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전봉준」을 찾아서
일시 : 2023. 5. 2.(화)
장소 : 국회의원회관 김두관 의원실
소식지 『녹두꽃』(통권52호) 지역대담에 사단법인 전봉준(서울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김두관 이사장을 모셨다. 2021년 4월 사단법인 전봉준에 취임한 김두관 이사장은 경남 남해에서 출생하여 이어리 이장(1988, 남해군 고현면), 제38~39대 남해군수(1995~2002), 대한민국 제5대 행정자치부장관(2003), 대통령비서실 정무특별보좌관(2005.5.~2006.1), 열린우리당 최고위원(2006) 등을 역임하였다. 대한민국 국회 제20대 경기 김포시갑, 더불어민주당), 제21대 국회의원(더불어민주당, 경남 양산시 을)으로 활동하고 있다.

김두관 (사)전봉준 이사장
문)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소식지 『녹두꽃』(통권 52호) <지역대담>에 사단법인 전봉준(서울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김두관 이사장님을 모셨습니다. 국정 관련 업무 등으로 바쁘실 텐데 이렇게 귀한 시간을 내주셔서 고맙습니다. 먼저 녹두꽃 독자들에게 본인 소개 부탁드립니다.
답) 녹두꽃 독자 여러분 반갑습니다. 사단법인 전봉준 이사장직을 수행하고 있는 김두관입니다. 여러분들 아시다시피 저는 현재 더불어민주당 경남도당 위원장으로 지역구는 양산시 을을 맡고 있습니다. 제가 동학농민혁명에 관심을 두게 된 것은 중·고등학교 다닐 무렵부터니까, 대략 반세기를 거슬러 올라가네요. 혁명 100주년 전후 시기 故 이이화 선생님과 중국으로 독립운동 관련 역사 세미나를 다니면서 전봉준 사상에 숭고한 뜻을 다시 새겨듣는 중요한 계기를 갖기도 했습니다. 부족한 저에게 사단법인 전봉준 이사장을 맡아달라는 요청이 있었을 때 처음에는 저보다 더 훌륭하신 분들이 많다고 고사하였으나, 대학 시절에 졸업논문을 전봉준 장군과 동학농민혁명 관련 주제로 썼기 때문에 ‘이것도 인연이구나’라는 생각으로 이사장직을 수락했습니다.

 
문) 네, 이사장님. 재작년으로 기억하는데, 저도 사단법인 전봉준 자문위원으로 이사장님께 위촉장을 받았습니다.(웃음) 현재 전국 각 지역에서 동학농민혁명 정신선양사업을 추진하는 단체가 35개인데, 사단법인으로 인가를 받아 활동하는 단체가 14개이고, 임의단체로 활동하는 단체가 21개입니다. 이들 단체 중에서 중앙부처(문화체육관광부)에 인가를 받은 법인은 사단법인 전봉준, 그리고 동학농민혁명유족회 두 개 단체입니다. 중앙부처에 법인으로 인가를 받은 단체는 지회 혹은 지부를 두어야 가능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만큼 단체 설립에 어려움이 많았을 터인데, 사단법인 전봉준 설립 과정에 대해 말씀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답) 법인을 설립한 배경은 2018년 4월 24일 전봉준 장군 순국일에 맞춰 서울 종로구 서린동 서울지하철 종각역 5~6번 출구 앞에 ‘녹두장군 전봉준’ 동상을 건립하고 제막식을 성대하게 거행했었지요. 이 동상 건립이 ‘사단법인 전봉준’의 설립 배경입니다. 일제강점기와 해방 이후 국내외적인 정치적 혼란으로 지난 한 세기 동안 동학농민혁명이 전라도 사건 혹은 반란사건 등으로 왜곡․축소되어 왔잖아요? 이런 속에서 대한민국 수도 서울 한복판인 종로에 전봉준 장군 동상이 세워졌다는 것은 대단히 큰 의미를 갖습니다. 특히 동학농민혁명은 전라도 일부 지역의 사건으로 왜곡되고 축소된 채 역사의 뒤안길에 버려져왔지만, 사실 동학농민혁명은 경상도와 충청도는 물론 경기도, 강원도, 북한지역까지 전국적으로 농민과 몰락한 양반들이 당시 부패한 중앙집권세력과 일제의 국권침탈에 결연히 항거한 범민족적인 반일의병이었잖습니까? 따라서 늦었지만 유럽의 프랑스혁명처럼 우리나라에서 전 국민적 동참으로 이어진 혁명정신을 우리 세대에서 바로 잡아야겠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의 전국화, 동학농민혁명 위상과 그 의미의 대중화를 위해 서울에 동학농민혁명 정신선양사업을 추진하는 단체 설립의 필요성이 제기되었고. 그 뜻을 모아 사단법인 전봉준을 설립하게 되었습니다. 사단법인 전봉준은 광역지부로 충남지부(태안동학농민혁명유족회), 충북지부(충북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전남지부(장성동학농민혁명유족회), 경기지부 이렇게 총 4개 지부가 있습니다. 앞으로 경상권과 강원권에 각각 지부를 설립하기 위해 힘을 기울여나갈 생각입니다.

 
문) 단체 설립 이후 매년 4월 24일 전봉준 장군 순국일에 추모제를 거행해온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 밖에도 동학농민혁명 정신선양을 위해 다양한 사업을 추진해온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점에 대해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답) 문 부장님 얘기처럼 매년 4월 24일 전봉준 장군 추모제를 거행해왔습니다. 1894년 한 해 동안 조선은 물론이고 동아시아 정치정세를 격동시켰던 동학농민혁명은 그해 12월 3일(음력 11. 7.)과 12월 4일(음력 11. 8.) 공주 우금티에서 일본군과 관군 연합부대를 맞아 치열한 격전을 치루었으나 일본군의 근대적인 신무기를 극복하지 못하고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이후 후퇴를 거듭하다가 전라북도 금구·원평 구미란마을에서 재기의 전투를 치루었는데 이 전투에서 다시 패하였고, 그 이튿날 인근 태인현으로 후퇴하여 다시 접전했으나 또 다시 패배하여 동학농민군은 이곳에 주력부대를 해산하였습니다. 그렇게 해서 전봉준 장군은 후일을 도모하기 위해 입암산을 타고 순창 피노리로 몸을 피했으나 동료의 밀고로 관군에게 체포되었습니다. 이후 나주 감옥으로 이송되었다가 서울 남산자락에 자리잡고 있었던 일본 영사관 순사청으로 압송되어 지금의 종로거리에 있었던 의금부 권설재판소에서 재판을 받고 4월 24일(음 3. 30.) 순국하셨습니다. 이후 123년이 지난 2018년 4월 순국일에 맞춰서 종각역 5~6번 출구, 영풍문고 빌딩 앞에 녹두장군 전봉준 동상을 건립하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故 이이화 역사학자께서 (사)전봉준장군동상건립위원회 이사장을 맡아 대업을 이루셨지요. 이 동상이 건립되기까지 우리 문병학 부장님이 아주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생전에 이이화 선생님께서 사석에서도 얘기하신 적이 있었고, 선생님이 유작으로 남기신 『동학농민혁명사』(전 3권)에도 “박원순 서울시장이 전주를 방문하였을 때 문 부장이 서울 종로에 전봉준장군 동상 건립을 아주 감동적으로 제안하여 부지를 마련할 수 있었다.”고 기록하셨더라구요. 어쨌거나 이런저런 힘들이 한데 모아져 동상을 건립할 수 있었지요. 더군다나 어느 한 사람 한 단체의 기금이 아닌 범국민 모금으로 건립되었다는 것은 특기할 만한 일임에 틀림없습니다. 이는 분명 전봉준 장군께서도 “참으로 잘 했다”라고 하실 겁니다. 그것이 전봉준 사상이라 생각하고요. 또한, 우리 사단법인 전봉준은 법인이사와 동시에 공동대표직을 수행하는 전성준 교수(국민대)는 전봉준 장군의 양증손이고, 사단법인 전봉준장군기념사업회 사무총장으로 해마다 전라북도 정읍소재 전봉준 장군 단소에서 추모제를 지내고, 같은 날 저희 단체도 서울 종로구 소재 전봉준 장군 동상 앞에서 동시에 추모행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실 현재 동학농민혁명유족회 및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의 회원분들이 연로하신 대 선배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이분들의 생각과 요구를 경청하여 깊이 새겨서 갑오선열께서 피와 목숨으로 지키려했던 동학농민혁명 사상은 후대에 길이 계승되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우리 사단법인 전봉준에서는 소통과 화합을 중심으로 젊은 사람들에게 좀 더 폭넓은 행보를 하기 위해 회원들의 연령대를 과감하게 낮추어 현재 30대와 40대 회원을 영입하는데 힘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문) 맞습니다. 대한민국 수도 서울 종로 네거리에 역사 인물 세 분이 있습니다. 광화문 바로 앞에 세종대왕 동상이 서 있고, 그 앞에 이순신 장군 동상이 서 있습니다. 말하자면 관의 대표 세종대왕, 군의 대표 이순신 장군 이렇게 서 있는 것이지요. 거기에 비로소 2018년에 민의 대표 녹두장군 전봉준 동상이 건립되게 된 것이지요. 이것은 말 그대로 역사적으로 참 의미 있는 일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동상을 건립한 후 자연스럽게 (사)전봉준장군동상건립위원회의 향후 전망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었고, 그 연장선상에서 문화체육관광부의 인가를 받아 ‘사단법인 전봉준’이 창립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창립 이후 전봉준 장군 추모제 등을 거행해오면서 한편으로는 중장기적으로 서울·경기지역에 ‘전봉준 공원 조성계획’을 계획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점에 대해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답) 1895년 음력으로 3월 30일, 양력으로 4월 24일 동학농민혁명 최고 지도자 녹두장군 전봉준 동상이 장군께서 순국하신 조선시대 때 전옥서 터에 2018년 4월 24일 동상건립 제막식 때 참석하셨던 어떤 어른 한 분이 “전봉준 장군이 드디어 서울에 입성하셨다”라고 감격하시더라고요. 이후 설립된 우리 사단법인 전봉준은 매년 지속적으로 그 동상에서 추모제를 거행해왔습니다. 앞으로 동학농민혁명의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기 위한 다양한 사업을 기획하여 보다 많은 시민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힘써나갈 생각입니다. 아직은 구상단계이기는 합니다만 수도권에 ‘전봉준 공원’ 혹은 ‘동학농민혁명박물관’ 건립사업을 추진해나갈 계획입니다. 전북 정읍 황토현 일대에 조성된 동학농민혁명기념공원은 나름의 의미가 있지만 동학농민혁명의 전국적 위상은 물론이고 동아시아․세계사적 의미를 확산시켜나가는 것에는 일정하게 한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동북아시아 중심국가인 대한민국 수도권에 동학농민혁명 기념시설물을 건립하여 그 정신 계승․발전에 기여해나갈 계획입니다. 유동인구가 많고 국내외 관광객의 접근성이 매우 우수한 장소에 동학농민혁명의 숭고한 정신을 잘 담아낸 ‘전봉준 공원’이나 ‘동학농민혁명박물관’건립사업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려면 범국민적인 관심과 성원이 전제되어야 할 것입니다. 정부와 광역 및 지방자치단체는 물론이고 범국민적인 관심과 성원을 이끌어 내기 위해 우리 단체에서는 혼신의 힘을 기울여나갈 생각입니다.
문) 서울․경기지역에 ‘전봉준 공원’(가칭)‘동학농민혁명박물관’(가칭)이 조성된다면 더없이 좋을 것 같습니다. 동학농민혁명은 일제강점기, 해방 이후 민족 내부의 극심한 좌우 대립, 한국전쟁으로 이어지면서 세계사적 차원에서 구축된 동서냉전체제, 이후 세계사를 꽁꽁 얼어붙게 만든 냉전의 구도 속에서 전라도 사건 혹은 반란 사건 등으로 치부된 채 20세기 한 세기 동안 역사의 뒤안길에 버려져 왔습니다. 그러다가 1994년 동학농민혁명 100주년을 기점으로 동학농민혁명의 한국사적 의미는 물론이고, 동아시아․세계사적 의미와 그 위상이 복원되었습니다. 그 결실로 2004년 특별법, 2019년 국가 기념일이 제정되었지만, 동학농민혁명 정신계승과 급변한 현시대 상황에 맞게 현재화하는 것은 이제부터가 시작이라고 생각됩니다. 이런 측면에서 수도권에 ‘전봉준 공원’혹은 ‘동학농민혁명박물관’이 조성된다면 더없이 좋을 거라 생각됩니다. 꼭 성사되기를 간곡하게 기원하겠습니다.
답) 맞습니다. 특별법과 국가 기념일까지 제정되었으나 아직도 동학농민군의 헌신적인 투쟁을 잘못 알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나라의 역사적 정통성은 1894년 동학농민혁명을 시작으로 3·1운동, 4·19혁명, 5·18민주화운동, 6월 민주항쟁, 촛불혁명으로 면면히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런 사실을 범국민적으로 확산시키는 일이 참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 국제포럼이나 심포지움 개최 등을 통해 세계적으로 동학농민혁명을 알리고, 동학농민군과 전봉준 장군의 의로운 항쟁을 대하 드라마나 뮤지컬 등 격조 높은 문화예술작품으로 제작하는 데 힘써 나갈 생각입니다. 한편,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여 국권을 침탈한 일본군과 맞서 싸운 동학농민군을 독립유공자로 서훈하는 일에도 관심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힘을 보태나가겠습니다.

 
문) 너무 분위기가 무거워졌습니다.(웃음) 저의 기억이 명확하지 않는데, 아마도 사단법인 전봉준 이사장으로 추대할 때 말씀하셨던 것 같은데요.. 이사장님이 동아대학교 학부인가, 대학원 때였던가? 졸업논문이 동학농민혁명과 관련된 주제였다고 말씀하셨던 것 같습니다.
답) 맞아요. 이사장직을 맡으면서 제가 그런 얘기를 했었습니다. 당시 저는 경상도 섬인 남해에서 가난한 어부의 아들로 태어나 남해종합고등학교를 나와 서울소재 국민대학교에 합격했으나 등록금 문제로 진학을 포기해야 하는 어려운 가정 형편이었습니다. 생활고가 조금 나아졌을 무렵 부산 소재 동아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였습니다. 당시 학사 졸업으로 논문을 쓰는데 전봉준 장군 지도자로서의 면모를 「동학농민혁명이 한국 근대화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연구」라는 주제로 작성했습니다. 당시만 해도 동학농민혁명을 일종에 ‘난’이라고 터부시하는 경향이 높았는데, 교수님이 ‘동학난’을 ‘동학혁명’으로 바꿔놓은 것을 칭찬해주신 기억이 납니다. 이후 전봉준 장군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고향인 시골 남해군으로 내려가서 어린 나이에 이장을 하면서 남해군민의 계몽활동과 군민들 소식지로서『남해신문』을 만들었습니다. 1995년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남해군수’로 당선되어 36세 최연소 지방자치단체장이 되었고 이어 제2회 지방선거에도 당선되었습니다. 많은 선거 출마로 당선과 낙선을 통해 이후 정치 행보는 아시는 바와 같습니다.
문) 끝으로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유족분들이나 전국 각 지역에서 동학농민혁명 정신선양사업 추진을 위해 애쓰시는 분들께 한 말씀 해주시기 바랍니다.
답) 지금까지 ‘동학난을 일으킨 자손들이다’라고 일본 제국주의자들로부터 목숨을 붙이려고 이름조차 바꿔가며 살아오신 유족분들과 과거 정부로부터 손가락질 받지 않으려 남들에게 목소리 내지 못하고 살아오신 분들에게 심심한 위로와 함께 진심을 다하여 경의를 표합니다. 이제는 떳떳하게 국가가 인정하는 대한민국의 애국자 자손들입니다. 각 지역마다 동학농민관련 단체가 많은데 앞서 말씀드린 것과 같이 회원분들이 대체로 연로하십니다. 우리는 우리가 스스로 역사를 지키고 인식하지 않으면 왜곡된 역사가 어느새 우리의 발목을 잡을 것이라 생각되어 젊고 유능한 인재들을 많이 영입하셔서 보다 활성화가 이루어지기를 기대합니다. 저는 현재 국회의원 지역구가 경상남도 양산시입니다. 사단법인 전봉준 경남지부를 창립하여 동학농민혁명의 역사적 의미와 그 위상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갑오선열의 숭고한 정신을 범국민적으로 확산하는 데 모범을 보여드리도록 힘쓰겠습니다.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소식지 『녹두꽃』에 귀한 지면을 마련해주시고, 이렇게 직접 국회까지 내방해 주신 것에 대해 감사드립니다.
문) 이사장님 긴 시간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고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