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소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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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가을 61호
백산대회의 실체를 찾아서

백산대회의 실체를 찾아서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임형진


  동학농민혁명은 약 10개월에 걸쳐 전라도를 중심으로 거의 전국에서 전개되었다. 그러나 그 혁명의 열기가 미친 파급과 역사적 영향력에 비해서 아직도 학계에는 연구되어야 할 과제들이 무수히 많이 남아 있다. 그런 대표적인 사례가 백산대회이다. ‘앉으면 죽산 서면 백산’으로 유명한 백산대회는 동학농민혁명군이 최초로 형성된 곳으로 알려져 있다.


  백산은 갑오년 1월의 고부기포 때부터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었던 것이다. 그곳은 비록 47미터의 나지막한 야산에 불과하지만 배들평야와 김제 만경평야가 아득하게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지역이다.


  그곳은 동진강이 백산의 3면을 두루고 있는 배들평야에서 가장 높은 곳이었기에 이곳에서는 주변 관군의 모든 동향이 그대로 척후될 수 있는 천혜의 요새가 가능했던 것이다. 예로부터 백산은 서쪽으로는 부안, 남쪽으로는 고부, 동쪽으로는 태인, 금구, 원평, 전주로 통하는 교통의 요지이며, 남동쪽으로는 경사가 완만하나 북서쪽으로는 급경사를 이루고 있고, 앞으로는 동진강이 흐르고 있어 주둔과 방비에 적합한 군사적 요충지였다. 1894년 백산 위에는 소나무가 드문드문 서 있고, 좁은 길을 따라 산 위로 오르면 깊은 골짜기가 있어 수천 명이 숨어 있을 만하다고 하였다. 또한 이곳에는 해창이 있어 세곡 4천여 석을 저장해 놓았다.


  백산은 전략적 요충지로서의 충분한 지리적 위치를 가지고 있었기에 고부기포에서부터 전봉준에 의해 지휘부가 설치될 정도로 중요한 거점이었으며 혁명이 본격적으로 불붙은 3월에는 더욱 중요한 역할을 한 지역이다. 즉, 고부가 동학농민혁명의 전원지로서의 상징성이 있다면 백산은 농민혁명군의 위상이 갖추어진 대회였기에 동학농민혁명과 떼래야 뗄 수 없는 역사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백산대회는 그 실체가 정확히 드러나지 않고 있다. 일테면 그 대회 일자가 언제인지에 대한 정확한 고증과 학계의 일치된 의견도 존재하지 않는다. 더욱이 당시에 발표되었다고 알려진 격문과 4대 명의 등도 위작 논란의 대상이 되거나 혹은 백산대회가 아닌 다른 곳에서 발표되었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오지영의 『동학사』에서만 등장하는 백산대회는 심지어는 그 존재자체가 의심되기도 하고 있다. 모두가 앞으로 학계가 풀어야 할 과제들이지만 여기서는 몇 가지 점에 대한 고증 및 추정만을 하고자 한다.


  첫째 백산대회의 존재 유무이다. 시일의 차이는 있지만 대부분의 사료나 정황으로 보아 백산대회의 존재는 확실하다. 백산대회는 반드시 필요한 대회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상식적으로 봐도 전국적인 동학농민혁명을 추진한 전봉준에게 그에 동조하고 집결하는 군사들에게 대오를 편성할 대규모의 대회가 필요했을 것이다. 그리고 지리적으로 또는 전술적으로 유리한 곳을 택할 정도의 능력은 전봉준에게 있었을 것이다. 특히 무장포고문에 동의한 전라도 각 지역의 접주들과 농민군의 집결지가 필요했을 것이기에 어떤 형태로든지 대회는 열렸어야 했다.


  둘째, 정확한 대회의 일자는 언제였을까. 백산대회가 존재했다면 그 날짜는 언제였을까 역시 논란의 대상이다. 그 동안 백산대회는 3월 21일설부터 3월 25일설, 3월 26일설, 3월 27일설 그리고 3월 26일부터 29일까지 설 등이 존재했다. 그러나 백산대회는 당시 동학농민군의 이동경로를 추적해 보면 3월 26일 이후에 대회가 열렸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대열을 정비하고 군사적 지휘체계를 갖출 시간적 필요에 의해서 적어도 3월 29일까지는 열렸을 것이다. 이는 적어도 혁명에 동참한 34개 지역의 접주들이 집결한 시간과 그들을 무장시킬 시간 등이 소요되기 때문이다. 즉 격문과 4대 명의 및 12조의 기율을 제정하고 전열을 정비해 혁명군으로서의 대오를 정리했을 3월 26일부터 “제증소의”라는 동학농민군의 인장이 사용된 29일까지로 넓게 잡아야 할 것으로 사료된다.


  세 번째, 대회의 성격을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백산대회에서의 동학농민혁명군의 구성을 보면 고부기포와 무장기포, 그리고 백산대회로 이어지는 일련의 전개과정에서 지도부의 변화가 없었다. 동학농민군의 최고지도자인 전봉준을 비롯하여 최경선, 송대화 등이 고부기포를 주도하였으며, 이들은 모두 이후 전개되는 무장기포와 백산대회의 최고지도부로 여전히 추대되고 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고부기포와 무장기포 그리고 백산대회까지는 독립적인 사건으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동학농민혁명과정의 연속상에서 전개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실체 병력의 규모도 기록에 따라 차이는 나지만 대략 약 1만여 명 정도가 집결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따라서 이들을 통솔할 지휘체계는 물론 기율 등을 정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끝으로 백산대회의 논란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격문의 유무이다. 이 논란의 원인은 출처의 한계 때문이다. 그리고 무장기포에서 격문을 발표했는데 며칠 뒤에 바로 또 다른 격문을 발표했다는 것이 의문이라는 점 등 때문에 그 존재가 의심되었던 것이다. 확실히 오지영의 기록에만 실려 있는 백산대회의 격문은 많은 궁금증을 유발한다. 특히 백산대회의 격문은 다른 격문이나 창의문보다 지나치리만큼 현대적이고 사회과학적이라는 점이 그러한 의문을 더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동학사』를 지어낸 소설이라고도 할 수 없다. 비록 오지영이 당시 천도교단 내에서 반대파의 주장을 반박하고 천도교연합회의 전통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쓴 글이었다고 하더라도 오지영 스스로가 동학농민혁명에 직접 참여한 농민군으로서의 처절한 경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또한 오지영은 초고글을 쓰고 난 뒤 『동학사』를 간행하기 저네 3년 동안 전국의 동학농민혁명의 역사적 현장을 찾아다니며 답사하고 철저한 고증을 거쳤으며 『승정원일기』까지도 일일이 열람하고 대조했다고 한다. 또한 1931년 8월부터 10월까지 『동학과 동학란』을 연재한 김상기 역시 백산에 동학농민혁명군이 모였음을 밝히고 있다. 따라서 당시에 백산대회가 존재했다고 확신한다면 대회의 성격과 대의를 알리기 위해서는 어떤 형태로든 대회취지를 밝히는 격문은 존재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백산대회의 격문은 창생을 도탄에서 건지고 국가를 반석 위에 두고자 한다는 동학농민혁명의 목적을 명확히 밝히고 이를 위해 안으로는 탐학한 관리의 척결과 밖으로는 외세의 구축이라는 반봉건적, 반외세적 성격을 강조하고 있으며 나아가 유교적 지배질서에 고통 받고 있는 민중들의 동참을 호소하는 내용을 가지고 있다. 이는 동학농민혁명이 반봉건, 반외세 그리고 연합전선의 구축을 주장하는 최고의 격문이라고 평가된다.


  결국 동학농민혁명군은 백산대회를 가짐으로서 본격적인 혁명군으로서의 위상을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이들은 대회를 통해 앞으로의 투쟁이 혁명임을 만천하에 공포하고 지휘체계를 갖추는 등 군율을 정비했다.


  그리고 이에 호응하는 각 지역의 농민군들이 합류하여 황토현 전투와 황룡전투에서 승리하고 전주성에 입성했다. 백산대회는 이러한 농민군의 승리가 정당하다는 신호탄이었으며 나아가 동학농민혁명이 조선의 전근대적 지배체제를 개혁하고 외세의 침탈을 물리치고 자주적 근대국가를 만들고자 했던 동학농민혁명의 이상을 실현시키고자 했던 단초적 역할을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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