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소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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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겨울 50호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손여옥의 손자 손주갑

동학농민혁명참여자 손여옥의 손자 손주갑


일시 : 2022. 10. 12(화) 13:00

장소 : (사)동학농민혁명유족회 사무실



 

  이번 『녹두꽃』소식지(통권50호) 유족인터뷰에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손여옥(孫如玉,1860~1894) 님의 손자(孫子) 손주갑(孫周甲) 선생님을 모셨다. 참여자 손여옥 님은 동학농민혁명 당시 전봉준·손화중 장군과 함께 혁명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가 나주에서 체포되어 돌아가셨다.


  손주갑 선생님은 동학농민혁명유족회 창립준비위원회 때부터 1994년 3월 창립된 동학농민혁명유족회 살림살이를 맡아왔으며, 2004년 특별법이 제정된 후 전국에서 활동하는 유족회원들과 기념사업단체들을 한데 모아 문화체육관광부 재단법인으로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을 설립한 후 유족회와 재단의 총무를 맡아 헌신하였다. 또한, 서울 서린동 서울지하철 종각역 5~6번 출구 앞 인도에 건립(2018. 4. 24.)한 <녹두장군 전봉준> 동상 건립을 위해 서울시 사단법인으로 설립한 (사)전봉준장군동상건립위원회 사무국장을 맡아 동상 건립사업에 기여하였으며, 현재 (사)동학농민혁명유족회 대의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문) 선생님 반갑습니다. 녹두꽃 독자님들께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답) 전국에 계시는 동학농민혁명유족회 여러분, 그리고 동학농민혁명 정신선양을 위해 애쓰시는 전국 각 지역의 기념사업단체 관계자 여러분, 녹두꽃 독자 여러분께 인사 올립니다. 사발통문 서명자의 한 사람인 참여자 손 여자 옥자 님의 손자 손주갑입니다. 저는 한국전쟁 한 해 전인 1949년 전북 순창 강천사에서 태어났습니다. 온 나라가 6.25 난리를 치른 뒤 제가 여섯 살 때쯤 정읍으로 이주했습니다. 정읍에서 학교를 다녔고 1974년도에 상경(上京)하여 현재까지 서울에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동학농민혁명 100주년 직전 해인 1993년 말에 유족 몇 분들이 모임을 시작하면서 구성된 ‘동학농민혁명유족회 창립준비위원회’ 때부터 유족회 활동에 참여해왔으니까, 동학농민혁명 정신선양을 위해 힘닿는 대로 참여해 온 지가 벌써 30년 가까이 되었네요.



문) 네, 제가 1992년 6월 전북 전주시에서 창립한 동학농민혁명백주년기념사업회 간사로 동학농민혁명 역사바로세우기 실무를 맡아 활동해왔기 때문에 지금은 고인이 되신 이이화 선생님, 우윤 선생님 등 여러분들이 유족회를 창립하기 위해 애쓴 과정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분들의 노력이 1993년 말 동학농민혁명유족회 창립준비위원회, 1994년 3월 동학농민혁명유족회 창립으로 결실을 맺게 되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선생님은 보이는 곳에서 혹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말 그대로 물심양면으로 동학농민혁명유족회 활동에 헌신해오셨는데, 선생님은 고향이 순창군으로, 특이하게 강천사라는 절에서 태어나셨지요? 이후 선생님 아버님의 고향이시고, 조부님께서 동학농민혁명 때 활동하셨던 정읍으로 돌아와 생활하신 것을 알고 있는데, 이 점에 대해 말씀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답) 네, 손 여자 옥자 저의 조부님은 전북 정읍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조부님은 1차 동학농민혁명 당시 핵심 지도자였던 손화중 장군의 족질(조카뻘)로 1893년 11월 사발통문 서명자 20명 중 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조부께서는 갑오년에 전봉준·손화중 장군과 함께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셨고, 동학농민군이 나주전투에서 패배한 후 체포되어 돌아가셨습니다. 그 여파로 저희 집안은 풍비박산(風飛雹散) 나서 모두 피신하게 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제 아버님이 7살 때 장성 백양사로 몸을 피하셨다가 그곳에서 스님이 되신 후 몇 곳을 거쳐 강천사로 들어가셔서 한국전쟁 이전까지 주지스님으로 계실 때 제가 그곳에서 태어나게 된 것입니다.



문) 선생님께서는 조부님이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셨다는 사실을 언제부터 알고 계셨는지요?


답) 정확하지는 않습니다만, 1969년 1월 27일로 기억됩니다. 제가 그때 고등학교 2학년이었는데, 저희 집안 어르신한테 편지 한 통을 받았어요. 그 내용은 저의 손 여자 옥자 할아버지께서 사발통문에 서명한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라는 사실과 함께 그 후손들의 모임이 있으니 그 모임에 꼭 참석하라고 당부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집안 어르신의 말씀대로 사발통문 서명자 후손들이 모이는 자리에 가게 되었습니다. 1968년 늦은 가을에 사발통문 필사본이 전북 정읍 고부면 신중리에서 발견되었고, 해가 1969년으로 바뀐 후 사발통문에 서명한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의 후손들이 선조들의 뜻을 기리기 위해 갖게 된 첫 모임이었습니다. 김 응자 칠자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후손의 집인 전북 정읍 연지리(잔다리목)에서 모임을 가졌는데, 그날 모임에서 후손들이 힘을 모아 <동학혁명모의탑>을 세우자는 의견이 개진되어 논의가 이루어졌습니다. 그 모임에 참석하면서 할아버지께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그 이전에는 할아버지 함자도 몰랐어요. 제가 어렸을 때 어머니께서 너희 할아버지가 갑오년에 대장을 하셨다고만 언뜻 말씀하였지만, 아버지께서는 생전에 피해의식 때문이었는지 조부님에 대해서는 한 마디 말씀도 없으셨어요. 지금이야 동학농민혁명을 우리나라 민주주의 뿌리라고 말하고, 국권수호를 위해 일제 침략에 맞서 싸운 의병, 민족주의 운동이라고 그 의미를 제대로 평가하지만 제가 어렸을 적에만 해도 ‘동학란’ 또는 ‘반란’ 등으로 매도되던 때였거든요. 그래서 집안의 내력을 얘기해주면 어린 자녀들이 어디 가서 아무에게나 함부로 얘기할 수도 있고, 그래서 해가 미치지 않을까 염려하셨기 때문에 저희들에게 아무 얘기도 하지 않으셨던 것 같아요. 돌아가실 때까지 그렇게 아무런 말씀도 해주지 않으셨어요.



                                                                                                                       ▣ 집안 어르신(손성탁)으로부터 받은 편지


문) 어머니께서 조부님에 대해 말씀하신 것을 보면 아버지께서도 조부님이 동학농민혁명에 주도적으로 참여했음을 잘 알고 계셨음이 분명해요. 그런데도 조부님 관련 일을 가슴에 묻어둘 수밖에 없었던 선생님의 아버님 생각을 하면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다행스럽게 뒤늦게나마 사발통문이 발견되면서 선생님 조부님의 활동을 확인할 수 있게 되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습니다. 어머니 혹은 여타의 경로를 통해 조부님에 대해 알게 된 얘기가 있으면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답) 저는 할아버지께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했다는 사실을 알고 난 후 조부님의 활동 기록들을 찾아보았습니다. 최현식 선생님께서 쓰신 책(『갑오동학혁명사』)에서 손 여자 옥자 할아버지 함자를 확인할 수 있었고, 그 글 중에 유족으로 손자인 제 이름도 있더라고요. 뿐만 아니라 오지영의 『동학사』나 기타 여러 사료들에서도 조부님의 활동상황이 기록으로 남아있어서 전해지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어요. 그런 자료들을 통해 조부님께서 1893년 11월 동학농민혁명 도화선이 된 고부농민봉기의 발단이었던 이른바 ‘사발통문 거사계획’ 단계에서부터 적극적으로 참여하셨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또 다른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었던 사실은 조부님은 갑오년에 손화중 포(包)에 속한 정읍현의 두령(頭領)으로, 정읍현의 농민군 천여 명을 이끌고 여러 전투에 참가하신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문) 선생님의 집안은 전봉준 장군님, 손화중 장군님의 집안과 특별한 인연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점에 대해 가능한 자세히 말씀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답) 제가 어렸을 때 정읍으로 이주했었는데, 그때 아버지께서 제가 잘 모르는 어른 두 분의 사진을 집안 벽에 걸어놓으셨어요. 나중에 물어서 알았는데 두 분 중 한 분은 불제자였던 제 아버지를 지도하셨던 큰스님이셨고, 또 한 분은 손화중 장군이셨어요. 나중에 아버지께서 손화중 장군 사진은 그분의 후손에게 돌려주자고 해서 손화중 장군의 손자 되시는 손홍렬 선생님께 보내드렸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저희 집안이 손화중 장군 집안과 각별했던 것은 조부님과 손화중 장군님이 인접한 마을에 살았고, 집안끼리도 관계가 깊었다고 들었습니다. 조금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조부님은 정읍 삼산리에 사셨고, 손화중 장군은 바로 뒷마을인 음성리에 사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제게 할머니가 두 분이 계셨는데, 큰 할머니 본관이 고흥 유씨인데 손화중 장군의 부인도 고흥 유씨입니다. 그리고 둘째 할머니는 본관이 천안으로 천안 전씨입니다. 가계를 정리해서 말씀드리면 제 할아버지께서는 전봉준 장군의 매제가 되는 셈입니다. 그러니까 전봉준 장군님께서 제 아버지의 외삼촌이 되는 거죠. 일전에 손화중 장군님의 손자이신 손홍렬 선생님을 만났었는데 그때 제가 “기록에 보니까 저희 손 여자 옥자 조부님께서 손화중 장군의 족질로 되어있던데 어떻게 된 것입니까?”라고 여쭤봤더니 손홍렬 선생님께서 “족보상으로는 명확하게 확인되지는 않지만 예전에 너희 집안이 우리 집안으로 양자를 들었다”고 알고 있다고 말씀하시더라고요. 그렇게 해서 손화중 장군님과 족질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문) 네, 그러니까 손 여자 옥자 참여자분과 전봉준, 손화중 두 분이 아주 깊은 연관이 있다는 사실에 대해 잘 들었습니다. 앞서 얘기 나눈 것처럼 조부님은 동학농민혁명 초기단계부터 혁명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셔서 많은 전투에도 참가하셨다는 사실에 대해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적극적으로 혁명에 참여하셨다가 끝내는 전투에서 패배한 후 체포되어 처형을 당하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 점에 대해 말씀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그리고 조부님의 시신은 수습하셨는지에 대해서도 말씀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답) 조부님의 시신은 수습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묘도 없고, 제삿날도 정확하게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나주전투인가? 이 전투에서 패배한 후 붙잡혀서 나주에서 처형을 당하셨다는 얘기를 바탕으로 어림짐작으로 제삿날을 잡아서 제를 모셔왔다고 어머니께 들었습니다.



문) 네, 조부님의 시신조차 거둘 수 없는 캄캄한 상황이었지만 할머니께서 당시의 상황에 지혜롭게 대처하셔서 선생님의 아버님을 비롯한 후손들이 화를 면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전라남도 장성 백양사에서 피난생활을 하시고, 순창 강천사 등을 거쳐 나중에 정읍으로 이주하여 사셨다고 하시는데 여기에 대해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답) 동학농민군이 패배한 1894년 겨울, 어수선하던 때 저희 할머니께서 아버지를 데리고 전라남도 백양사로 피신하셨다고 합니다. 그때는 잡히면 친가(親家)는 물론이고 외가(外家)까지 씨를 말리려고 했던 때라서 서둘러 산중으로 피신을 하셨다고 합니다. 그렇게 피신하는 과정에서 아버지께서 어린 나이에 숨어 지내시다가 불제자가 되셨다고 합니다. 승려가 되신 후 아버지께서는 장성 백양사, 고창 선운사, 부안 내소사, 정읍 내장사 등에서 기거하셨다고 합니다. 나중에 아버지께서 정읍 내장산 넘어 회문산자락을 타고 순창으로 들어가신 후 6.25 한국전쟁 직전까지 강천사의 주지스님으로 계셨다고 합니다. 그런 연고로 제가 강천사에서 태어난 것이구요. 저희 아버님은 대처승으로 승려지만 결혼을 할 수 있으셨습니다. 6.25 전쟁이 일어나자 강천사에 머무는 것이 여의치 못해 정읍으로 이주를 했고, 제가 6살 때였는데 그때를 정확하게 기억하지는 못합니다. 아버지께서 환갑 때 저를 나으셨어요. 그러니까 아버지께서 정읍으로 이주하신 때 연세가 육십 육 칠세 쯤 되었을 거예요. 연세가 많으셔서 힘든 일을 하시기 여의치 않고, 게다가 전쟁이 끝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때라 가족들 생계유지가 막막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버지께서 산지기 일을 하시려고 할 때 손화중 장군님의 아드님이신 손응수 옹께서 산지기를 할 수 있도록 많은 도움을 주셨다고 합니다. 그렇게 손화중 장군님 집안 어른들의 도움으로 아버지께서 정읍에 정착할 수 있었고, 저도 정읍에서 고등학교까지 마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문)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신 아버지를 둔 선생님의 아버님의 삶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가팔랐을까 하는 것은 선뜻 짐작이 가지 않습니다. 아버님의 삶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참여자 후손들의 삶은 말 그대로 숨죽이며 살아야했던 세월이었습니다. 천만다행으로 동학농민혁명 100주년 기념사업이 성공적으로 추진되어 반란사건으로 치부되던 동학농민혁명의 역사적 의미에 대한 역사인식이 대중적으로 전환되면서 너무나 늦었지만 동학농민혁명 110년 만인 2004년 명예회복 특별법이 제정되었습니다. 이어서 2019년에는 동학농민혁명기념일까지 제정되어 참여자와 그 유족의 명예회복사업이 첫발을 내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1994년 3월에는 동학농민혁명유족회가 창립되었는데, 그 창립을 준비하던 때부터 지금까지 선생님께서는 유족회 일이나 동학농민혁명 정신선양사업 관련 일이라면 늘 마다하지 않으시고 헌신적으로 임해 오셨다는 것을 저는 늘 가까이에서 봤기 때문에 잘 알고 있습니다. 누구보다도 오랫동안, 많은 시간을 동학농민혁명 정신선양사업에 다함없는 애정을 쏟으신 선생님께서 하실 말씀도 참 많을 것이라 여겨집니다. 누가 뭣이라 하든 말든 묵묵히 일하시는 분이시지만, 오늘 인터뷰에서는 선생님께서 동학농민혁명 정신을 계승하는 사업에 몸담아오면서 기억난 일들이나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으면 형식에 구애 없이 편안하게 얘기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답) 그러니까 제가 1969년도에 사발통문 서명자 후손 분들과 함께 힘을 모아 고부면 신중리 주산마을 앞에 ‘동학혁명모의탑’을 건립하기 위해 시작된 모임에 참여한 때로부터 동학농민혁명 정신선양사업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때는 다들 사는 게 어렵고 하니까 작은 탑을 하나 세우려고 해도 십시일반으로 쌀도 내고 돈도 내고 그렇게 힘을 모아야 가능했습니다. 그 당시 저는 고등학생이었는데, 그때 돈으로 100원을 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리고 모의탑을 만드는 현장에 돈이 없으니까 막걸리 몇 병이라도 사들고 그곳에 몇 번인가 가서 예를 올리곤 했습니다. 그러다가 고등학교 3학년을 마치고 졸업하자마자 이내 군대를 갔어요. 74년도에 군복무를 마치고 제대한 후 서울에서 회사도 다니고 그렇게 생활을 했습니다. 그렇게 살다가 동학농민혁명 100주년이던 1994년 2월 정읍시 일원에서 동학농민혁명100주년기념사업단체협의회 주최로‘고부봉기 역사맞이굿’이 열린다는 것을 알게 되어 가족들을 모두 데리고 그 행사에 참가하였습니다. 그 행사에서 동학농민혁명 유족들이 나와서 인사하는 모습을 보고 유족회가 창립을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 이튿날인가? 정읍시청으로 전화해서 유족 관계자 등과 연락할 수 있는 방법을 물으니 전화번호를 하나 알려줘서 연락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유족회 창립을 준비하시던 분들과 만나서 유족회 창립 준비를 함께 하였고, 마침내 1994년 3월 3일에 (사)동학농민혁명유족회 창립을 보게 되었습니다. 제가 그때부터 지금까지 유족회 활동에 나름대로 힘을 보태려고 노력하였고, 2017년에는 전봉준 장군 동상 건립을 추진 할 때 전봉준동상건립위원회 사무총장을 맡으신 전성준 선생님의 부탁을 받고 동상건립추진위원회 일을 힘닿는 대로 돕게 되었습니다. 한 때는 할아버지 손자노릇하기 힘들다는 생각도 했었는데, 사필귀정(事必歸正)이라고 때가 되면 진실은 언젠가는 밝혀지리라는 믿음으로 유족회 초대 김영중 회장님부터 정남기 회장님까지 모시게 되었습니다. 지금이야 유족회 어른들이 많이 돌아가셔서 안타깝습니다. 동학농민혁명유족회가 창립되던 1994년에는 유족회를 비롯해서 사회 전반적으로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열기가 대단했습니다.



 

문) 맞습니다. 방송에서도 동학농민혁명 관련 뉴스나 프로그램들이 많이 나왔고, 신문들도 동학농민혁명을 주제로 기획특집기사나 연재기사를 많이 게재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사회적 분위기 조성에는 무엇보다도 역사문제연구소를 비롯한 진보적인 역사학계 소장학자들의 노력과 전국에서 창립되어 활동한 기념사업단체들의 헌신적인 노력이 있었습니다. 여기에다가 문민정부 출범이라는 사회적 분위기가 크게 힘을 보태었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과거사 정리 차원에서 역사바로세우기를 위한 국가정책들이 추진되었습니다. 1993년 2월 문민정부 출범, 1994년 동학농민혁명 100주년, 동학농민혁명유족회 창립, 전국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창립 등등 이런 움직임들을 유기적인 연계 속에서 살펴봤을 때 100주년 전후 고양된 사회적 분위기를 옳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쨌거나 이런 상황에서 1994년 100주년 기념대회가 2월 26~27일 ‘고부봉기 역사맞이굿’(전북 정읍시), 4월 29~30일 ‘100주년 기념대회’(전북 전주시), 10월 29~30일 ‘100주년 우금티추모예술제’(충남 공주시) 등 아주 성공적으로 전개되었습니다. 그로부터 10년 후인 2004년 특별법이 제정되었습니다. 그래서 경복궁 내 사무실을 받아서 동학농민혁명유족회와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이 함께 살림을 했었는데, 이때의 기억을 더듬어서 말씀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답) 그때는 어디서 사업예산이나 사무실 운영에 따른 예산을 지원받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지요. 그때 문부장님도 재단 사무처장을 맡아서 고생했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참 가난했어요.(웃음) 그래서 예술계 계시는 분들의 그림이나 서화작품을 받아서 전시회를 열어 기금을 만들곤 했었지요. 기억해보면 덕성여대 어디 빌딩 지하에서 전시회를 열었었는데, 지금은 고인이 되신 신영복 교수님 글씨도 몇 점 받아서 전시했던 기억이 나요. 유족회가 창립되고 현재에 이르기까지 기념재단을 비롯해서 각계각층에서 여러모로 참 애를 많이 써주셨습니다. 특히 2004년「동학농민혁명참여자명예회복에관한특별법」제정은 유족으로서는 참 잊을 수 없는 일입니다. 반란군으로 내몰렸던 저희 선조들을 정부에서 법률로 그분들의 명예를 회복해야 한다고 공식적으로 공포한 것이니까요. 특별법 제정 당시를 생각하면 특별법이 발의되고, 통과될 수 있도록 애써주신 분들이 참 많은데 그 중에서도 지금은 고인이 되신 한승헌 변호사님, 이이화 역사학자님 생각이 참 많이 납니다. 그리고 당시 정읍시가 지역구였던 윤철상 국회의원님과 그분의 보좌관이었던 이요섭·고영규 님이 생각납니다. 개인적으로는 이 분들께 많은 은혜를 입었다고 생각하고, 지금도 고마운 마음을 잊지 않고 간직하고 있습니다.



문) 네, 선생님을 말씀을 들으니 숙연해집니다. 선생님께서 드러내는 성격이 아니어서 말씀을 잘 안 하시지만 늘 유족회 활동은 물론이고, 동학농민혁명 정신을 선양하는 사업마다 실무의 중심에 계셨습니다. 2004년 특별법이 제정된 후 경북궁 내 같은 사무실에서 동학농민혁명유족회와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이 함께 업무를 보았는데, 그때 제가 기념재단의 사무처장 업무를 수행하였고, 선생님께서 유족회는 물론이고 기념재단의 총무를 일을 맡으셨지요. 뿐만 아니라 2016년 10월부터 업무를 시작한 서울 종로구 서린동 서울지하철 종각역 5~6번 출구 앞에‘녹두장군 전봉준’동상 건립사업 때도 (사)전봉준장군동상건립위원회 사무국장을 맡아 서울시에 법인을 설립하는 업무를 비롯하여 실무적인 많은 일들은 묵묵히 감당하신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은 기념재단에서 근무하는 제게 저를 뒤돌아보게 하는 귀감이었습니다.


답) 무슨 말씀을....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후손인 저야 당연한 일이지요. 도리어 시민운동가로서 동학농민혁명의 역사를 바로 세우려고 백주년 이전부터 지금까지 30년을 몸담아온 문부장님 같은 사람이 고마울 따름이지요. 지금이야 특별법도, 기념일도 제정되어 동학농민혁명의 역사적 의미가 대중적으로 바로잡혔지만, 100주년 때까지만 해도 반란사건이라고 말하던 때였잖아요?



 

문) 네, 격세지감입니다. 동학농민혁명 100주년 기념사업이 성공적으로 전개되면서 10년 뒤에 특별법이 제정되었고, 2019년에는 동학농민혁명기념일까지 제정되었습니다. 이런 과정을 실무자로서 함께했다는 것에 대해 저는 참 기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인터뷰를 마무리해야 할 것 같습니다. 선생님 혹여 빠뜨린 얘기가 있거나 기념재단 혹은 전국의 유족 분들이나 기념사업단체 관계자 분들에게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으면 해주시기 바랍니다.


답) 네, 참 많은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반란으로 치부되던 동학농민혁명이 우리나라 민주주의 뿌리로 재인식되고, 일제의 침략에 국권을 수호하기 위한 민족적인 거사로 인식이 전환되었습니다. 여기에서 나아가 우리 유족들은 선조들이 국가 유공자로 서훈이 되기를 염원하고 있습니다. 나라와 겨레를 위해 희생되신 참여자분들이 늦었지만 이제라도 제대로 예우를 받아야 한다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참여자분들의 서훈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한편으로는 우리가 후손으로서 해야 할 일을 다 했는가에 대해 스스로에게 반문하곤 합니다. 이 대목에서 제가 꼭 말씀해 드리고 싶은 점은, 이름도 남기지 못하고 희생되신 분들에 대한 예우도 어떤 방식으로든 방안을 강구되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나아가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들이 무엇을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고 일어났는가에 대해 생각하면서 저는 동학농민혁명을 반봉건, 반외세로만 초점을 맞추는 감이 있어 아쉽습니다. 물질중심의 자본주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미래를 열어갈 젊은 세대에게 우리가 “동학농민혁명”에서 무엇을 교훈으로 남겨줘야 할 것인가에 대해 깊이 고민하게 됩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사람이 하늘이다”는 동학농민군의 숭고한 정신적 가치를 저는 “나눔”과 “배려” 그리고 “존중”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런 것을 어떻게 젊은이들한테 공감하게 할 수 있느냐가 결국 동학농민혁명의 현재화, 미래화로 갈 수 있는 관건인 것 같습니다. 이를 위해서 동학농민혁명 정신을 젊은 세대들이 쉽게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문화예술로의 승화가 중요하다고 봅니다. 이 부분에 대해 재단에서도 많은 고민을 하고 계시지만, 더 많이 신경을 써주셨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후손으로서 별 다르게 한 것도 없는데 이렇게 인터뷰하러 서울까지 먼 길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문) 선생님, 긴 시간 동안 귀한 말씀해주신 것에 대해 깊이 감사드립니다. 선생님 내내 건강하시고 하시는 일마다 순조롭기를 기원합니다. 선생님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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