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소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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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봄 47호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김응문의 증손자 김성황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김응문의 증손자 김성황


일시 : 2022. 2. 9.(수) 13:00

장소 : 동학농민혁명유족회 사무실



 

문) 이번 호 유족 인터뷰에는 참여자 김응문(金應文, 1849~1894) 님의 증손자 김성황 선생님을 모셨습니다. 선생님 반갑습니다. 먼저,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답) 안녕하십니까. 동학농민혁명 당시 전라도 무안군 몽탄면에서 지도자로 참여하셨던 김 응자 문자님의 증손자 김성황입니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옛말이 있잖습니까? 그 말이 정말 맞는 거 같습니다. 1994년 동학농민혁명 100주년을 기해 그동안 반란사건으로 인식되던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역사인식이 크게 재정립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2004년에는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와 그 유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었고, 2019년에는 동학농민혁명 국가 기념일이 제정되기에 이르렀습니다. 동학농민혁명 역사인식이 전변해온 과정에서 저는 동학농민혁명유족회 활동을 시작하여 회장직을 수행하기도 하였고, 지금은 사단법인 동학농민혁명유족회 고문으로 활동을 하면서 정신선양사업과 참여자분들의 독립유공자로 서훈하기 위한 사업 등에 적극적으로 힘을 보태고 있습니다.



문) 증조부님께서 동학농민혁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셨다는 사실은 언제부터 알고 계셨는지요?


답) 사실 저는 2000년대 이전에는 증조부께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셨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할아버지나 할머니 그리고 아버지나 어머니께서도 제게 증조부님 얘기를 해주지 않으셨어요. 제가 어렸을 때 집안에서 증조부님 제사를 모셨던 것은 기억하지만 1990년대까지 집안 어르신들께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셨다는 사실은 알지 못했습니다. 저희 조부님은 1882년생입니다. 그러니까 1894년 당시 열 세 살이었는데 그해 12월 집안 어르신들이 처형을 당하신 것이지요. 집안이 아주 풍비박산이 난 것을 직접 겪으셨으면서도 우리들에게 조상들께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셨다는 사실을 일체 말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1990년대까지 까마득하게 모르고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동아일보에서 고 이이화 역사학자께서 힘을 기울여 동학농민혁명 관련 총서를 발간하였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마침 제 딸이 연세대학교 사학과 출신이었는데, 그 당시 규장각 연구원이었던 왕현종 교수와 연이 닿아 증조부님께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문) 네, 가슴 아픈 얘깁니다. 선생님뿐만이 아니라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신 분들의 후손들이 많은 경우 그런 아픈 세월을 살아온 것 같습니다. 증조부님께서 전남 무안군에서 태어나셔서 그곳에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셨지요?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신 분들이 많은 경우 혁명의 기세가 꺾인 후 고향에서 살지 못하고 타관객지를 떠돌거나 어떤 경우에는 다른 곳으로 가서 정착해서 살아야 하는 고충도 모자라 심지어는 성까지 바꾸면서 살아야했던 경우를 확인할 수 있는데, 증조부님의 경우는 어땠는지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답) 증조부님께서는 그 지역의 향반으로 경제적인 측면에서도 상당한 재산을 가졌다고 합니다. 사실 증조부님께서는 먹고사는 문제에 어려움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셨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먹고 살기가 힘들어서가 아니라 사회적으로 만연한 부정부패 척결을 위해 참여하셨다는 것에 남다른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많은 경우 동학농민군이 패배한 후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 집안의 경우는 조금 다릅니다. 증조부님께서 처형을 당하셨지만 조부님께서는 고향에서 그대로 생활하셨습니다. 제 증조부님께서는 1849년 4월 22일생으로 전남 무안군 몽탄면 다산리에 태어나 그곳에서 성장하셨습니다. 저희 집안은 그곳에서 9대에 걸쳐 살아오면서 많은 덕행을 행하여 지역에서 존경받는 집안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동학농민혁명이 패배한 이후 증조부님과 형제분들은 처형을 당하셨지만 저의 조부님께서는 고향을 떠나지 않고 그곳에서 살아갈 수 있었다고 합니다. 1894년 11월 18일 나주목사 민종렬이 이끈 고막원전투에서 동학농민군이 크게 패배한 후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셨던 저희 집안 어르신들은  수성군에게 체포되어 처형되었지요. 그래서 집안이 풍비박산이 났지만, 그 후손들 그러니까 저의 조부님은 타향살이를 하지 않고 고향의 지근지처에 있는 처가 또는 외가에 4~5년 머물다가 1899년에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살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것은 아마 저희 집안이 대대로 예목제(禮睦濟)와 의분고(義分庫)를 두어 생활이 어려운 이웃들이 제대로 예를 갖추지 못할 때 제례장비 등을 빌려줘서 예를 갖출 수 있도록 하였고, 춘궁기에는 양곡을 대여해서 초근목피를 면할 수 있게 해주는 등  덕을 베풀어서 고향을 떠나지 않고 살 수 있었지 않았나 싶습니다. 나아가 동학농민혁명 패배 이후에도 재산을 빼앗기지 않고 잘 보존한 증조모이신 함평노씨(咸平魯氏)께서 자손들에게 고루 나누어주어 살아가는데 어려움이 없도록 해준 것도 다른 경우처럼 타관으로 떠돌지 않고 살 수 있었던 이유였던 것 같습니다.



 

문) 인터뷰를 위해 증조부님과 관련된 자료를 살펴보니 증조부님께서는 동학농민혁명 당시 주로 무안군 몽탄면에서 접주로 활동하신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혁명 당시 증조부께서는 나주 김씨 집성촌인 무안군 다산리 차뫼마을 생가(生家) 뒤 대밭에 대장간을 조성하여 동학농민군이 사용할 각종 병기를 제조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점에 대해 알고 계신 내용이 있으면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답) 당시 증조부님이 태어나셨던 차뫼마을 집터는 약 2500여 평으로, 7채 정도의 집이 있었다고 합니다. 집 뒤편에 고인돌이 있는 대밭이 있었는데, 그곳에 대장간을 만들어 동학농민군이 사용한 각종 병기를 제조하였다고 합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무안지역의 동학농민혁명 지도자 그러면 배상옥(배규인) 대접주를 떠올립니다. 하지만 그분보다 저희 증조부님께서 연배가 더 있으셨고 집안의 재력도 훨씬 더 풍족했다고 합니다. 배상옥 대접주 집안과 저희 증조부님 집안이 서로 의기를 모아 무안지역의 동학농민혁명을 이끌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무안지역에서 세력을 강성하게 형성하여 동학농민군 활동을 전개한 배상옥 대접주에게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더 힘이 된 분이 저희 증조부님이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실제로 저희 증조부님 집과 배상옥 대접주 집은 직선거리로 5~6km 밖에 안 되는 거리에 있었습니다.



 

문) 네, 회장님 말씀에 따르면 증조부님께서는 동학농민혁명 이전에는 나주·무안지역 향반으로 향교 등에서 맡았고, 많은 군자금을 내놓거나 무기를 만들어 동학농민군을 지원하는 등 무안지역의 선봉장으로 활약하셨는데.... 동학농민혁명 당시 증조부님의 활동에 더 하실 말씀이 있으면 해주시기 바랍니다.


답) 증조부님이 태어나시고 활동하신 곳이 나주 김씨의 집성촌이어서 향교에서 중요 직책을 맡으셨지요. 동학농민혁명 이전에 1887년에 향교의 유사를 맡아 일을 하셨을 뿐 아니라 그해 가을 석전제 때 예를 집행하던 집례(執禮)를 맡기도 하신 것으로 확인됩니다. 그러시던 저희 증조부님 형제와 아들이 함께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기 시작한 때는 1894년 4월인 것으로 나옵니다. 오지영의 『동학사』에 따르면 4월 25일 백산대회에 참여한 무안지역 장령급 접주들 중의 한 사람으로 저희 증조부님의 성함이 기록되어 있고, 형제들과 아들도 함께 백산대회에 참여했다고 합니다. 여하튼 당시 증조부님 집안에 재력이 있었기 때문에 군자금을 모아 군사를 훈련시키는 등 적극적으로 활동하셨다고 합니다. 



문) 증조부님께서 군자금을 모으는 한편 총, 화살 등의 무기를 만드셨다는 것을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요?


답) 고 이이화 역사학자, 신영우 교수, 왕현종 교수 등 여러 역사학자들이 100주년 기념총서를 발간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에는 무안·함평·영광 쪽의 기록은 시간이 없어서 자료조사나 연구를 제대로 하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후에 다시 이곳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면서 저희 증조부님의 참여사실을 알게 되었고, 저를 찾아오셔서 제가 그분들께 무안 함평 쪽 지리를 잘 알기 때문에 안내를 해주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이이화 역사학자께서 저희 집안에 대한 얘기를 해주셨고, 나주 지역 답사를 증조부님 활동에 대하여 자세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나아가 증조부님 사후에 집터 뒷집에 다른 주민이 살고 있었는데 그 곳에 아직도 우물터와 10개의 고인돌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 고인돌 밑에 무기와 엽전 꾸러미가 묻혀 있는 것을 보고 동학농민혁명 당시 증조부님께서 군자금을 모아 동학농민혁명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문) 선생님께서 처음에 잠깐 언급하셨듯이 증조부님 뿐 아니라 집안 어르신들도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셨다고 하셨는데, 선생님 증조부님이신 김 응자 문자, 그리고 그분의 동생들인 효자 문자(金孝文, 1851~1894), 자자 문자(金子文, 1868~1894) 님이 함께 참여하였고, 나아가 증조부님의 큰 아들 그러니까 선생님의 큰조부님이신 김 여자 정자(金汝正, 1867~1894) 님께서도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점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답) 네, 아까 잠깐 말씀드렸다시피 저희 집안이 어려운 환경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사회의 부정부패에 맞서 전봉준 장군 활동에 호응하여 무안지역에서 동학농민군으로 활동하였습니다. 첫째 김 응자 문자, 둘째 김 효자 문자, 넷째(막내) 김 자자 문자, 그리고 첫째 김 응자 문자의 장남이신 김 여자 정자 님께서 무장기포, 백산전투, 고막원 전투 등에 참여하셨습니다. 셋째인 김 윤자 문자(金允文, 1864~1895) 님께서는 가계를 돌봐야하기 때문에 직접적으로 활동하시지는 않으셨습니다. 하지만 동학농민군이 고막원전투에서 패배한 이후 어르신들께서 피신한 곳이 김 여자 정자의 처갓집이 있는 함평이었습니다. 그곳에서 숨어 계시다가 체포가 되어 1894년 12월 8일 첫째 김 응자 문자, 넷째 김 자자 문자, 김응문의 장남 김 여자 정자님이 무안관아에서 처형이 되셨고, 나흘 뒤인 12월 12일에 다른 곳으로 피신했던 둘째 김 효자 문자님은 같은 나주 김씨이지만 집안이 다른 김 문자 일자님과 함께 처형되었습니다. 이때 셋째인 윤자 문자님께서도 끌려가 매질을 당하셔서 장독(杖毒)으로 1년 뒤인 1895년에 사망하셨습니다.



 

문) 네,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증조부님과 그 형제분들 그리고 아드님의 묘소는 어디에 있는지요?


답) 처형된 이후에 곧바로 유체를 바로 수습하지는 못했으나 다행히 우리 집안이 덕을 쌓고 살았던 덕분에 다른 어르신께서 처형장에서 증조부님의 머리만을 거두어 선영이 있는 월구정(月鉤頂, 現 무안군 무안읍 옥반동) 둔덕에 애기무덤 같은 작은 무덤을 만들어 투장(偸葬)했다고 합니다. 막내 동생인 김 자자 문자도 이와 같은 방법으로 증조부님 묘 바로 밑에 투장되었습니다. 1996년 증조모님과 함께 합장하기 위해 증조부님의 묘를 파묘한 결과 묘 안에 옹기 항아리가 있었습니다. 그 안에 유골(머리)을 보고서야 증조부님께서 효수되었다는 것이 확실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증조부님께서는 현재 다산리 용매마을에 안장 뜰에 모셔져 있고, 막내 동생인 넷째 김 자자 문자님은 원래 증조부님이 모셔져 있던 월구정 묘 아래에 모셔져 있습니다. 둘째 효자 문자님은 몽탄면 사천리에 모셔져 있고, 증조부님의 아들인 여자 정자님은 무안읍에 모셔져 있습니다.



문) 선생님 증조부님을 비롯한 여러 어르신들께서 남긴 숭고한 정신을 널리 알리기 위해 현창비(顯彰碑) 건립을 추진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현창비  건립을 추진 배경 등에 대해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답) 현창비는 1996년도에 광주광역시에 소재한 육군 제31사단 사단장이 국가유공자 발굴사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증조부님의 현창비를 몽탄면 다산리 마을회관 앞에 세운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나아가 최근 저희 나주 김씨 유족들이 모여 동학농민혁명 관련 특별법이 제정되었고, 국가기념일도 제정되었으니 너무 늦었지만 마땅히 흩어져 있는 증조부님들의 묘소를 한 곳에 모아 관리하는 것이 후손들의 최소한의 도리라는 의견이 제기되었습니다.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의 유체가 실제로 보존되고 있는 사례가 흔치 않지 않습니까? 그런데 저희 선조님들 5분은 유체를 비밀리에 수습하여 별도로 모셔서 보존해왔기 때문에 유골이나마 남아있습니다. 그래서 이분들을 한 곳에 모시는 것은 후손들의 당연한 역사적 책무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래서 무안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는 물론이고 무안군, 무안군문화원이 뜻을 모아 무안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추모공원을 세워 후손들에게 대대손손 선조들의 정신을 기리는데 동참하겠다는 뜻을 전달 받았습니다.



문) 네, 현창비 건립사업에 향후 추진계획은 어떤지요?


답) 지금까지 나주김씨 종친회의 허락을 받아 현창비 조성사업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무안군에서 차뫼마을 앞에 현창공원 조성사업계획을 세워 추진 중인데, 현창을 위한 추모공원 조성을 위해 유족들이 약 200㎡(60여 평)의 부지를 무안군에 기부를 하였고, 제반의 행정절차를 비롯하여 제반 사항을 무안군이 추진해나갈 계획입니다. 이러한 사업추진 계획을 무안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와 동학농민혁명유족회 임원진 및 회원들이 논의하는 과정에서 부지를 추가로 마련하여 무안동학농민군 추모공원의 규모를 더 키우는데 힘써보자는 얘기가 나오고 있는 상황입니다. 당초계획 상으로는 참여자분들이 돌아가신 날인 음력으로 지난 해인 2021년 12월 8일(양력 1. 10.) 이전에 완공하여 개원하려고 하였으나 예기치 못했던 코로나 전염병 확산이라는 세계적인 돌발상황이 발생하여 종친회는 물론이고 무안군, 무안군문화원, 무안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등과의 업무협의가 차일피일 미루어지고, 추모공원 조성을 위한 예산을 마련하는 일도 협의가 늦어지는 바람에 일정이 많이 늦춰졌습니다. 무안군 담당자와 작년 9월에 면담한 결과 2022년도 예산에 반영하여 2022년도 1분기 때부터 예산지원이 가능하게 되어 올해는 추모공원 조성사업이 탄력을 받아 완공될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올해 중반기 경에 완공한 다음 하반기에 추모문화예술제 개최 등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문) 네, 선생님. 끝으로 하실 말씀이 있으시거나 빠뜨린 말씀 있으시면 편하게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답)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의 후손으로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올해는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난 때로부터 128년이 되는 해입니다. 동학농민혁명이 1894년 갑오년 겨울에 근대적인 신무기로 무장하고 정예훈련을 받은 일본군을 이겨내지 못하고 패배하여 미완의 혁명으로 마감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동학농민군의 숭고한 정신은 3·1운동, 4·19혁명 등 우리나라 근대민족운동, 현대 민주화운동으로 면면히 이어져왔습니다. 실제로 동학농민혁명의 구국애민 정신이 일제강점기 항일독립운동 등으로 이어졌음이 연구에 의해 밝혀졌잖습니까? 그래서 동학농민혁명 특별법이 제정되었고, 국가기념일도 제정되어 매년 정부주최로 기념식을 개최하고 있잖아요? 그런데 지금까지 일본군의 국권침탈에 맞서 싸운 동학농민군은 국가유공자로 대접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를 독립유공자로 서훈하는 문제에 우리 모두가 힘을 모아나가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동학농민혁명 정신을 드높이기 위해 항상 노력하고 기념재단에 감사드립니다. 감사합니다.



문) 네, 선생님.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바쁘신 중에도 인터뷰에 응해주신 것에 대해 깊이 감사드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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