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소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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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겨울 50호
무안군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를 찾아서

​무안군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를 찾아서


일시 : 2022. 10. 18.(화)

장소 : 무안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사무실


  소식지 『녹두꽃』(통권50호) 지역대담에는 박석면 무안군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회장을 모셨다. 박석면 회장은 30년 전인 1990년대 초부터 무안지역에서 농민회 활동을 하면서 인근의 함평과 나주는 물론이고, 장흥지역에서 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을 추진하는 사람들과 연대해왔다.


  무안지역에서 동학농민혁명 정신선양 사업추진의 필요성이 제기된 것은 동학농민혁명 100주년을 한 해 앞둔 1993년이었다. 그러다가 2004년 동학농민혁명 관련 특별법이 제정되면서 전남지방에서 전개된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연구와 기념사업 추진의 필요성이 급격하게 부상하여 2007년도에 무안군동학농민혁명유족회가 창립되었고, 2011년 무안군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가 창립되어 지금까지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박석면 무안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회장


문) 안녕하십니까. 이번 호 <지역대담>에는 전라남도 무안군에서 동학농민혁명 정신선양을 위해 애쓰시는 사단법인 무안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박석면 회장님을 모셨습니다. 회장님, 일정이 바쁘실 텐데 귀한 시간을 내주셔서 고맙습니다. 먼저 녹두꽃 독자들에게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답) 녹두꽃 독자 여러분 반갑습니다. 무안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회장 박석면입니다. 제가 동학농민혁명에 관심을 두게 된 것도 어느덧 30년이 되었습니다. 저는 오래전부터 무안에서 농민운동을 해왔습니다. 그러던 중 동학농민혁명 100주년을 한 해 앞둔 1993년 전라남도 지역에서도 동학농민혁명 100주년을 기해 무엇인가 해야 하지 않느냐? 그런 논의를 시작한 후 지금까지 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에 연을 맺고 있습니다. 혁명 100주년 전후 시기 무안지역은 물론이고, 인근의 함평에서 기념사업회가 창립되어 그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았습니다. 기념사업에 관한 논의를 시작하면서 가장 먼저 한 것은 고창, 정읍 지역의 동학농민혁명 유적지 답사였습니다. 93년 11월 무안지역 뜻있는 주민 80여 분과 함께 한 답사는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숭고한 뜻을 다시 새겨듣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 뒤 2004년 동학농민혁명특별법이 제정되면서부터 무안에서도 본격적인 기념사업이 시작됩니다. 무안향토사연구소의 마을탐방과 동학 유족 찾기, 2005년 박맹수 교수 초청 동학 강연회, 2007년 유족회 창립, 2008년 무안향토사연구소와 유족회의‘무안동학농민혁명사’발간, 2011년 무안군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가 발족되는 등 일련의 무안동학농민혁명의 기념사업을 위한 준비가 이루어진 이후 지금까지 줄곧 그 일을 해오고 있습니다.



문) 2022년 10월 현재 전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동학농민혁명 기념단체는 35개입니다. 무안군동학농민혁명유족회와 무안군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가 일찍이 창립되었는데요. 초창기 연혁과 활동내용에 대해 말씀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답) 2011년 8월 유족회와 뜻있는 무안군민들이 모여 동학의 자료발굴과 기념사업, 그리고 정신계승이라는 3가지 큰 목적을 가지고 무안군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이하 무안기념사업회)가 만들어졌습니다. 가장 먼저 시작한 사업이 제폭구민과 척양척왜를 외치다 구천에 외롭게 쓰러져간 혁명 전사들의 넋을 위로하고 그 뜻을 기리는 위령제를 지내는 일이었는데 지금까지 매년 해오고 있습니다. 2013년에는 무안지역의 동학의 역사를 발굴하고 자료를 수집하는 일환으로 목포대학교에 의뢰하여 ‘무안군동학농민혁명 역사성 고증 및 기념사업 기본계획 수립’에 대한 용역사업을 실시하였고 2017년에는 목포대 고석규 전 총장, 배항섭 교수 등 전국의 동학 전문가들을 모시고 학술세미나를 개최하는 등 무안군의 동학 역사 찾기에 심혈을 기울였고, 앞으로의 기념사업에 대한 방향을 잡아가는 작업을 하였지요. 2015년부터는 목포대학교, 무안고등학교, 해제중학교 학생들을 중심으로 동아리를 꾸려 연구활동을 하며 커나가는 학생들을 상대로 정신선양사업을 진행해오고 있습니다. 특히 무안고등학교 학생들은 2018년부터 2020년까지 3년간 직접 연극을 만들어 승달예술회관 대공연장 무대에 올렸는데 함께 공연을 관람한 지역주민들이나 학생들, 그리고 학교 선생님들에게까지 큰 울림으로 남았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학교 교장선생님은 일본군 역, 저는 배상옥 장군 역을 하며 직접 연극에 참여를 했는데 학생들에게 큰 가르침이 되지 않았나 생각이 됩니다.



공연︱다시 돌아온 파랑새(2019년)                                                                            동학농민혁명 주제 연극(다시 돌아온 파랑새)의 한 장면

좌 : 배상옥 장군 역의 박석면 회장                                                                          


문) 동학농민혁명은 전라도에서 발원하여 전국으로 확대·전개된 우리나라 근대 민주주의 운동의 뿌리이자 민족주의 운동의 시원입니다. 1894년 동학농민군은  백두산자락인 함경도를 제외하고 전라도 충청도 경상도 경기도 강원도 황해도 평안도 등 전국 각지에서 척양척왜, 보국안민의 기치를 들고 봉기했다는 사실은 이미 1980년 이후 역사학계 연구에 따라 명확하게 규명되었습니다. 따라서 전국에서 전개된 동학농민혁명은 해당 지역마다 독특한 지역적 특성을 갖고 있는데, 회장님께서는 전남 무안지역의 특성을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답) 무안군은 나주시와 인접한 고을입니다. 그로 인해 무안지역만의 독특한 의미가 부여된 측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잘 아시는 것처럼 동학농민군이 전주성을 점령한 후 전라감사 김학진과 관민상화의 원칙에 합의하여, 전라도 53개 군현에 집강소를 설치하였잖습니까? 그때 남원 운봉지역과 무안 인근 나주지역에는 집강소를 설치하지 못하였습니다. 수성군 그러니까 관군과 민보군 등 보수가 강했던 때문이었지요. 그래서 무안지역의 동학농민군은 2차 봉기 때 북상에 합류하지 않고, 상당한 세력이 남아서 남해안으로 쳐들어올지 모르는 일본군과 나주 수성군의 발호에 대비하였습니다. 이런 점에서 다른 지역과는 다른 역사적 특성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무안지역 동학농민혁명에 대해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배상옥 대접주님의 활약상입니다. 동학농민혁명 지도자 그러면 정읍, 태인, 고창 지역의 출신인 지도자 전봉준, 손화중, 최경선, 김덕명 뭐 이런 분들이 부각되어 있는데 이른바 서남해안 무안, 함평, 나주, 영광 등지에서 큰 세력을 거느렸던 배상옥 대접주, 남해바닷가 장흥 등지를 석권하였던 이방언 대접주 등의 활약상이 역사의 뒤안길에 버려진 측면이 있습니다. 이런 점들을 바로잡는데 힘을 기울여야 한다는 점을 인식하게 하는 것이 무안지역 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의 특성 중의 하나이기도 합니다. 배상옥 대접주는 동학농민군을 이끌고 나주를 향해 진격하였다가 1894년 11월 17일경 나주 외곽 30여 리 지점에 있는 고막포(古幕浦, 당시 무안현 금동면, 현재 함평군 학교면 고막리)와 고막원(현재 나주시 문평면) 주변에 모여들었다고 합니다. 이에 나주목사 민종렬은 나주 수성군에게 출동명령을 내려 동학농민군을 공격하였지요. 공격해오는 관군을 피해 고막교를 건너던 동학농민군들은 때마침 밀려든 조수로 물이 넘치는 바람에 다리 밑으로 빠져죽기도 했다고 합니다. 결국 배상옥 대접주를 포함한 농민군은 해남 또는 완도로 피신했고, 배상옥 대접주는 이후 밀고로 붙잡혀 현장에서 처형되었다고 합니다. 배상옥 대접주는 워낙 위험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일본군에 의해 현장에서 처형되었으며 전봉준과 같은 1,000냥의 현상금이 걸려있었다는 사실로 미루어 전라도 서남해안의 거괴(巨魁)라는 표현이 합당하다 할 것입니다. 배상옥 대접주가 처형되었다는 소문이 퍼지자 애달픈 마음이 담긴 “상옥아 상옥아 배상옥아, 백만 군대 어데 두고 쑥국대 밑에서 잠들었나”라는 노래가 불러졌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문) 말씀을 들으니 답답하기 그지없습니다. 한국사적으로는 근·현대 민족민주운동의 백두대간이고, 동아시아 혹은 세계 근대혁명사에서는 아시아와 유럽을 가르는 우랄산맥, 인도와 중국을 가르는 히말라야 산맥에 비견해야 마땅한 거대한 준령(峻嶺)인 동학농민혁명을 전라도 군현의 작은 산봉우리 정도로 축소해왔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던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극심한 부침(浮沈)이 안타깝기만 합니다. 어쨌거나 회장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배상옥 대접주님은 전라도 서남부지역 동학농민혁명사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분이신데 그 역할이 역사의 뒤안길에 암장(暗葬) 당해온 것이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이런 연유로 무안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에서 배상옥 대접주님에 대한 기념사업 추진의 필요성을 강하게 제기하는 것은 물론이고 그 추진에 대한 강한 의지를 피력하신 것으로 여겨집니다. 회장님 뜻에 깊은 공감을 표합니다. 구체적으로 배상옥 대접주님과 관련하여 어떤 형식 혹은 내용의 선양사업을 기획하고 계시는지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전라도 무안 하면 떠오르는 고막포 전투에 대해서도 말씀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답) 저는 배상옥 대접주가 전봉준 장군이나 김개남 장군 못지않게 동학농민혁명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인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서도 얘기했습니다마는 영광, 함평, 무안, 해남, 완도, 진도 등 서남해안을 총괄한 분이 배상옥 대접주였습니다. 배상옥 대접주님이 지금의 완도에서 체포되었는데, 이것 또한 그쪽에 연고가 있어서 그쪽으로 피해갔을 것이다 이렇게 얘기되고 있지요. 또 구전에 의하면 배상옥 대접주가 백마를 타고 다녔는데, 그때가 30세였다고 해요. 그런 걸 봐서는 아주 큰 세력을 거느린 대단한 장군이었다고 봐요. 이런저런 구전들이 있는데 남아있는 기록들이 많지 않아 배상옥 대접주에 대한 연구나 기념사업들이 활성화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점 못내 아쉽습니다. 그래서 최근에는 배상옥 대접주님에 대한 기념사업의 바탕을 마련하기 위해 학술세미나 등 여러 사업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지난번에는 목포지역에서 활동하는 ‘갯돌’이라는 극단에서 배상옥 대접주님을 주인공으로 창작한 연극을 무대에 올리기도 했습니다. 현재 무안기념사업회는 전라남도와 함께 나주, 무안, 함평 이렇게 광역으로 통합하여 배상옥 대접주님 관련 기념사업의 방안을 모색하고자 논의하고 있습니다. 무안지역에는 해주최씨, 나주김씨, 달성배씨 이렇게 세 가문이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무안지역에서 그동안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한 참여자 중 해주최씨 가문과 나주김씨 가문에서는 기념사업을 해왔는데 달성배씨 가문에서는 그렇다할 기념사업을 추진하지 못했습니다. 앞으로 전라남도는 물론이고 무안군 등 관계기관과 협력하여 배상옥 대접주님과 관련하여 기념사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면서, 한편으로 무안동학농민군의 최대의 격전지였던 고막포 전투와 관련된 기념사업도 적극적으로 모색하여 추진해나가고자 합니다.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났던 1894년 당시 고막포는 무안군이었는데, 지금의 행정구역상으로는 함평군으로 속합니다. 행정구역이 달라지다보니 기념사업을 하는 것에 있어서도 어려움이 적지 않습니다. 무안지역에서는 기념사업을 하자고 하면, 고막포는 함평군 관할인데 우리가 왜 그곳에 기념사업을 하느냐고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고, 함평 사람들은 동학농민군이 많이 희생된 고막포전투에 대해 아직은 인식이 낮은 편이고.... 이런 저런 어려움이 많습니다. 저는 배상옥 대접주님과 고막포 전투를 빼버리면 무안지역 동학농민혁명의 의미가 크게 약화될 수밖에 없다 이렇게 강하게 주장을 해서 지난해인 2021년에는 무안군, 나주시, 함평군이 함께 관심을 가지고 힘을 한데 모아 고막포전투 기념제를 추진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고막포전투지에 표지석도 세우고 장차 국가사적으로 등록해나가는 사업을 적극적으로 추진해나가고자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함평군과 나주시와도 협력을 해야 할 것이고 전라남도와도 협의를 해나가야 할 것으로 봅니다. 또 한 가지, 무안지역 동학농민혁명에서 중요한 일이 더 있습니다. 지난 4월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김응문 일가의 유골이 무안군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묘지를 조성하고, 현창비를 건립하는 사업도 추진하려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문) 회장님, 말씀하신 것처럼 지난 4월 28일과 5월 25일 갑오년 당시 무안에서 접주로 활동했던 김응문 일가의 유골이 몽탄면 차뫼마을 선산 등지에서 발굴되었지요? 회장님께서 유골을 발굴하는 사업에도 참여하셨고, 그 이후 유골조사 등을 추진하기 위해 구성된 ‘김응문일가유골특별위원회’ 위원으로도 활동하고 계시는데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김응문 일가(一家)의 유골 발굴 경위에 대해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답)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김응문(金應文 1849~1894)은 나주와 무안지역 향반(鄕班) 출신으로, 집안이 어려운 환경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사회의 부정부패에 맞서 동학농민군으로 활동하였다고 합니다. 김응문 일가는 김응문(金應文)을 비롯하여 김응문의 둘째 아우 김효문(金孝文, 1851~1894)과 막내(넷째) 아우 김자문(金子文, 1868~1894) 그리고 김응문의 큰아들 김여정(金汝正, 1867~1894)이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였습니다. 1894년 3월 백산대회 때 김응문 일가는 배상옥 대접주 등 무안의 장령급 15명과 함께 참여하였고, 1894년 11월 나주성 공략을 위해 나주, 함평, 해남, 진도 등 전라도 서남해안 지역의 동학농민군과 합세하여 치열하게 고막포전투를 치렀지만 결국 패하고 말았습니다. 이후 동학농민군은 사방으로 흩어졌지요. 김응문 일가 또한 김응문의 장남 김여정의 처가(妻家)가 있는 함평에 숨었다가 체포되었고, 1894년 12월 8일 김응문과 김자문, 김여정이 무안관아에서 참수(斬首)되었고, 나흘 뒤인 12월 12일에 다른 곳에 피신해있던 김효문도 붙잡혀 처형되었습니다. 처형된 후 시신의 전부를 수습하지는 못하였으나 김응문의 집안이 향반으로서 지역에서 덕을 쌓고 살았던 터여서 김응문의 머리를 거두어 월구정 둔덕에 작은 무덤을 만들었고, 막내 동생인 김자문도 이와 같은 방법으로 김응문 묘 바로 밑에 묻었죠. 둘째 동생인 김효문은 무안군 몽탄면 사천리, 김응문의 장남인 김여정은 무안읍에 묘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이후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김응문의 증손자 김성황 선생님이 1992년도에 증조모 함평노씨와 증조부 김응문의 묘를 정비하였는데, 옹기 안에 담긴  유골(머리)이 깨끗하게 보존되어 있었습니다. 그러한 과거의 경험을 기억으로 2020년 김성황 선생님이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했던 선조들의 묘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어서 공동묘역을 조성하여 추모공간으로 조성할 것을 발의하고, 무안기념사업회에도 함께 해주길 요청해왔습니다. 그렇게 하여 올해 4월 28일 유체 발굴이 진행되었는데, 무안군기념사업회를 비롯하여 동학농민혁명 전공연구자, 방송 관계자도 함께 유해발굴에 참여토록 하였고 그 일환으로 원광대 김봉곤 연구교수, KBS방송국 기자도 참여하여 유족과 함께 유체를 발굴하였습니다. 발굴 당시 김응문의 두개골이 기왓장에 덮인 채 온전한 상태로 발굴되었고, 김효문의 두개골은 거의 산화된 상태였으며, 김여정의 유골은 흔적이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한 달 정도 지난 후인 지난 5월 25일 2차 유체 발굴을 추진한 결과 김자문의 두개골이 산화하지 않고 온전한 상태로 발굴되었습니다.



 

문) 그동안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의 유골은 1995년 일본 북해도대학에서 발견되어 1996년 국내로 봉환된 동학농민군 지도자 유골이 유일했습니다. 그런데 일본에서 발견되어 국내로 봉환된 유골은 그 신원을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2019년 전주시와 사단법인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에서 전주시 완산구 완산동에 녹두관을 조성하여 그곳에 모셨습니다. 따라서 일본 북해도대학에서 모셔온 무명동학농민군 지도자 유골 이후 이번에 발굴된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김응문 일가의 유골은 신원이 확인된 첫 번째 동학농민혁명 지도자인 셈입니다. 구전이나 사료 등으로 신원이 확인된 최초의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유골이라는 점에서 아주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무안군기념사업회에서는 이번에 발굴된 김응문 일가 유골에 대해 어떤 후속 기념사업을 계획하시고 있는지요?


답) 김응문 일가 유골을 발굴하면서 단순히 묘만 조성해서는 의미가 없다. 따라서 현창사업을 제대로 해보자는 의견이 제기되어 현창비 건립 추진위원회를 구성하였습니다. 이후 현창비를 김응문 생가인 차뫼마을 앞 대로변에 건립하였고 현재는 발굴된 김응문 일가 유골에 대한 제반의 조사 등을 기념재단과 함께 진행하고 있습니다, 기념재단 산하에 특별위원회를 구성하여 의미 있는 추모 및 현창사업 추진의 방안을 강구하고 있습니다.



문) 저희 기념재단에서도 특별위원회를 구성하는 등 적극적으로 발굴된 김응문 일가 유골에 대한 추모사업 또는 현창사업 방안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지난 1995년에 일본 북해도대학에서 발견되어 그 다음해인 1996년 국내로 모셔온 무명동학농민혁명지도자 유골의 경우 3D촬영 후 상반신을 청동으로 복원하여 전주역사박물관과 기념재단에 모시고 있습니다. 그때도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유전자 감식을 의뢰하였으나 30~40대 몽골로이드인, 남성이라는 사실 이외에 신원은 특정하지 못하였습니다. 이런 경험들을 바탕으로 이번에 발굴된 김응문 일가 유골은 보다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후속조치가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밖에도 동학농민혁명 정신선양을 위한 여러 사업들을 계획하고 계실 터인데, 무안기념사업회에서 추진하려고 계획하고 있는 사업들에 대해서도 말씀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답) 무안지역은 예부터 농민운동이 많이 일어났던 지역입니다. 일제 강점기 시 대표적인 농민투쟁인 암태도 소작쟁의(1923년), 해방후 농민조합운동, 농촌근대화 이후 농민권익실천투쟁, 민주화운동과 연결된 대정부 농민투쟁 등도 저는 다 같은 맥락이라고 생각합니다. 두말할 것도 없이 그 뿌리가 동학농민혁명이라고 저는 생각하는 것이죠. 그래서 저는 동학농민혁명에서부터 일제강점기, 해방이후 70년대, 80년대를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농민운동을 하나의 맥으로 조망할 수 기념관을 무안군에 건립하려는 꿈을 갖고 있습니다. 역사적인 사건들을 보고 느낄 수 있게 해야만이 역사가 현재화가 되고, 후세에 길이 이어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일들의 핵심으로 배상옥 대접주님의 활약상과 이번에 발굴된 김응문 일가 유골이 자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동학농민혁명이 지난 일이 아니라 ‘지금, 여기’, 우리의 삶의 이정표 확인의 기준이 되고, 우리의 미래를 열어나가는 밑바탕이 될 것이라서 제 나름대로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나갈 생각입니다.



 

문) 네, 회장님께서 아주 중요한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일제강점기 때 암태도 소작쟁의투쟁, 1970년대 농민생존권투쟁과 민주화운동으로 유명한 농민운동을 동학농민혁명과 연계시키는 기념관 건립 구상은 너무나 특색 있고 뜻있는 사업이라고 생각됩니다. 회장님께서 뜻하시는 기념관 건립사업이 힘 있게 추진되기를 온 마음으로 기원하겠습니다. 바쁘신 중에도 긴 시간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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