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소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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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가을 61호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참여자 전기항의 고손자 전장홍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참여자 전기항의 고손자 전장홍


일시 : 2021. 11. 17.(수) 12시

장소 : (사)예천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사무실



 

문) 이번호『녹두꽃』유족 인터뷰에는 참여자 전기항(全基恒, 1827~1900)님의 고손자 전장홍 선생님을 모셨습니다. 선생님 반갑습니다. 먼저,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답) 이 머나먼 예천까지 발걸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1894년 갑오년 당시 예천지역에서 동학농민군으로 활동하셨던 전 기자 항자 님의 고손자입니다. 지금은 경상북도 예천군 용문면에서 거주하고 있습니다.



문) 선생님께서는 현재 (사)예천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이사장 이외에도 (사)동학농민혁명유족회 임원으로 활동하는 등 갑오년의 역사적 의미와 그 위상을 재정립하고, 갑오선열의 숭고한 정신을 계승·발전시키는 일에 앞장서고 계시는데 근래의 중점을 두고 추진하고 계시는 일이 있으면 말씀해주십시오.


답) 동학농민혁명 백주년에 창립한 동학농민혁명유족회에 참여하여 전국 부회장으로 활동하였고, 1996년에는 예천지역에서 일어난 동학농민혁명에 대해 지역주민들에게 알려나가기 위해 예천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를 창립하였습니다. 그래서 보수집강소에서 동학농민군 11명을 생매장했던 장소에 위령비를 세우는 등 사업을 활발하게 전개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지역이 유림세력이 강했던 지역이다보니 갑오년의 역사를 기념하는 일이 그렇게 녹록지만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2004년에 특별법이 제정되었고, 특히 3년 전에 국가기념일까지 제정되어 우리 경북지역에서도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관심이 크게 높아졌습니다. 이러한 사회적 인식의 변화에 발맞춰 다시 한 번 동학농민혁명 정신선양사업을 적극적으로 추진해야겠다는 마음을 먹고 현재는 예천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를 법인화 하는 일에 힘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아마도 지금 하는 인터뷰 내용이 실린 『녹두꽃』 책자가 발행될 때쯤에는 경상북도로부터 사단법인 인가가 난 상태일 것 같습니다.



 

문) 네, 회장님. 유족인터뷰이니까 고조부이신 참여자 전기항 님에 대해 여쭙겠습니다. 고조부님께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했다는 사실을 언제, 어떤 경로를 통해 알게 되셨는지요?


답) 사실 집안에서도 명확하게 기록이나 구전으로 내려오는 것은 별로 없습니다. 하지만 제가 어렸을 때 할머니 손에서 자라면서 고조부님에 대한 얘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할머니 말씀에 따르면 고조부님께서는 풍채가 워낙에 좋고, 일 추진력이 대단하셔서 돼지의 한자 표기인 전도야지(刀也只)라는 별칭으로 불렸다고 합니다. 고조부님께서는 당시 천석꾼으로 불릴 정도로 부농이었는데, 동학농민혁명 당시 군비를 마련하기 위해 재산을 끌어다 쓴 바람에 살림이 쪼그라들어버렸고, 혁명이 실패로 끝난 이후 가계는 풍비박산이 나서 할머니가 처음 시집왔을 때 “식량은 하나도 없고, 살림살이라고는 달랑 무쇠솥 하나 있었다.”고 하셨습니다.



문) 지금은 고인이 되신 이이화 선생님께서 한겨레신문에 ‘동학농민혁명 인물열전’을 1993년부터 1994년 100주년 때까지 시리즈로 연재하셨잖아요? 그 무렵에 고조부의 활동내역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이이화 선생님과 자주 만나셨지요?


답) 네, 그랬지요. 제가 예천농협에 전무로 근무할 때 이이화 선생님께서 찾아오셔서 저희 고조부님께서 예천지역 동학농민군으로 활동하셨다면서 저와 함께 고조부님 산소도 가보고, 예천군청도 방문하여 이런 저런 증명서도 떼어보고, 옛 군지(郡誌) 등도 살펴보고 그랬었지요. 이이화 선생님께 저희 고조부님의 일화에 대해 이야기를 듣다가 제가 “선생님, 예전부터 꼭 하고 싶은 게 한 가지 있습니다. 다른 게 아니라 고조부님의 공적을 기리는 추모비나 기념비를 세우는 일입니다.”라고 말씀 드렸어요. 하여간 그렇게 해서 고조부님 묘역을 정비하고 추모비를 세우게 되었는데, 이이화 선생님께서 추모비의 비문(碑文)을 써주시는 등 아주 큰 힘이 되어주셨어요. 그래서 1996년에 저희 고조부님 묘 옆에 ‘전기항의사추모비’를 세울 수 있었답니다.



문) 네, 회장님. 1894년 동학농민군이 전주성을 점령하자 조선정부에서 청나라 파병을 요청하였고, 일본도 조선으로 군대를 들여보내 조선을 둘러싼 동아시아 정치정세가 요동쳤잖습니까? 그래서 구국의 결단으로 동학농민군이 전주성을 비워주고 나왔고, 조선정부가 파병을 요청한 원인이 해결되었다면서 청·일 양국에 철병 요구하였으나 철병은 커녕 일본군이 6월 21일 경복궁을 무단으로 침입하여 고종을 인질로 잡고, 친일내각을 수립함과 동시에 대원군을 옹립하는 등 국권을 농단했잖습니까? 그래서 전국의 동학농민군이 척왜의 기치를 높이 들고 다시 봉기하였습니다. 이때 경상도 북부지역인 예천지역에서도 농민군이 봉기하였는데, 고조부님께서 모량도감(募糧都監) 또는 운량도감(運糧都監)이라는 직책을 맡아 예천, 용문, 구미, 해평, 상주 일대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셨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모량도감 또는 운량도감은 군수물자를 모집·운송하는 책임자인데... 이점에 대해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답) 당시에 고조부님의 활동이 베일에 쌓여있어서 저희가 추측만 할 뿐이지 증조부님과 조부님도 고조부님이 모량도감으로서의 활동에 대해 자세하게는 말씀해주시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때 당시의 농촌 또는 촌락이 씨족 중심으로 형성이 되어 있었습니다. 예천지역은 함양박씨, 예천윤씨 세력이 컸는데 특히, 용문면이 함양박씨의 집성촌이었습니다. 고조부님께서 그분들과 유대관계가 긴밀하게 협력이 이루어졌다는 얘기는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동학농민군이 용문에 있는 함양박씨 세력권인 ‘금당실과 송림(松林)’을 훈련장 또는 휴식처로 활용할 수 있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문) 예천지역에서 벌어진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사실을 기록한 『갑오척사록』에  “당시 관군에 속한 민보군이 예천 금당실에서 붙잡아온 농민군을 취조하여 금당실의 우두머리가 모량도감인 전도야지인 것을 알아내었다”고 전하고 있지요? 갑오년 당시 고조부님께서 용문뿐 아니라, 최맹순 수접주님과 깊이 관계하면서 활동하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점에 대해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답) 최맹순 접주가 활동한 소야리가 지금은 문경 산북면이지만 그 당시에는 예천에 속할 정도로 문경시와 예천군은 서로 가깝습니다. 용문의 금당실에서 소야리로 가는 길이 두 개가 있는데, 하나는 꽃재마을을 거쳐서 가는 길이고, 또 하나는 두천과 금곡을 거쳐 가는 길입니다. 고조부님께서 피신하시면서 소야 최맹순 수접주님과 긴밀하게 연계되어 움직이지 않으셨나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문) 고조부님께서 예천 용문, 상주, 문경 등지에서 반일항쟁의 기치를 들고 일어났으나 당시 경상도 북부지역은 농민군 세력보다 유림세력이 강해서 민보군의 세력이 더 컸습니다. 예천지역 동학농민군이 민보군에게 패한 후 고조부님께서는 산으로 들어가 여러 곳에 농막을 짓고, 오랫동안 피신하신 것으로 전해지고 있는데 종국에는 소식이 끊겨 행방불명으로 처리가 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점에 대해 전해들은 얘기해주시기 바랍니다.


답) 일본군과 민보군에 의해 농민군이 패배하였으나 고조부님은 체포되지 않고 소백산자락 깊은 산골인 문경 동로면, 삼북면, 유천면, 용문면 여러 곳에 농막을 짓고 숨어 지냈다고 합니다. 동학농민혁명 당시에도 그랬고, 패배한 후 피신하실 때에도 고조부님은 신출귀몰했다고 하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잡히지 않고 피해 다닐 수 있었던 것이 소백산자락 산골마을 사람들에게 마음으로부터 지원과 성원을 받아서 가능했던 일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 무렵 집안에서도 고조부님이 어디서 기거하시는지 도무지 알지 못했다고 합니다.



문) 네 회장님. 말씀을 들어보면 윗대 어른들께서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유족으로서 숨죽이며 살아오셨을 것으로 짐작이 됩니다. 실제로 고조부님께서는 모량도감 직책을 맡아 당시 재산을 다 농민군 활동에 사용했잖아요? 그래서 동학농민군이 패배한 이후 증조부님과 조부님의 아주 삶이 곤란했을 거 같은데...


답) 두말할 필요가 있나요? 동학농민군의 잔여세력을 잡아낸다고 관에서는 수시로 집안을 들쑤셔서 약탈해가는 바람에 저희 증조부님이나 조부님 때 살길이 막막했었답니다. 결국 할머니가 시집을 온지 얼마 안 되어 지금의 문경시 동로면 석항 1리로 거주를 옮겨 그곳에서 사셨다고 하셨습니다. 석항 1리는 예전에 화전민들이 모여서 사는 곳이었는데, 아버지와 저도 거기서 출생했어요. 하도 어릴 때라 지금은 기억조차 가물가물한데, 먹을 것이 감자나 수수 그런 것밖에 없으니까 가을에는 도토리를 주워 빻아서 먹고 그랬습니다. 그곳에서 한국전쟁 직전까지 살다가 지금의 예천으로 왔습니다.



 

문) 앞서 잠깐 얘기되었는데, 1996년 고조부님 묘소에 추모비를 세우셨잖아요? 추모비 건립 경위에 대해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답) 이이화 선생님은 동학농민혁명 연구에 있어서 단연 최고이시잖아요? 그래서 어렵게 고조부님 추모비 비문을 써주실 수 없으신지 여쭸더니 기꺼이 수락해주셨어요. 비문에는 2차 동학농민혁명 당시 예천지역에서도 반일운동이 힘차게 전개되었다는 점과 동학농민군에 가담하여 민보군에 맞서 싸운 동학농민군 지도자 윤치문의 활동과 고조부님의 활동이 짧지만 집약적으로 담겨있습니다. 처음에 추모비는 송림 일본인 신사 터에 세우려고 예천기념사업회에서 노력했었습니다. 일본인들 신사 위에 반일투쟁을 하셨던 고조부님의 추모비를 세우는 게 아주 의미가 있다는 생각에서였습니다. 그런데 신사 터가 예천군유지예요. 그래서 예천군청에 허가신청을 냈는데, 군청에서 주민 여론을 무시할 수 없으니 의견을 들어봐야 한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경로당에 가서 말씀을 드리니 동네 어르신들이 “절대 안 된다. 그렇게 되면 독립운동 했던 후손들이 너도 나도 그곳에 비를 세우려고 할 텐데 그러면 끝도 없다” 그렇게 찬성을 하지 않으셔서 신사 터에 추모비를 세우는 것이 무산되었어요. 사실 어르신들 말씀은 그러했지만 동학농민혁명의 의미가 아직도 마음속으로 흔쾌히 수용되지 않아서 그러셨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추모비를 100주년이던 1994년에 만들어놓고 이런 저런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결국 2년 뒤인 1996년 고조부님 묘소 앞에 세웠었습니다. 벌써 추모비를 세운지 26년 정도 되었네요. 예천기념사업회에서 처음에 계획하여 추진했던 것처럼 다시 논의를 거쳐 송림 신사 터로 추모비를 이전하자는 의견들이 나오고 있지만 아직까지는 조금 이른 게 아닌가 생각하고 있습니다.



문) 동학농민혁명 100주년 기념사업 이후 예천지역의 뜻있는 분들이 모여 예천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창립을 준비하였지요? 그렇게 해서 지금은 어렴풋 합니다만 1996년 3월 초 예천성당에서 고 이이화 선생님 역사특강과 기념사업회 창립식을 함께 가졌던 기억이 납니다. 창립이후 활발하게 활동을 펼치셨었는데...


답) 사실 예천지역의 한천제방과 서정자들에서 동학농민군과 보수집강소 측과  전투가 벌어지게된 주된 이유는 8월 10일에서 11일로 넘어가는 새벽녘에 예천 보수집강소의 민보군들이 동학농민군 11명을 잡아 내성천변 모래밭에 산채로 묻어버린 일 때문이었습니다. 짐승도 생매장을 안 하는데 사람이 사람을 생매장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지요. 예천기념사업회 입장에서는 이 사건을 절대 잊어서는 안 된다는 판단 하에 비석을 세우자고 창립되던 그해 가을에 논의를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원래는 예천읍 제방 쪽에 세우려고 했지만, 그곳에다가는 구조물을 설치할 수 없다고 해서 제2의 장소를 물색하고 물색한 끝에 지금의 장소에 세우게 되었지요.



문) 네, 전국 각 지역에서 전개되었던 동학농민혁명은 각 지역마다 해당 지역만의 특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곳 예천지역에서 전개된 동학농민혁명의 특성으로는 아무래도 동학농민군 11명을 생매장한 사건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갑오년 당시 전라도와 충청도지역은 몇몇 곳만 빼놓고 대체로 동학농민군 집강소가 강성했습니다. 그러나 경상도 북부지역은 반대로 유림세력을 중심으로 보수집강소가 강성하였습니다. 그러다보니 이곳 예천지역에서 농민군을 보수집강소 세력들이 생매장한 사건이 생겨났는데, 이점을 생명존중, 화합과 상생 뭐 이런 현대적 의미에 부합하게 재해석하여 기념사업을 추진한다면 전국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특색이 있는 기념사업이 될 것으로 생각됩니다.


답) 네, 맞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생매장한다는 것 이런 일이야 말로 있을 수 없는 일이지요. 그런데 엄연히 갑오년에 우리 예천지역에서 벌어진 일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이념대립, 노선대립 등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참 많은 곡절을 겪고 있는데 이념이나 노선 이런 것보다도 어쨌거나 선참에 놓고 생각해야 하는 것은 ‘사람’ 아니겠습니까? 이런 측면에서 동학농민혁명 당시 예천지역에서 벌어진 농민군 생매장 사건을 현재적으로 해석해서 잊지 않고 기억하는 일이 중요할 것 같습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 그때의 역사 흐름을 제대로 알고 재조명함으로서 잘못된 것을 바로 잡아나가고 이해시켜 서로 도와나가는 것이 저희의 임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생각에서 갑오년 당시에는 서로 적대관계였지만 지금은 아니잖아요? 그래서 예천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창립대회 때 예천향교 관계자분들도 일부러 초청했었습니다. 다행히 그분들도 동학농민혁명 대해 이해하려는 자세를 견지하고 있습니다. 조심스럽지만 앞으로도 지금의 상황에 맞게 현재적으로 정신을 선양해나가는 일을 그분들과 협의해나갈 계획입니다.



 

문) 2021년 11월 현재 전국 각 지역에서 동학농민혁명 정신선양을 위해 할동하고 있는 기념사업단체가 모두 34개입니다. 동학농민혁명 100주년 기념사업 추진을 위해 1993년 12월 13일 결성했던 ‘동학농민혁명100주년기념사업단체협의회’ 때 11개 단체가 활동했던 것에 비하면 꼭 3배가 증가한 셈입니다. 눈여겨봐야할 대목은 무엇보다도 혁명 100주년이던 1994년 전후해서는 1차 동학농민혁명이 전개되었던 지역을 중심으로 기념사업단체가 활동했는데, 시간이 지남에 따라 2차 동학농민혁명이 전개된 지역에서 단체 수가 대폭 늘어났다는 점입니다. 이런 단체창립과 그 활동폭이 변화한 것을 바탕으로 그동안 추진해왔던 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의 방향도 재검토가 되어야 할 때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동안 동학농민혁명 100주년 기념사업을 퉁해 역사인식의 대중적인 전환을 추구하였고, 그 결실로 2004년 특별법 제정과 2019년 기념일 제정을 견인하였다면, 이제부터는 갑오년의 역사적 사실을 확인하는 것을 바탕으로 동학농민혁명의 전국적인 의미와 그 위상을 복원하는 방향에서 기념사업이 전개될 필요성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이런 차원에서 이번에 예천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가 법인화를 통해 경북지역의 동학농민혁사를 복원하고 이를 계승·발전시키는데 보다 더 큰 힘을 쏟겠다는 의지의 천명은 그 의미가 남다른 것 같습니다.


답) 그렇습니다. 일제강점기를 거쳐 한국 근·현대사의 극심한 굴절 속에서 사실 동학농민혁명은 전라도사건으로 치부된 경향이 많았습니다. 실제로 군사정권 때 이루어진 기념사업이 전라북도 정읍과 충청도 공주 우금치 등에만 집중되어 왜곡되고 축소된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인식을 고착화시킨 측면이 많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행스럽게 100주년 기념사업이 성공적으로 전개되어 그런 잘못된 역사인식을 뒤집게 되어 특별법과 기념일 제정까지 이어진 것이지요. 때문에 남은 과제는 2차 동학농민혁명이 펼쳐진 전국 각 지역의 관련 유적지를 찾아 정비하는 한편 각각의 지역적 특성을 연구하고 발굴하여 기념사업을 펼침으로서 명실상부하게 동학농민혁명의 전국화를 실현하는데 힘을 기울여나갈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사단법인으로 재출범한 우리 예천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임원과 회원 모두는 동학농민혁명 전국적인 의미와 위상을 되찾는데 일조하기 위하여 우지 지역에서 일어난 동학농민혁명사부터 적극적으로 발굴하고 이를 기념해나가고자 합니다. 기념재단에서 많은 관심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우리의 활동을 지원해주실 것을 부탁의 말씀 드립니다.



문) 네, 회장님. 오늘 좋은 말씀해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바쁘신 중에도 시간을 내주시고, 장시간 시종일관 진지하게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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