 힘이 되었지요. 사실 100주년 기념사업을 준비하던 때까지만 해도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대중적인 역사인식은 ‘반란사건’이나 ‘전라도사건’에 머물러 있었던 측면이 강했어요. 100주년 기념사업이 이러한 대중적인 역사인식을 바꿔놓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지요. 그 힘이 10년 뒤인 2004년 동학농민혁명 특별법 제정을 견인해 냈고, 마침내 2019년 동학농민혁명 국가 기념일이 제정될 수 있었던 것이지요. 따라서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후손이라면 혁명 100주년 때 어려움을 무릅쓰고 십시일반으로 자기 주머니 털어가면서 역사바로세우기 운동을 전개했던 동학농민혁명 전공연구자나 기념사업 단체의 임원과 회원 여러분에게 감사의 마음을 가질 필요가 있어요. 고마움을 표하는 뜻에서 100주년 기념사업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던 전국의 기념사업단체들을 떠올려보면, 서울의 역사문제연구소(소장 이이화),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이사장 염무웅), 전북 전주의 사단법인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이사장 한승헌), 전북 정읍의 동학농민혁명계승사업회(회장 조광환), 경남의 진주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회장 김범수), 경북의 상주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회장 강효일), 충남의 공주우금티동학농민전쟁기념사업회(회장 진영일), 태안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회장 문영식), 충북의 보은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회장 박윤수), 동학농민혁명100주년기념전시조직위원회(위원장 김정헌) 등등이 생각납니다.

문) 고문님께서 동학농민혁명유족회 창립 이전부터 활동하셨기 때문에 오늘 인터뷰의 목적인 조부님에 대한 얘기가 아니라 유족회 창립과 기념사업 일반으로 흐르는 것 같습니다. 오늘 인터뷰 본래 목적으로 되돌려보겠습니다.(웃음) 조부님이신 정 백자 현자 참여자께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셨다는 사실은 언제 알게 되셨는지요?
답) 제가 고등학교 다니던 때 알았습니다. 지금은 책 제목과 저자가 명확하게 기억나지 않는데 『동학혁명 전봉준』인가? 그 책을 읽고 알았어요. 거기에 할아버지 함자가 나오더라구요. 그 책을 읽고 난 후 아버지께 왜 할아버지께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셨다는 사실을 말씀해주지 않으셨냐고 여쭤봤지만 그때도 아버지께서는 묵묵부답이셨어요. 그냥 자식들에게 말하고 싶지 않으셨던 것 같아요. 그 후로 저는 손자로서 동학농민혁명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어요. 후에 대학을 다니느라 서울로 올라와서 고창군 해리면 출신인 당시 국사편찬위원장을 맡고 계시던 어른을 뵙게 되었어요. 그분께 저의 할아버지에 대해 여쭤봤는데, 그분 말씀이 당신 전공분야가 아니라 잘 모르겠다고 하시대요. 그렇게 세월이 흘렀고, 1980년대 후반기로 접어들면서 이이화 선생님을 만나게 되었어요. 그 무렵 이이화 선생님은 동학농민혁명 100주년 기념 특별기획으로 한겨레신문에 게재할 <동학농민혁명 인물열전>을 준비하고 계셨어요. 그때부터 이이화 선생님과 가까워지고 다른 참여자 유족과도 교류하게 되었지요. 그렇게 해서 1993년 서울 중구 필동에 있던 역사문제연구소 사무실에서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유족 15명 정도가 모였어요. 그 모임이 유족회 준비위원회인 셈이었지요. 그때 모였던 분들이 전북 부안의 김영태, 경북 예천의 전장홍, 윤영식, 전북 정읍의 김환옥, 서울의 김재훈, 함기영, 경기도의 임영섭 등이었어요. 그 모임을 이후 곧바로 전북 정읍의 손주갑 선생이 합류했어요. 이때부터 손주갑 선생이 총무를 맡아 이후로도 계속해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 궂은일이란 궂은일은 도맡아했지요. 그렇게 해서 100주년이던 1994년 3월에 동학농민혁명유족회 창립대회를 갖게 되었어요. 창립대회 때 초대 회장으로 김영중 선생님을 모셨어요. 김개남 대접주 아래에서 활동하면서 나중에 경상도 진주와 하동, 전라도 광양과 순천 등지를 호령했던 영호대접주 김인배 장군의 후손이지요. 저는 그때 아직 나이도 젊고 해서 사무총장을 맡았고, 손주갑 선생이 총무를 맡았어요. 그 무렵만 해도 유족회 내부적으로 논란이 적지 않았습니다. 그중 대표적인 논란의 하나를 든다면 ‘동학농민혁명’에서 ‘농민’을 빼고 ‘동학혁명’으로 해야 한다는 의견과 농민을 빼서는 안 된다는 논란이었어요. 제 생각은 갑오년의 역사에서 ‘농민’을 빼버리는 것은 핵심을 빼버리는 것이나 마찬가지라서 ‘농민’을 빼면 안 된다는 쪽이었어요. 19세기 중엽 문명사적 전환이 요청되던 때 창도된 사상적 측면 또는 종교적 측면에서 동학사상의 중요성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갑오년에 있었던 변혁지향의 농민항쟁을 사상적이고 종교적인 측면으로 국한시키면 제한성이 너무 많이 뒤따른다는 게 지금도 변함없는 제 생각입니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에서 농민(지금의 개념으로 바꿔서 생각하면 계급으로서의 농민이라기보다는 계급적 성격을 벗어난 국민이라는 개념에 가깝다.)이 중심이 되어 척양척왜, 보국안민, 제폭구민이라는 기치를 들고 일어나 낡은 봉건제도 개혁을 통해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지향했던 사회변혁투쟁이자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후 국권농단을 저지하기 위해 일어난 반일의병전쟁인데, 그 주체인 농민을 빼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저는 그때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어쨌거나 이런 논란은 결국 2004년 동학농민혁명 특별법의 명칭과 국가기념일 명칭이 ‘동학농민혁명’으로 확정되면서 일단락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문) 네, 또 유족회와 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 일반의 얘기로 돌아가는 듯합니다.(웃음) 다시 조부님에 관한 얘기를 여쭙겠습니다. 오지영의 『동학사』에 조부님께서 동학농민군 편제 중 비서(祕書)라는 직책을 맡았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조부님께서 문장이 아주 좋으셨다고...
답) 조부님께서는 무장현 예전리 상평이라는 마을에서 태어나셔서 그곳에서 자라셨습니다. 어릴 때부터 서당을 다니면서 과거시험을 준비하셨다고 해요. 그 과정에서 인근 신대리에 천안전씨 집성촌이 있는데, 그곳에 사는 분들과 친교가 있었다고 해요. 존함이 정 만자 원자를 쓰셨던 제 증조부님께서 신대리 쪽 사람들과 교류하면서 일찍이 무장의 손화중 포에 들어가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분의 아들이자 제 조부이신 정 백자 현자 이분도 자연스럽게 신대리 천안전씨 사람들과 교류가 있었던 것 같아요. 전해 듣기로는 할아버지는 어렸을 때부터 글을 잘 썼다고 해요. 어릴 때부터 글을 잘 쓰셨기 때문에 연세가 드시면서 무장현 일대에서는 글 잘 쓰기로 이름이 났다고 합니다. 그래서 동학농민혁명 때 비밀스러운 글, 요즘 말로 성명서 그런 것을 쓰는 역할을 맡게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문) 조부님께서 태어나신 집, 그러니까 생가(生家)가 공음면 예전리이지요? 그곳에 몇 년 전에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정백현의 생가>라는 것을 알리는 표지판이 세워졌는데, 고창군에서 세운 것인가요?
답) 그 집이 조부님께서 태어난 집이 맞아요. 복원한 게 그때의 집 그대로인데, 동학농민혁명 이후에 살림이 곤궁하여 그 집을 다른 사람에게 팔았어요. 그래서 현재 다른 사람이 살고 있고, 그곳이 조부님 생가(生家)라고 알리는 표지판이 세워진 것은 몇 해 전이었어요. 나중에 알았는데, 민족문제연구소 전북지부장으로 활동하고 있는 김재호 선생이 “친일했던 김성수나 서정주 등과 관련된 집은 정비하면서 일본군과 맞서 싸운 동학농민군 참여자 생가에는 표지판 하나 세워져 있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라고 고창군청에 요구하여 세워졌다고 합니다.
문) 조부님께서는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셨다가 돌아가시지 않고, 몸을 피해 서울로 올라가셨지요? 서울에서 사시다가 나중에 다시 고향 무장으로 내려오셔서 돌아가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 동학농민혁명 100주년 때 조부님께서 서울에서 거주하시면서 남긴 유고(遺稿)를 국역하여 『정백현의 서울일기』라는 책자로 발행하셨지요?
답) 조부님께서 남긴 글이 있다는 것을 일찍이 알았지만 크게 관심을 두지 못했어요. 그러다가 이이화 선생님께서 제 아버님과 인터뷰하는 과정에서 세상에 알려졌어요. 그래서 100주년을 기해서 한자로 되어있던 원고를 고창군 아산면에 살고 계시던 아버님 친구분께 번역을 부탁해서 책으로 엮어 출판했습니다. 번역한 원고의 내용 중에는 눈물 없이는 읽기 힘든 부분들이 많지요. 누구에게도 말 못할 아픔이 글속에 담겨 있었습니다. 조부님께서는 26살 때 전봉준 장군을 만나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했고, 동학농민군이 일본군과 관군 연합부대에게 패배한 후 서울로 피신해서 사시다가 다시 고향으로 내려가셔서 52세 때 돌아가셨지요. 서울에서는 3년 내지는 4년 정도 사셨던 것 같아요. 서울에서 사시다가 그러니까 1898년이나 1899년이었겠지요? 그때도 고향으로 돌아오는 게 여의치 못했다고 해요. 그래서 흥선대원군 쪽 사람이 무장현감으로 부임해 내려올 때 동행하여 무사히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고 합니다. 무장에 내려오신 후 20여 년을 은둔자처럼 조용히 살다가 돌아가셨지요. 조부님께서 낙향하신 후 제 아버님께서 태어났습니다. 조부님께서는 4남 2녀를 두셨던데, 동학농민혁명 전에 3남 2녀를 낳고, 서울로 피신했다가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 후에 제 아버지를 낳으신 거죠. 그래서 가끔 농담으로 조부님께서 동학농민혁명전쟁 때 돌아가셨으면 우리 아버지는 태어나지 못했을 테고, 나도 이 세상에 나오지 못했을 거라고 얘기하곤 했지요.
문) 이번에 소식지를 기획하면서 2010년 창립이후 지속적으로 발행해온 『녹두꽃』 포맷별 게재 상황을 분석해봤습니다. 그래서 발견하게 된 것이 <유족인터뷰> 코너에 유족회 초창기부터 애써오셨던 분들이 거의 빠져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고문님을 비롯하여 김영중 선생님, 이현도 선생님, 김재훈 선생님, 김성황 선생님, 손주갑 선생님 등등.... 그래서 이번 호에 고문님을 모시게 된 것입니다.
답) 재단에서 발행한 소식지가 집으로 오면 다른 책들과는 달리 아주 정독을 하게 돼요. 아무래도 유족이라서 관심이 많이 가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동안 기념재단 창립 때부터 녹두꽃을 쭈욱 받아보면서 왜 나는 유족인터뷰를 하지 않지? 뭐 그런 생각은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요. 기록조차 제대로 남기지 못하고 스러져간 참여자, 그리고 그분의 후손들이 많지 않습니까? 우리 조부님은 기록도 있고 하니, 나중에 해도 상관이 없고, 안 해도 무방하다 그런 생각이었습니다. 오히려 명확한 자료나 근거를 남긴 참여자보다는 그렇지 못한 참여자와 그 유족들 먼저 하는 것이 필요할 거다 이렇게 생각해왔습니다. 제 이런 생각의 바탕에는 누구누구의 조부, 증조부 혹은 고조부 이런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한국사 전체적인 측면에서 동학농민혁명의 역사적 의미와 그 위상을 재인식시키는 일이 중요하다고 여기는 게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저는 늘 유족회 모임이나 사적인 자리에서 입버릇처럼 자기 조상을 중심으로 생각할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 우리 국민 모두가 참여자 유족이다 이렇게 생각해야 한다고 말해왔어요. 사실, 저는 정 백자 현자 참여자분의 손자입니다. 그런데 우리 유족회 회원 대부분이 참여자의 증손(曾孫)이나 고손(高孫)이예요. 제주 4.3항쟁이나 5.18민주화운동 관련 유족은 부모 또는 자식인 경우가 많아요. 그에 비하면 우리 동학농민혁명 유족은 조금 달리 볼 수밖에 없는 지점이 있어요. 이런 제 생각을 곡해하는 유족회 분들도 더러 있어요. “명예회복? 종이쪼가리 하나 달랑 주는 게 그게 명예회복이냐? 껍데기뿐인 명예회복으로 유족들의 눈을 가리고 생색내면서 정작 독립유공자로 서훈하는 일에는 관심도 기울이지 않는다.” 뭐 이런 얘기를 더러 들어왔습니다. 그건 정말 맥락을 모르고 하는 말이라 그냥 대응하지 않았어요.

문) 네, 저도 그런 비슷한 얘기를 몇 번 들었습니다. 100주년 기념사업 전후의 맥락을 모르니까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 싶으면서도, 저도 한편으로 속상하기도 했습니다. “한 술에 배부를 수 없다”는 우리 속담도 있잖아요? 모든 일에는 다 단계라는 것이 있는 것 같아요. 우주의 섭리가 봄 여름 가을 겨울.... 이듯 매사에 단계가 있지요. 물론 아주 드물게 혁명적인 급격한 변화도 있을 수 있지만, 혁명적인 변화도 사실은 나름의 바탕이 마련된 후 가능한 것이지요. 1980년대 이전까지 한국 사회 도처에 군사정권의 어두운 그림자가 깔려 있었잖아요? 그래서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대중적인 역사인식도 ‘반란사건’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고요. 그러다가 1980년대로 들어선 후 민족민주운동의 급격한 성장으로 군사정권이 종식되면서 사회변혁이 진전되기에 이르렀고, 그 흐름이 100주년 기념사업과 맞아떨어진 측면이 있어요. 어쨌거나 100주년 기념사업이 성공적으로 추진되었기에 2004년 특별법과 2019년 2019년 국가기념일 제정이 가능했고, 그 바탕이 있기 때문에 현재 참여자를 독립유공자로 예우하라고 요구할 수 있게 된 거 같아요.
답) 맞아요. 제가 얼마 전에 개인적인 만남의 자리에서 지금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를 독립유공자로 예우하기 위해 누구보다 앞장서서 헌신하고 있는 사람에게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지금,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를 독립유공자로 예우하라고 요구할 수 있는 것은 지난 1980년대 후반 그리고 동학농민혁명 100주년 전후 어려운 여건에도 불구하고 기념사업을 적극 추진해온 사람들,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서훈을 지속적으로 요구해온 사람들의 노력을 잊어서는 안 된다. 봄에 뿌려진 씨앗 없이 싹이 틀리 만무하고, 신록이 우거질 리 만무하다. 어느 날 느닷없이 열매가 맺히는 일은 있을 수 없다. 이게 역사가 아니던가?” 문부장도 기억하겠지만 1995년에 ‘동학농민군서훈범국민추진위원회’를 구성했었잖아요? 그래서 전국의 유족들과 기념사업단체 임원과 회원들이 십시일반 모금활동을 벌여서 한겨레신문에 광고를 냈었지요. 돈이 적어 한 차례 내기로 했는데, 한겨례신문사에서 두 차례나 더 광고를 내주었잖아요?

문) 네, 기억합니다. 1995년, 100주년 기념사업이 끝난 후 분위기가 다소 가라앉으려던 때 동학농민군서훈범국민추진위원회를 구성했었습니다. 저도 실무자의 한 사람으로 참석했었는데, 서울 인사동 어느 한식집에서 모였었지요. 그날 이이화 선생님, 한승헌 변호사님, 김중배 선생님 등을 비롯해서 유족회에서는 선생님을 비롯하여 몇 해 전 돌아가신 김영중 회장님, 김재훈 선생님, 김성황 선생님, 손주갑 선생님 등등 여러 분들이 참석하셨지요.
답) 그 자리에서 언론계 선배이신 김중배 선생님을 서훈추진위원회 위원장으로 모셨고, 제가 집행위원장을 맡았지요. 그래서 국가유공자 서훈을 요구하는 광고를 한겨례신문에 게재하기도 했었지요. 100주년 기념사업으로 대중적인 역사인식이 많이 바뀌기는 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동학농민군 참여자를 국가유공자로 서훈하라는 요구는 힘을 받지 못했지요. 그래서 전술적으로 우선 억울하게 들씌워진 반란군이라는 멍에를 벗겨낼 수 있는 방안을 논의하기에 이르렀고, 그 결과물이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지요. 1998년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되어 ‘국민의 정부’가 출범하면서 분위기가 무르익었지요. 그래서 2000년 연초부터 국회의원 연구모임 결성을 논의하여 9월엔가 모임이 출범하게 되었지요. 이후 국회에서 토론회와 강연회 등을 추진하면서 명예회복 특별법을 준비하여 해당 상임위원회에 상정하였고, 국회 절차에 따라 노무현 대통령 때인 2004년 3월에 특별법 제정으로 결실을 맺게 되었지요. 누가 뭐라 해도 특별법이 제정되었기에 2019년 국가 기념일이 제정될 수 있었던 것이구요. 그 연장선상에서 현재 추진 중인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를 국가유공자 예우하라는 요구가 가능하게 된 것이지요. 이런 맥락과 흐름을 모르는 유족회 몇몇 사람들이 실질적인 지원이 전혀 없이 명예회복법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다는 그런 무식한 발언을 하는 것이지요.
문) 네, 특별법과 기념일이 제정되었으니까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는 것이지요.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분들을 국가유공자로 예우하라든지, 현행 교과서의 명칭을 동학농민‘운동’에서 동학농민‘혁명’으로 바꾸라든지.... 이런 요구를 할 수 있게 된 것이지요. 나아가 동학농민혁명 정신을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 포함시키라는 요구도 가능해졌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현재의 대한민국 헌법 전문은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여기 3·1운동 앞에 동학농민혁명을 포함시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3.1운동은 갑오년 동학농민혁명의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졌잖습니까? 3·1운동을 주도한 민족대표 33명 중 9명이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라는 점 등등이 증명하고 있잖아요. 그런 차원에서 고문님께서도 일찍부터 동학농민혁명을 헌법 전문에 넣어야 한다는 주장을 해오셨는데....
답) 그랬지요. 동학농민혁명 정신을 헌법 전문에 포함시키는 것은 정말로 중요한 일입니다. 지난 8월 한 달 내내 우리 유족회를 비롯하여 전국의 기념사업단체들과 전공 연구자, 천도교 관계자 등등이 한 마음 한 뜻으로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를 독립유공자로 예우하라고 국가보훈처에 강력하게 청원하고 있어요. 저도 지난 8월 중순 국가보훈처 앞에서 피켓시위를 하였는데,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를 독립유공자로 서훈하는 것과 동학농민혁명 정신을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 포함시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에요. 얼마 전에 우리나라 근·현대사에서 국부(國父)로 추앙받을 분은 녹두 전봉준 장군과 백범 김구 선생님, 그리고 홍범도 장군이라는 언론보도를 본적이 있어요. 저는 2020년대를 살고 있는 우리 국민들의 정치의식 수준이 1894년 갑오년 때 척양척왜, 보국안민의 기치를 들고 일어섰던 동학농민군보다도 못하다 생각합니다. 동학농민군들은 일제강점기 이전이니까 당연히 식민지 교육을 받지 않았어요. 그래서 자주의식이 투철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일제강점기 때 집요하게 강제한 식민지 교육의 잔재를 떨쳐내고, 서둘러서 갑오년의 정신으로, 동학농민군의 정신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문) 네, 고문님. 좋은 말씀 밤새워 해도 끝이 없을 것 같습니다.(웃음) 또 다음 기회에 좋은 말씀은 다음 기회에 듣기로 하고 오늘 인터뷰는 여기서 마쳐야 할 것 같습니다. 긴 시간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고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