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장흥동학농민기념사업회를 찾아서
일시 : 2022. 8. 19.(금) 11시
장소 : 장흥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사무실

문) 안녕하십니까. 이번 호 소식지 『녹두꽃』 지역대담 코너에 전라남도 장흥군에서 동학농민혁명 정신 선양사업을 위해 애쓰고 계시는 사단법인 장흥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위의환 이사장님을 모셨습니다. 이사장님 반갑습니다. 먼저 녹두꽃 독자 분들에게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답) 녹두꽃 독자 여러분 반갑습니다. 사단법인 장흥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이사장으로 활동하고 있는 위의환입니다. 저는 장흥군 대덕읍에서 태어나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고향에서 다녔습니다. 이후 광주에서 고등학교를 다녔고, 서울에서 공부를 하다 1978년 말 농민운동에 뜻을 품고 귀향하여 농민운동을 열심히 했고, 농민운동의 연장선에서 반핵운동, 환경운동까지 했습니다. 1990년 전국농민회총연맹이 창립된 후 서울로 올라가 1992년 2월까지 총무국장과 연대사업국장 등을 맡아 일하다가 1992년 3월 다시 고향 장흥으로 내려와 현장에서 농민운동을 하면서 장흥군농민회장을 역임하기도 하였습니다. 이후 1994년을 전후하여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관심이 증대하였고, 2004년 특별법이 제정되면서 장흥지역 시민사회단체와 동학농민혁명유족회, 천도교 장흥교구 등이 힘을 합하여 임의단체로 장흥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를 출범시켰습니다. 그렇게 활동하다가 2013년 장흥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를 사단법인으로 등록이 필요하여 전라남도에 신청서를 제출하여 인가를 받아 제가 현재 3대 이사장을 맡고 있습니다.
문) 이사장님 고향인 대덕읍이 동학농민혁명 당시에는 대흥면이었지요?
답) 네, 그렇지요. 지금의 대덕읍이 동학농민혁명에는 대흥면으로 불렸습니다. 이곳은 장흥지역의 동학농민군 중심세력이 활동했던 곳이었기 때문에 그만큼 희생자도 많이 나왔지요. 그래서 동학농민혁명 이후 일제강점기 내내 항일독립운동이 가장 치열하게 전개된 곳이기도 합니다. 제가 동학농민혁명에 대하여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1970년대 이기백 교수의 한국사신론을 공부하다가 동학농민혁명 당시 장흥 근처의 전투와 일본군의 토벌 상황을 표시한 지도에 장흥이 크게 부각되어 있는 것을 보고 농민운동의 과제로 장흥지역 동학농민혁명의 진실 규명을 포함시켰습니다. 그래서 지금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문) 이사장님께서는 농민운동가로서, 향토사학자로서 동학농민혁명에 깊은 관심과 애정을 쏟아부어오셨잖아요. 이점에 대해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답) 향토사학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5살 때부터 할아버지 무릎에서 풍월로 천자문을 배운 죄가 큽니다.(웃음) 제가 중학교 때 교과과정에서 한자가 폐지되었습니다. 그렇지만 가풍(家風) 때문에 한문 공부를 계속하였습니다. 한문을 공부해야 용돈이 짭짭하게 생겼기 때문에 처음에는 ‘울며 겨자 먹기’식으로 한문 공부를 했지만, 사서(四書)를 공부한 후 오경(五經)까지 공부해야겠다는 욕심이 생겼습니다.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사마천의 사기, 노장사상, 한시까지 공부하였는데 이것이 나중에 향토사학에 관심을 갖게된 배경이라면 배경입니다.(웃음) 동학농민혁명 관련 기록이라는 게 대체로 한문으로 되어 있어서 누군가가 변역을 하지 않으면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제가 한문을 좀 하니까 장흥동학농민혁명 관련 원전 자료를 발굴하고 번역하여 쓴 것들이 꽤 될 것입니다. 기억나는 것들로는 『장흥동학농민혁명사료집』(편역저編譯著, 2006.), 『장흥동학농민혁명사료총서Ⅰ·Ⅱ』(역저譯著, 2009.), 『장흥동학농민혁명과 그 지도자들』(2013.) 등입니다. 나아가 제가 몇 년 전부터 쓴 장흥지역 동학농민혁명사를 넘어 전국사로서의 동학농민혁명에 관한 글들로는 200자 원고 3,000매 가량의 『위의환의 동학농민혁명 이야기』 초고본이 있습니다. 기회가 되면 출판할 생각입니다. 이밖에도 장흥문화원이나 호남학진흥회 학술지, 각종 학술대회 등에 발표한 논문들도 상당히 될 것입니다.
문) 네, 선생님. 장흥지역 동학농민혁명과 기념사업의 역사에서 선생님의 활동을 빼놓고 얘기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선생님께서 장흥지역 기념사업을 시작한 게 벌써 40년 가까이 되었지요? 아니할 얘기로 돈도 되지 않는 일에 정성을 다한 선생님의 노고에 숙연해집니다. 전국 각각의 지역마다 동학농민혁명의 지역적 특성을 보입니다. 이사장님께서는 전남 장흥지역의 동학농민혁명을 특성을 어떻게 보고 계시는지요?
답) 무엇보다도 동학농민혁명의 대미(大尾)를 치열하게 마감지은 격전지였다는 점에서 그 특성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본군과 일본군의 지휘를 받은 관군이 가장 잔인하게 농민군을 학살한 곳 중의 하나가 장흥지역이잖습니까? 농민군이 우금치와 논산 등지에서 패배한 후 꺼져가는 혁명의 불씨를 되살리기 위해 장흥 지역에서는 1894년 11월 21일 웅치면 기포와 11월 25일 대흥면에서 기포하여 12월로 접어들어서면서부터는 장흥지역을 석권하였습니다. 그 여세를 몰아 벽사역과 장흥부 장녕성을 점령한 후 강진현과 전라도 육군의 핵심이라고 말할 수 있는 병영성까지 함락합니다. 이처럼 장흥 지역에서 동학농민군의 연이은 승리는 전라도 동학농민군을 다시 장흥으로 모여들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12월 12일부터 나주에 본영을 설치한 일본군이 장흥부로 향하는 사로(四路)로 군대를 보내고 여기에 더해 일본군 부산수비대의 1개 중대를 보내 동학농민군이 장흥에서 보성으로 넘어가지 못하게 막았습니다. 나아가 일본군함 죽파함과 조강함을 장흥부 남해안으로 보내 동학농민군이 인근 섬이나 제주도로 빠져나가지 못하고 봉쇄 했습니다. 그런데도 소년 뱃사공 윤성도는 자기 집의 범선을 이용하여 덕도(德島)로 도피한 혁명군 5~6백 명을 야음을 틈타 지금의 완도(莞島)의 각 섬으로 분산 도피시켜 훗날 모두 무사히 생환합니다. 여기서 살아 돌아온 동학농민군은 일제 강점기에 모두 천도교 중심의 항일독립운동에 참여합니다.

문) 네, 이사장님의 얘기가 하도 생생하여 갑오년 당시 동학농민혁명 상황을 보는 듯합니다. 이사장님 이번에는 그동안 장흥지역에서 전개된 동학농민혁명 관련한 기념사업에 대해 여쭙겠습니다. 석대들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산자락에 장흥 동학농민혁명기념탑을 건립하였지요? 기념탑을 건립하고도 제막식 갖지 못하다가 여러 해가 지난 후에 제막식을 개최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연유를 말씀해주실 수 있을 런지요?
답) 그렇습니다. 문 선생님도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우리 장흥에서 동학농민혁명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1991년부터 노력을 기울여 이영권 국회의원의 도움으로 국가예산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해서 ‘장흥동학농민기념탑건립추진위원회’라는 관제어용단체를 만들어져 기념탑 건립사업을 추진했습니다. 그 사람들은 구색을 갖추기 위해 관군 후손 4명도 추진위원회에 포함시켰습니다. 그렇게 해서 기념탑을 1992년에 건립하였습니다. 기념탑이 건립됨에 따라 제막식을 가져야 하는데 관군 후손 쪽에서 자기들에게 떨어질 떡고물이 없으니까 제막식을 막무가내로 막았습니다. 수류탄을 터뜨려 버리겠다고 협박을 하고 난리를 치니 당시 관선군수가 무서워서 제막식을 하지 못하고 여러 해 방치하였습니다. 그러거나 말거나 혁명 100주년 때부터 고재국 장흥군농민회 회장이 주축이 되어 방치된 기념탑 앞에서 매년 장흥군농민회가 추모식을 거행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장흥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창립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제기되었습니다. 그렇게 창립된 기념사업회가 주최가 되어 동학농민혁명 112주년이던 2006년에서야 제막식을 가졌습니다.

▣ 장흥 동학농민혁명기념탑
문) 네, 참 가슴 아픈 얘기입니다. 장흥 동학농민혁명기념탑에서 내려다보면 장흥 석대들이 한눈에 훤히 내려다보이잖아요? 장흥과 동학농민혁명 그러면 빼놓을 수 없는 사건이 석대들 전투인데.... 이 전투에서 희생된 동학농민군의 무덤이 몇 차례 수난을 겪었었지요? 지금은 장흥군에서 관리하는 공동묘지 한쪽에 이장되어 모셔져 있지요? 묘지를 이장하게 된 배경 등에 대해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답) 석대들 전투의 의의는 앞에서 상당히 설명되었다고 봅니다만, 12월 14~15일 양일간의 전투를 석대들 전투라고 하는데, 그 이전 12월 12~13일에도 치열한 전투가 있었습니다. 주한일본공사관기록에 일본군이 작성한 동학농민혁명 전투상보 목록에는 27개 목록이 나오는데 그중 5곳이 장흥의 전투상보 목록입니다. 장흥의 경군 토벌대장 이두황의 <우선봉일기> 1895년 1월 5일조를 보면 석대들을 비롯한 인근 주변에 흩어져 있는 동학농민군의 시신을 수습하라는 전령이 내려집니다. 경군이 1월 8일 나주로 올라가기 전의 일입니다. 지금의 장흥 공설운동장이 당시 동학농민군을 매장한 장소입니다. 이후 충열리 공동묘지라는 이름이 생겼습니다. 운동장, 체육관, 기념탑 등을 건립하면서 혁명군 1699기를 발굴합니다. 발굴기록을 살펴보고 발굴 참여자를 면담해보니 한구덩이에서 여러 명의 시신이 포개진 채 발굴되기도 했습니다. 이들은 모두 무연고처리 되어 현 장흥읍 금산리 공원묘지4묘역(무연고자 묘역)으로 이장하였습니다. 석대들 전투 이외에도 앞에서 말한 전투상보에 유치 조양촌 전투, 부산면 유앵동 전투, 장흥부 주변 전투, 관산읍 옥산전투, 대덕읍 월정 전투 등이 일본기록과 관군기록, 제가 발굴한 기록 등에 상세히 나옵니다. 이점에 대해서도 차분하게 파악하고 기념사업을 기획하여 추진하고자 합니다.
문) 석대들 전적지가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었지요? 사적 지정을 추진한 배경과 당시 장흥지역의 상황 등에 대해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답) 사적 지정을 추진한 경위는 사적으로 충분한 가치가 있었기 때문이죠. 사적으로 지정을 추진하면서 장흥지역의 동학농민혁명을 상징하는 기념관 건립을 함께 추진하여 탄력을 받았지요. 이 과정에서도 많은 애로사항이 있었지만 그때마다 슬기롭게 대체하면서 필요할 경우에는 아주 단호하게 대처하여 기념관 건립이 가능했습니다. 기념관 건립 이후 운영하는 것에는 불만이 많습니다. 하드웨어는 잘 갖추어졌는데 이를 운영하는 소프트웨어가 너무나 부족합니다. 군수면담을 통해 어렵게 얻어낸 약속도 군수가 바뀌고 실무자가 바뀌면 도로아미타불이 됩니다. 답답합니다. 이번에 새로 군수가 선출되었잖습니까? 그래서 수일 내로 현 군수와 면담을 통해 기념관 운영의 정상화 또는 활성화 방안을 적극적으로 논의하고자 합니다.

문) 장흥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에서 학술회의를 비롯하여 다양한 정신선양사업을 추진해오고 계시는데, 이에 대해 설명해주시기 바랍니다. 특히, 올해는 제128주년 동학농민혁명기념일에 맞추어 장흥군에서도 기념식을 개최하였는데 그 추진배경에 대해 설명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답) 장흥에서는 매년 학술대회, 심포지엄 등 다양한 형태로 기념사업을 진행해왔으나 코로나 여파로 최근 3년간 개점 휴업했습니다. 꿩 대신 닭이라고 작년에 기념사업회가 후원하여 여성 동학장군 이소사 뮤직비디오를 제작하였는데, 제가 노랫말 그러니까 작사에 참여했습니다. 국악풍으로 작곡하였고, 기념재단 홈페이지는 물론이고 여러 기념사업단체 홈페이지 등에 올렸습니다. 올해 장흥군에서 열린 전라남도 주최 국가기념식에서도 생음악으로 연주되어 많은 갈채를 받았습니다. 장흥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에서는 전라남도로 하여금 국가기념일 행사를 주최하도록 여러 경로를 통해 건의했으나 여러 번 묵살을 당했습니다. 그러다가 장흥출신 도의원의 도정질의를 통해 도지사의 답변을 이끌어내 올해 장흥에서 5월 11일 10시에 국가기념식을 개최하게 된 것입니다. 올해 행사는 코로나로 인해 도비 3천만원, 군비 3천만원으로 행사를 했지만 앞으로는 예산을 확대하여 진행하려고 합니다.
문) 이사장님, 장흥지역에 동학농민혁명 유적지들이 많지요? 석대들 전적지를 비롯하여 유적지들이 많은데 녹두꽃 독자님께 장흥지역 동학농민혁명 유적지를 소개해주시기 바랍니다.
답) 2020년 기념재단으로부터 5백만 원 지원을 받아 만든 장흥동학농민혁명 지도를 제작했습니다. 장흥지역에서 벌어진 2차 기포를 중심으로 33곳의 유적지를 사진과 함께 간략한 설명을 넣어서 제작했습니다. 처음 기획할 때 유적지가 50곳이 넘었는데 지도가 깔끔하지 않아 33곳으로 압축했습니다. 33곳 유적지 중에 장흥군 예산으로 전투상보에 나오는 5곳(석대들, 자울재, 유앵동, 조양촌, 옥산)에는 안내 표지판이 있는데 나머지는 없어요. 앞으로 장흥군과 협의하여 추가로 설치해나갈 계획입니다. 여기서 모두를 언급할 수 없지만 이미 사적으로 지정된 석대들 전투지와 또 중요한 유적지로 지방문화재적 가치가 있는 장흥읍 금산리 동학농민군 5~600명이 은신하였다가 윤성도 사공의 도움으로 모두 살아 돌아온 회진면 용암산록이 있습니다. 이밖에도 동학농민군이 많이 처형된 벽사역과 장태장군 이방언 장군이 처형된 장흥부의 군사훈련장 내 장대, 그리고 유앵동 전투에서 희생된 동학농민군을 매장한 부산면의 빈재, 관산읍 옥산 전투에서 희생된 동학농민군을 매장한 남송리 공동묘지 등의 유적지들이 있습니다.

문) 이번에 전라남도에서 주최한 국가기념식을 기해 장흥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에서 『장흥동학농민혁명군 후손 증언록』을 발간하였는데 그 경위에 대해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답) 동학농민혁명 100주년 때 역사문제연구소에서 『다시 피는 녹두꽃』(1994)과 『전봉준과 그의 동지들』(1997)을 출판하였습니다. 『다시 피는 녹두꽃』에 이방언 장군, 이사경 대접주, 김학삼 대접주, 동학농민군 변규상, 김재득 후손의 증언이 실려 있고 『전봉준과 그의 동지들』에 동학농민군 김재황, 김철현, 백좌인, 백재인, 변규창, 이겸호, 이백호, 김두만, 대접주 윤세현 후손의 증언록이 실려 있습니다. 여기서 김재득과 윤세현은 강진 사람이지만 모두 장흥동학농민혁명 세력권에 있던 사람으로 장흥 전투에서 활약하였기 때문에 포함시켰습니다. 장흥 12명, 강진 2명의 증언록을 이이화 선생 생전에 제가 편집하여 소책자를 만들고 싶다고 하니 흔쾌히 승낙해 주셔서 작업해둔 것을 이번에 꺼내 증언록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연로하신 분들이 편히 읽을 수 있도록 활자도 14 포인트로 크게 하였습니다.
문) 장흥동학농민혁명기념관에 갑오년 당시 동학농민군이 사용했던 것으로 알려진 조총의 총열과 대포 포환이 전시되어 있지요? 이 유물에 대해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답) 먼저 조총에 대한 사항은 『장흥동학농민혁명군 후손 증언록』 <농민군에게 군량을 운반해주던 이겸호> 편에 자세히 나옵니다. 이겸호 손자 인흠 씨를 고(故) 우윤 선생님이 인터뷰를 하다가 조총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러자 우윤 선생님이 당시 이종찬 장흥동학농민혁명유족회 회장을 통해 우윤 선생님이 관장으로 있던 전주역사박물관에 전시하기 위해 대여해 가는데 이때 보관증을 써주고 장흥에서 필요하면 언제든지 돌려주겠다는 문구를 넣었습니다. 그래서 장흥동학농민혁명기념관이 건립된 후 전주역사박물관으로부터 이 유물을 넘겨받아 전시하고 있습니다. 동학농민혁명 이후 산에서 은신하다 집으로 내려올 때 조총을 가져왔는데 남들 눈이 무서워 곤마리(마루짱) 밑에 숨겨 두었다고 합니다. 세월이 흐른 후 헌집을 털어내고 새집을 지을 때 이 조총이 나왔는데, 개머리판은 나무라 썩어 없어지고 쇠붙이인 총열만 남아 있었다고 합니다. 이를 인흠 씨가 선반에 소중하게 보관하여 128년이 지난 오늘까지 남아 있는 것입니다. 포환은 소년장수 최동린의 양자인 최재호 씨가 보관하고 있던 것입니다. 최동린이 어린나이에 나주에서 처형되었는데 최동린 집안이 종손 집안이어서 손자뻘 되는 최재호 씨를 양자로 삼아 대를 이었습니다. 당시 최동린이 살았던 대덕읍 연지리는 장흥전투 야전사령관 이인환이 본래는 남평 출신이지만 회령진성의 군관으로 근무하다가 회령진성과 가까운 연지마을에서 정착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바로 이인환이 대포와 무기를 잘 다루었다는 구전이 있습니다. 연지마을에서 가까운 곳에는 당시 수철점(현 관산읍 수동리)라는 관에서 운영하는 주물공장이 있었습니다. 1747년 정묘지라는 기록을 살펴보니 이 수철점에서 철광석으로 주물을 만들어 솥, 화약 만드는 큰 가마솥, 무기 등을 만들어 장흥부, 병영성, 회령진, 우수영 등에 납품하였던 곳입니다. 그래서 제가 추정하건대 이인환의 주도로 수철점에서 포환을 만들어 연지마을에 보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배항섭 교수가 문화재청으로부터 동학농민혁명과 관련한 문화재적 가치가 있는 것을 조사하는 용역을 하고 있는데 기념관에서 조사를 하여 갔습니다. 용역 결과가 나오면 이를 토대로 조총과 포환을 지방문화재로 등록 신청하려고 합니다.

문) 앞으로 추진해나갈 기념사업 계획에 대해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답) 제가 장흥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이사장을 맡은 것이 3년 4개월입니다. 장흥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나 장흥동학농민혁명기념관이 제대로 운영될 수 있도록 기반을 다져놓고 명예롭게 물러나려고 합니다. 어쨌거나 부족한 제가 지난 4월 24일부터 문화체육관광부 특수법인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이사로 임명되어 3년의 임기를 수행하게 되었습니다. 그 기간 동안에라도 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에 적극적으로 힘을 쏟으려고 마음 다지고 있습니다.
문) 이사장님, 바쁘신 중에도 긴 시간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답) 정읍에서 장흥은 먼 길인데 무더운 여름을 뚫고 찾아와 찾아주셔서 고맙습니다. 앞으로 <녹두꽃>이 유족이나 기념사업 하는 사람만 읽는 소식지가 아니라 온 국민, 특히 젊은 세대들이 많이 읽어서 우리나라 역사를 바로 아는데 밑거름이 되는 소식지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고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