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혁명정신을 이어받아 3대에 걸친 구국운동을 전개하다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후손 최기주

 
동학농민혁명 정신은 비단 1894년에 그친 것이 아니라 3·1운동과 4·19혁명, 5·18민중항쟁의 정신으로 이어져 내려와 우리나라 민주화정신의 뿌리가 되었다. 전라북도 임실군 쌍암리 운암초등학교와 교문 왼편에는 운암 3대 운동기념비(을미3·1운동기념비, 갑오동학농민혁명기념비, 무인멸왜(운동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이 기념비들은 임실에서 구국운동에 참여한 모든 이들을 위한 것으로 그 중에서 특히 최기주 선생님의 선조님들이 주도적으로 활동하셨다. 고조부께서는 임실의 동학농민혁명을 주도하셨으며, 증조부님께서는 접주로 활동하셨고, 배일사상을 단증 하는 삼화학교, 창동학교를 설립하였으며 3·1운동 당시 임시정부에 자금을 지원하셨다. 또한 조부께서는 무인멸왜운동에 참여하셨다고 한다. 이렇게 동학농민혁명의 정신이 대대로 이어져 내려와 구국운동으로 전개되어 왔음을 몸소 보여주신 최기주 선생님의 선조님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도록 하자.
문) 본인의 소개 부탁드립니다.
답) 저는 34년간 공직생활을 마치고 현재는 고향에서 선산을 돌보고 자그마한 농토를 경작하면서 지내고 있는 최기주라고 합니다. 2004년에 ‘참여자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발족되면서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유족 등록신청을 하게 되었는데 임실지역에서는 제가 대표가 되어 42명의 참여자를 발굴하고 그분들의 유족 100여 명을 참여자 유족으로 등록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임실군 유족회장을 맡게 되어 지금까지 역할을 수행해오고 있습니다.
문) 고조부님과 증조부님께서 어떤 계기로 동학농민혁명에 참가하셨습니까?
답) 저희 고조부께서는 임실의 대농이셨으며 덕망이 높아 주민들의 지지를 받으셨다고 합니다.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기 20여 년 전인 1873년에 최시형교주께서 교세를 확장하기 위하여 임실지역을 방문하셨는데 당시 고조부님이 최시형 교주님의 말씀을 듣고 사위와 아들 3형제, 그리고 지역에서 학문을 닦으시던 분들을 모시고 보름동안 최시형교주님의 설법을 듣게 되었고 그 길로 동학에 입도하셨다고 합니다. 그 뒤로 임실지역에 동학의 교세가 점점 확장되어 무려 2천여 세대가 동학을 신봉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일찍이 동학에 입도하셨기 때문에 동학농민혁명에도 처음부터 참여하시게 되셨습니다. 고창의 무장기포와 백산대회에 참여하셨으며 임실지역에서도 3월 고조부님의 주도로 기포했다고 합니다. 임실지역은 동학의 교세가 워낙 강했고 관에서도 협조적이어서 아무런 전투없이 7월에 집강소가 설치되었습니다. 즉 무혈입성을 한 것이지요. 집강소 설치 후에는 증조부께서 접주로 활동하시면서 불합리한 세금징수를 개혁하는 등 민정을 다스리셨다고 합니다. 고조부님의 사위는 남원의 접주로 활약하셨는데 남원을 점령하고 경상도 쪽으로 진출하는 도중 여원치에서 전투가 벌어져 사위와 아들 3형제가 함께 전투에 참여하였으며, 고조부께서는 전투에 필요한 무기와 식량을 지원해주셨다고 합니다. 이후 9월 삼례에서의 재봉기에 참여하시고 공주 우금티전투에 참여하였습니다. 그러나 당시 일본군 한명이 농민군 200명과 맞먹는 전투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지 않습니까? 결국 동학농민군은 우금티에서 결정적인 참패를 당하여 쫓기게 되고 임실지역에서 참여한 접주 분들은 해문사에서 약 6년 간 은거생활을 했다고 합니다. 동학농민혁명 이후 타 지역에서는 많은 분들이 희생당했는데 임실은 직접적인 전투가 없다, 고조부님께서는 동학농민혁명이 마무리 된 뒤 4년 후에 돌아가셨지만 이후에도 증조부님과 조부님께는 계속적으로 구국운동을 하셨습니다.
문) 증조부께서 접주로 집강소를 다스렸다고 하셨는데 어떤 일을 하셨습니까?
답) 저희 집안에 노복을 10명 정도 거느리고 있었는데 이들을 전부 평민으로 해방시켜주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농민들이 활동하기 편하도록 단발을 하도록 하였으며 당시는 백의민족이라 하여 항상 흰옷만을 고집하였는데 흰옷을 입는 것은 농사일을 하는데 굉장히 불편함이 따랐습니다. 그래서 색이 들어간 옷을 입도록 하셨다고 합니다. 집강소를 운영하시면서 신문화운동을 함께 전개하셨던 것입니다.
문) 선조님들께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한 사실을 어느 분께서 주로 말씀해주셨을까요?
답) 부친께서 명절 때나 가족모임 때면 으레 선조님들의 참여사실에 대하여 말씀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제 증조부님께서 오래 생존해 계셨는데 그분께 세배하러 가면 항상 자랑스럽게 참여사실에 대하여 이야기해주셨습니다. 그렇게 집안 어르신들께서는 임실지역의 동학농민혁명이 고조부님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아주 자랑스럽게 생각하셨습니다.
문) 증조부님과 조부님께서는 동학농민혁명 이후에 어떤 구국운동에 참여하셨습니까?
답) 증조부님께서 고조부님께 물려받은 자산으로 1905년에 임실군 청음면에 창동학교를, 그리고 전주 노송동에 산화학교를 설립하셨습니다. 이 학교들은 배일(排日)학교로 구국운동을 위한 후진양성을 목적으로 하였습니다. 3·1운동 당시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 중에 창동학교 출신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고 합니다. 이곳에서 배운 분들이 3·1운동에 많이 참여하셨던 것이지요. 그렇게 배일운동의 중심에 있었기에 일제에 의해 1909년에 폐교되고 말았습니다. 1919년에는 2월부터 전주에서 전라북도 대표들이 모여 3·1운동 계획 수립을 위한 회의를 열었는데, 증조부께서 임실군 대표 중 한사람으로 참여하셨다고 합니다. 임실에서의 만세운동은 3월 2일 운암리에서 가장 먼저 시작되어 약 50여 일간 지속되었습니다. 그토록 열성적으로 거사에 임했기에 주민 중 약 60여 명이 형을 받았고 증조부님과 함께 활동하시던 세분이 옥사하셨습니다. 계획을 자백했다면 고문이 심하지 않았을텐데 동료들을 감싸기 위해 더 모진고문을 당하고 돌아가신 것입니다. 다행히 증조부님께서는 화를 피하여 계속적으로 배일운동을 전개하셨고 자신의 전 재산에 주민들에게 모금한 돈을 더해 상해임시정부에 군자금으로 보냈다고 합니다. 그렇게 활동하신 사항을 일성록이라는 일기장에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두었는데 6·25 때 마을이 완전히 불타버리는 통에 함께 소실되고 말았습니다. 지금도 매우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조부님께서는 무인멸왜운동(천도교에서 1936년부터 일제의 패망과 족구의 광복을 기원하는 기도문을 매일 아침, 저녁(食告) 때 외도록 하고 유사시에 대비하여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하였던 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시다가 체포되어 고문을 당하였습니다. 이후 다시 체포될 것을 염려하여 친구 분 댁 뒷산에 땅굴을 파고 3년간 숨어 사셨다고 합니다. 그러나 모진 고문으로 인해 장독이 올라 해방 후 6.25 이듬해에 돌아가셨습니다.
문) 운암초등학교 앞의 <운암 3대 운동 기념비>는 갑오동학농민혁명기념비, 을미 3.1운동기념비, 무인멸왜운동기념비가 나란히 세워져 있습니다. 이들은 어떻게 한 자리에 세워지게 되었습니까?
답) 저희 부친께서는 고조부님을 비롯하여 증조부님, 조부님 그리고 함께 활동하신 여러 선인 분들의 업적을 그냥 잊혀지게 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셨습니다. 그래서 유족들을 한 자리에 불러 모아 기념비를 세우자고 제안하셨고 회의 끝에 성금을 모아 기념비를 세울 것을 결의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뜻을 당시 임실 군수님께 말씀드렸더니 물심양면으로 많은 도움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기념비를 세울 장소가 마땅치 않아 어느 곳에 비를 세울 것인지 고민하고 있을 때 운암초등학교 교장선생님께서 학교 앞에 세우는 것이 좋겠다며 선뜻 학교 부지를 제공해주셔서 운암초등학교 교문 왼편에 비를 세우는 거국적인 행사가 되었고, 현재는 현충시설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비가 세워진지 40여 년이 되어 기와가 떨어져 나가고 담장이 흐트러지는 등 훼손된 부분이 많아 작년에는 철망을 제거하고 자연과 조화가 되도록 정화사업을 하였습니다.
문) 선조님들께서 3대를 이어 구국운동에 참여하신 것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고 계십니까?
답) 후손으로서 아주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분들의 희생이 세월에 묻히지 않고 후대까지 업적이 알려질 수 있도록 그리고 누가 되지 않도록 우리 자손들이 더 행동을 가다듬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저희 부친과 제 증조부께서 그러셨던 것처럼 선조님들의 동학농민혁명 참여 사실을 후손들에게 알려주고 싶습니다.
문)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에 바라는 점이 있으십니까?
답) 기념재단에서 동학농민혁명 선양사업을 진행하는 단체에 해마다 지원금을 교부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역 유족회도 기념사업회와 마찬가지로 동학농민혁명 정신선양을 위하여 여러 활동을 전개하고 있지만 지원 대상에 포함되지 않은 점이 아쉽습니다. 모든 부분에 지원이 가능한 방안을 세우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