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소식지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소식지

발행처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56149)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동학로 742

TEL. 063-530-9400 FAX. 063-538-2893

E-mail. 1894@1894.or.kr

COPYRIGHT THE DONGHAK PEASANT REVOLUTION FOUNDATION.

ALL RIGHTS RESERVED

목차열기
2016년 봄 23호
천도교 교령 박남수 인터뷰

천도교 교령 박남수 인터뷰



박남수 천도교 교령


이번 호부터 [명사대담]을 신설하였다.

그 첫 번째로 박남수 천도교 교령님을 모시고 문병학 기념사업부장이 대담을 진행하였다.



문) 교령님 안녕하십니까? 바쁘신 중에도 이렇게 인터뷰에 응해주신 것에 대해 깊이 감사드립니다.


답) 네! 안녕하십니까. 찾아와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천도교나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전국동학농민혁명유족회 등에서 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을 추진하시는 분들이 사실은 긴 세월동안 가슴을 많이 조려왔습니다. 앞으로는 마음 편하게 동학농민혁명 정신을 선양하는 시기가 빨리 왔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올 한 해 우리가 꿈꾸는 것이 우리 후손들에게서라도 이루어질 수 있게 하는 바탕이라도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올해 병신년을 맞이한 우리들의 작은 소망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문) 동학농민혁명은 19세기 제국주의 열강이 동아시아로 밀어닥치던 때 [사람이 하늘이다]는 차원 높은 인본주의를 바탕으로 일어난 우리 역사상 최대 규모의 문명사적인 대전환운동이자 기층 농민이 주체가 되어 일어난 사회변혁운동이었습니다. 동학사상의 중핵은 모심(侍)으로 서구의 평등과 차원이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서구 평등이 단순한 수평적 평등이라면, 동학에서의 평등(모심, 존중과 배려)은 상호간 상대를 높여서 이루는 상승적 평등인데 이러한 중요한 가르침을 담고 있는 동학의 적통을 이은 천도교 최고 어른으로서 ‘각자위심’(各自爲心)으로 치닫고 있는 21세기 초입, 오늘날의 시대상황에 대해 한 말씀 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답) 지금의 시대와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났던 121년 전을 생각해 보면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난 역사적 배경이나 시대적 의미를 그동안 우리가 너무 좁게 생각한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듭니다. 온 인류가 변화하는 과정을 놓고 보면 그럴만한 바탕이 있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동학농민혁명이 근세를 만들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그저 100년 전에 일어났던 한 사건이라고 치부할 일이 아닙니다. 동학농민혁명은 봉건사회와 외세의 침략을 반대하고, 사람이 주인이 되는 시대, 시민이 주인이 되는 시대를 연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 역사입니다. 즉, 동학농민혁명이 새로운 역사를 만든 것입니다. 근세라는 것은 시민이 주인이 되는 시대, 만민평등의 시대를 말합니다. 봉건이라는 사회는 신분제 사회로서 아직 시민이 주인이 되지 못한 시대입니다. 동학농민혁명은 바로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모든 사람이 주인이 되는 시대를 만들어야겠다고 일어난 것이지요. 당시 왜 우리 선조들은 그런 생각을 갖게 되었을까 생각해 보면 나라가 나라답지 못하고 신하가 신하답지 못하고 아버지가 아버지답지 못하고 자식이 자식답지 못하게 세상을 살았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모든 자기 권리를 빼앗기고 살던 시대이기 때문에 이대로는 더 이상 살 수가 없다. 그래서 이런 혁명이 일어나지 않았나 하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오늘날을 돌아보면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던 당시처럼 다시 그러한 상황들이 일어나고 있어서 안타깝습니다. 그래서 동학농민혁명 정신이 다시금 필요한 시기로 보이는 것입니다. 단순한 역사로 이해할것이 아니라 동학농민혁명을 제대로 알아서 오늘 우리 앞길을 밝히는 삶의 좌표로 삼을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동학농민혁명을 국민운동으로 발전시켜 나가야한다고 생각합니다.



 

문) 동학농민혁명군은 제국주의 열강의 국권침탈과 조선왕조의 부정부패로 얼룩진 시대에 반외세 반봉건의 기치를 들고 분연히 일어섰다가 일제의 불법적인 침략과 학살만행으로 1894년 갑오년 시린 겨울산하에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그로인해 한국 근대사 시작지점부터 일제강점기라는 암흑기로 빠져들었고, 그 과정에서 구국애민의 표상인 동학농민혁명은 ‘반란사건’으로 치부되었습니다. 그러다가 1994년 혁명 1백주년을 전후하여 전국에서 역사바로세우기 운동이 힘 있게 추진되었고, 그 결실로 2004년 [동학농민혁명참여자등의명예회복특별법]이 제정되었습니다. 동학농민혁명의 전통을 이어받은 민족종교의 최고 어른으로서 특별법 제정에 대한 감회가 남달랐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한말씀해주십시오.


답) 사실 역사는 승자(勝者)가 쓰는 것 아닙니까? 동학농민혁명 100주년 기념사업 때 의견을 우리가 하나로 했더라면 조금 더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었을 텐데 그때 참 좋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그 다음에 동학을 바라보는 시각이 대부분 역사에 반전을 만들었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저는 요즘 국가기념일 제정을 하면서 좀 안타까운 게 우리 100주년 기념사업 때 동학농민혁명을 어떻게 봤느냐면 전라도 혁명으로 봤습니다. 전라도 사람들이 일으킨 반란사건으로만 생각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정권의 중심이 경상도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전라도 난으로 된 것입니다. 천만다행으로 지금 박근혜 대통령의 할아버지가 동학군으로 알려져 있어서 그런지 몰라도 많이 바뀌었지요? 사실 1960년 초반에 박정희 대통령이 동학난을 동학혁명으로 이름을 붙였습니다. 그런 맥락이 이어지다가 1994년 100주년을 전후해서 전국 각 지역에 기념사업단체가 만들어져 동학농민혁명 역사를 복원하는 기념사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고, 유족들이나 동학을 연구하는 사람들도 끊임 없는 노력을 기울여 [동학농민혁명 명예회복특별법]을 제정했지요. 너무나 좋아서 춤을 추고 싶을 정도였습니다. 특별법이 제정되었을 때 나는 어떠한 권력과 어떠한 힘으로도 동학농민혁명 정신을 막을 수가 없다는 것을 생각했습니다. 단지 때가 좀 늦게 왔을 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문) 2004년 대한민국 제17대 국회에서 의원입법으로 특별법이 제정된 때로부터 올해로 12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동학농민혁명의 숭고한 정신의 전국화, 세계화, 미래화 추구의 든든한 바탕이 될 수 있는 국가기념일 제정사업이 완료되지 못했습니다. 동학농민혁명 정신 현재화의 초석이 될 국가 기념일의 조속한 제정을 위해서 유족이나 관련기관, 기념사업단체 관계자 혹은 전공연구자들이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시는지요?


답) 역사를 만드는 것에는 꼭 그 대가를 필요로 합니다. 우리가 어떠한 대가를 치르지 않고는 새로운 역사를 만들 수 없고, 새로운 역사를 만날 수도 없습니다. 그동안 천도교는 잘했고, 유족들이나 기념재단은 잘못했다거나 거꾸로 유족들이나 기념재단은 잘했고 천도교는 잘못했다고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자기가 주장하는 것은 옳고 다른 사람이 이야기 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은 동학혁명 정신을 잘 모르는 것 아닌가 생각합니다. 동학혁명 정신은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내 한 몸을 기꺼이 희생하는 데 있다고 봅니다. 자기 것, 자기주장을 앞세우는 것은 동학혁명 정신과 배치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동안에 천도교가 보여준 모습은 그렇지 못한 것 같아 안타까웠습니다. 예를 들자면 천도교에서는 동학농민혁명이라는 용어를 쓰지 않았습니다. 동학혁명이라고 씁니다. 이유는 농민이라는 용어에 대하여 부정적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당시의 농민을 오늘날로 환치해서 말한다면 모든 국민, 모든 백성을 이야기 하는 건데, 농민이라는 단어를 넣어 사용하면 반국가적인 행위를 하는 단체 뭐 이런 것을 떠올리게 된다는 생각에서 천도교에서는 차별화를 위해서 ‘농민’이라는 단어를 못 쓰게 했습니다. 또한 천도교에서 독자적으로 기념일을 정해서 기념을 해 왔습니다. 그런데 저는 위 두 가지, 즉 천도교에서 정한 기념일과 농민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던 이 두 가지를 다 내려놓았습니다. 이 두 가지를 내려놓는 것은 천도교 교법에도 위반되는 내용입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대승적인 차원에서 양보와 결단이 없이는 동학농민혁명 국가기념일의 조속한 제정이 어렵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어렵지만 우리 천도교는 단호히 대승적인 차원에서 양보한 것입니다. 유족들이나 기념사업 관련단체, 관련기관이나 지방자치단체 모든 관계자들이 이처럼 동학농민혁명의 정신에 거스르지 않고, 동학혁명 정신을 제대로 이해해서 뜻을 하나로 뭉치는 자세가 필요하지 않나 그렇게 생각합니다.



문) 특별법이 제정되던 2004년부터 기념일 제정을 위한 논의는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왔습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사정으로 기념일 제정사업이 성과를 내지 못하다가 2014년 11월 27일 전국 관련기관과 단체, 유족회, 전공연구자, 관련인사 등이 한 자리에 모여 국가기념일제정추진위원회를 구성했고, 활동결과 비로소 관련기관 및 관련단체, 전공연구자, 유족회 등이 국가기념일 단일안에 합의하여 지난해 9월초 주무부처인 문화체육관광부에 국가기념일 제정을 건의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천도교 대표자격으로 추진위원회 위원으로 참여하셔서 말 그대로 각고의 노력을 기울이셨는데, 동학농민혁명국가기념일제정추진위원회 활동에 대한 소감을 한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답) 국가기념일 제정 문제에 있어서 천도교, 기념재단, 전국유족회가 조금 방향을 바꾸었으면 좋겠습니다. 이유는 너무 좁은 곳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천도교에서 주장하는 것은 그동안 천도교에서 추진해온 날로 하는 게 제일 좋구요. 그 다음은 9월 18일이 재봉기일이 좋은데 왜 6월 11일 전주화약일에 찬성을 했느냐 하면 국가기념일의 의미는 어느 지역의 기념일을 정하는 것이 아니라 전 국민이 기리는 기념일로 자리매김해야하기 때문입니다. 어느 지역, 어느 단체의 주장에 얽매이지 말고 동학혁명 정신을 받들어 큰 틀에서 국가기념일 제정을 추진했으면 합니다.



문) 앞서 교령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기념일제정 추진위원으로 활동하시면서 천도교단의 자체 기념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고뇌에 찬 결단으로 새로운 국가기념일 단일안 합의를 이끌어내셨고, 이에 대해 기념사업단체나 관련기관의 관계자 등 여러 사람들에게 큰 감명을 주셨는데... 이점에 대해 말씀해주십시오.


답) 제가 국가기념일 제정 추진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정읍시장이나 고창군수, 부안군수를 만날 때 그래도 그 분들이 어떤 예의를 갖추든 안 갖추든, 예를 들어보면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오더라도 제가 장관 아래로 갈 수는 없거든요. 오히려 장관이 저한테 와서 교령님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라고 물어봐야 하는데 이런 격식에 대한 사항은 제외하고 7대 종단의 한 종단 대표가 지자체장을 찾아서 간다는 것이 격에 맞지 않다는 얘기들도 들렸어요. 그런데 동학혁명 정신이 무엇입니까? 그런 생각에서, 이런 저런 얘기들이 들려도 저는 기꺼이 추진위원분들과 추진위원회에서 이끌어낸 단일안을 반대하는 지자체장을 찾아가 만났습니다. 그게 동학혁명 정신에 부합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방문했던 지자체장들이 천도교 교령이 직접 나와 자리하고 있는데 큰소리 내면 그것도 좋지 않을 것 같고 해서 그런대로 논의가 차분하게 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그러한 것들이 동학농민혁명 관련기관이나 단체의 의견을 이끌어내는데 많은 도움이 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문) 2014년 말부터 지금까지 적극적인 활동을 통해 국가기념일 단일안을 어렵게 합의, 마련하여 주무부처인 문화체육관광부에 기념일 제정을 건의하였습니다. 기념일이 최종적으로 제정되기까지는 앞으로도 많은 행정절차가 남아 있는데, 행정을 담당하는 관계기관에 당부하실 것이 있으면 말씀해주십시오.


답) 지난번에 문화체육관광부 1차관이 방문하였지만 그동안 추진위의 활동에 대하여 잘 몰랐던 것 같아요. 말하자면 우리 추진위원회에서 단일안을 만들어 내기까지 정말 어려운 과정이 있었다는 것을, 그런데 문화체육관광부 1차관이 그런 저간의 사정을 잘 몰랐던 것 같습니다. 어렵게 추진위원회에서 11년간 이루지 못했던 국가기념일 단일안 합의를 이끌어냈는데 여기에 힘을 실어주었어야죠. 추진위원회를 한다고 하면 문체부에서도 모니터링도 나오고 했었어야지요. 국가의 기본정책은 국민대통합입니다. 그러면 동학농민혁명을 선양 사업하는 기념재단이나 유족이나 천도교가 힘을 합친다고 하면 제가 생각할 때는 문체부의 일을 절반 정도는 해준 거나 다름이 없습니다. 그 다음 국가기념일 제정을 성공한다고 하면 문체부 장관한테 우리는 표창을 받아야되지 않나 생각합니다. 우리가 어느 정도 이루어놓은 것에다가 발전적으로 보완을 해야 하는데, 난데없이 특정지역에서 요구하는 일자를 동일선상에 두고 논의를 하게 되면 그동안 각고의 노력을 기울인 추진위원회 활동은 물거품이 되는 거 아닙니까? 이것은 국가가 동학농민혁명군 명예회복에 대한 국가기념일 제정 추진에 미온적이라는 오해를 불러 일으킬 수 있습니다. 물론 정부기관 관계자분들의 입장도 충분히 이해는 합니다. 나아가, 동학농민혁명의 역사적 긍지를 가지고 있는 호남 분들이 각성할 필요도 조금은 있다고 생각하는데, 미미한 것 같아 좀 안타깝습니다.



문) 끝으로 하시고 싶은 말씀 있으면 해주시기 바랍니다.


답) 역사를 공부하고 계승하는 사람들이 동학농민혁명을 세계적으로 그 어떤 혁명보다도 값진 혁명으로 인정받도록 좀 더 노력해 주길 바랍니다. 동학농민혁명이 없었으면 3·1운동이 없었고, 3·1운동이 없었다면 우리의 민족정신은 바로서지 못했을 것입니다. 민족정신이 바로서지 못하면 남북통일도 요원할 것이기에, 역사적 의미와 현재적 의미를 생각하면서 동학농민혁명 정신이 얼마나 값진 것인가를 깊이 되새겨야 할 것이라고 봅니다. 동학혁명은 천도교가 하는 것이니 천도교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계실 테지만, 천도교는 종교적인 역할만 할 뿐입니다. 동학농민혁명 정신은 우리 민족 모두가 선양해나가야 할, 세계적으로 내놓을 수 있는 위대한 우리 민족의 역사적 자산입니다. 동학혁명 정신이 이 시대에 큰 정신적 지주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정기구독 신청

발행처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56149)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동학로 742

TEL. 063-530-9400 FAX. 063-538-2893

E-mail. 1894@1894.or.kr

COPYRIGHT THE DONGHAK PEASANT REVOLUTION FOUNDATION.

ALL RIGHTS RESERVED

2025년 겨울 62호
목차
目次 cont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