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소식지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소식지

발행처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56149)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동학로 742

TEL. 063-530-9400 FAX. 063-538-2893

E-mail. 1894@1894.or.kr

COPYRIGHT THE DONGHAK PEASANT REVOLUTION FOUNDATION.

ALL RIGHTS RESERVED

목차열기
2025년 가을 61호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이병환의 손자 이기곤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이병환의 손자 이기곤



 

문) 회장님 반갑습니다. 전국동학농민혁명유족회 회장직을 맡고 계셔서 많이 바쁘시죠? 먼저, [녹두꽃] 독자를 위해 간략하게 회장님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답) 안녕하세요. 저는 이기곤입니다. 전국동학농민혁명유족회에 훌륭한 분들이 많으신데 특별히 훌륭한 점도 없는 제가 2년 임기의 전국유족회 회장직을 맡아 수행하고 있습니다.(웃음) 전국 각 지역에서 펼쳐지는 동학농민혁명 관련 기념행사에 참석하여 기념사업단체 관계자나 또는 해당지역 기관의 관계자, 지역주민 등을 만나기도 하고, 또 그 지역에 거주하시는 유족분들을 만나서 유족회의 전망 등을 모색하고 그러느라고 나름대로 동분서주하고 있습니다.



문) 전국동학농민혁명유족회 회장으로서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는 다양한 동학농민혁명 정신선양사업은 물론이고, 전국에서 펼쳐지는 각종 기념행사에 참석하는 일이 만만치 않죠? 사계절 내내 사업들이 펼쳐지기 때문에 그 많은 행사들에 참가하려면 시간이나 경비가 만만치 않게 들어갈 텐데 어떻게 감당하시는지요? 힘들면서도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의 후손으로서 보람도 클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 점에 대해 말씀해주시지요.


답) 각 지역에서 펼쳐지는 동학농민혁명 기념행사들이 결국은 갑오선열들의 정신을 선양하기 위한 일환이니 어렵더라도 될 수 있으면 빠지지 않고 기념사업이나 행사들에 참석하려고 노력하지요. 역사라는 수레바퀴 속에서 갑오년 선조들께서는 역사에 온몸으로 답을 하셨고, 후손인 우리들은 역사의 수레바퀴 속에서 우리가 감당해야할 일이 있는 것 같아요. 우리에게 주어진 그 일은 선열님들의 정신을 기리고 계승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적극적으로 정신 선양사업에 참가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힘들고 버겁더라도, 지금보다 더 많이 정신을 선양하기 위한 기념행사가 이루어져도 적극적으로 참여해야지요. 그래야 나중에 세월이 흘러 저 세상에 갔을 때 조상님들 뵐 면목이 생길 테고, 또 세상을 열심히 살아갈 후손들에게도 할 말이 있지 않겠어요? 100년이 넘는 세월동안 반란군으로 매도당했다가 110년 만에 제정된 동학농민혁명 특별법이 제정되기 전부터 전국 각 지역에서 기념사업단체들이 추진해온 기념사업은 그런대로 지역단체 여러분들이 헌신한 덕분에 많이 자리를 잡은 것 같아요. 그런데 정작 특별법에 규정된 동학농민혁명군의 실질적인 명예회복을 위해 선결되어야할 중요한 사업들이 지지부진해서 큰 걱정입니다. 우리 조상님들은 나라와 민족을 위해 온몸을 바쳤는데, 그래서 오늘 평등세상을 우리에게 가져다주었는데 그분들의 실질적인 명예회복을 이루기 위한 기본적인 사업들이 이렇게 더디게 추진되어서야 되겠어요? 갑오선열님들을 추모하고 그 정신을 기리고 계승하는데 있어서 기본적인 토대가 될 [동학농민혁명 기념공원 조성사업]이라든가 정부가 공식적으로 동학농민혁명군의 넋을 기리고 그 정신을 계승하기 위하기 위해서 필요한 [동학농민혁명 국가기념일 제정사업] 등이 도무지 진척되지 않고 있으니 안타깝기 이를 데 없습니다. 조속히 이런 일들이 마무리 되어 우리 조상님들께 예를 갖출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기를 빌어마지 않습니다..



문) 조사된 자료를 읽어보니 회장님 조부 이병환, 그리고 그분의 형님이신 이병기 두 분 형제가 함께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여 당시 상당한 역할을 하신 것으로 보이던데, 여기에 대해 알고 계신 것이 있으면 말씀해주세요.


답) 이 병자 환자 그분이 제 할아버지이시고, 할아버지 형님 그러니까 제 큰할아버지가 이 병자 기자입니다. 이병기 큰할아버지가 일찍부터 동학에 들어가 활동을 하셨다고 해요. 보통 한 고을이 십여 동네가 되는데, 증조할아버지가 그 고을에서 제일가는 부자였다고 합니다. 전답, 그러니까 논과 밭은 물론이고 산도 아주 많이 소유하셨다고 해요. 그런 부잣집 장손이 바로 큰할아버지이고, 그 동생이 바로 제 할아버지입니다. 큰할아버지는 한학에 조예가 깊으셔서 남쪽에서는 큰할아버지의 한학을 따라 갈 사람이 없었다고 합니다. 큰할아버지께서는 산에다 돌성(石城)을 쌓아놓고 그곳에서 일주일에 한 번씩 주변지역인 나주, 보성, 장흥, 무안 등지에서 수백 명씩 모아 한학을 가르치셨다고 해요. 그곳을 ‘당산몰’이라고 하는데 ‘당산몰’이라는 이름의 뜻은 지금도 잘 모르겠어요. 동네 사람들이나 후손들, 친구들한테 물어봐도 ‘당산몰’에 대해서는 알지만 그 이름의 뜻을 아는 사람은 없더라고요. 큰할아버지께서 ‘당산몰’을 운영하시면서 많은 사람들을 거느리고 있으니까 자연스럽게 전북지역의 동학 지도자들과 이야기가 진행되었던 것 같아요. 동학농민군에 들어간 할아버지는 형님의 심부름으로 정읍과 고창 등으로 자금을 전달하는 일을 하셨다고 해요. 갑오년 당시에 최경선 장군이 광주, 능주, 화순, 나주 쪽을 관리했다고 그래요. 그래서 큰할아버지는 주로 최경선 장군과 연락하면서 일을 했고, 전봉준 장군하고는 선이 닿은 흔적을 찾기 어렵더라고요. 동학농민혁명 때 할아버지께서 활동하셨던 지역을 찾아보니 능주로 나오는데, 그때는 지금의 화순이 능주와 동복으로 나뉘어져 있었다고 그래요. 이후 일제강점기 때 능주와 동복이 화순으로 통합되었지요. 증조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그 많은 재산을 큰할아버지가 물려받았는데, 논을 팔고 산을 팔아 동학에 자금을 나르다보니 그게 동이 나버렸어요. 1894년도가 되면서 농민군이 봉기하고 전투가 벌어지자 할아버지가 동학농민군으로 합류를 하게 되었다고 해요. 할아버지께서는 능주 지역장으로 화승총까지 메고 다니시면서 활동하셨다고 합니다. 그때 당시 화승총은 100명 중에 한명 정도만 가지고 있을 정도였는데, 요즘같은 보통 총이 아니다 보니 힘이 안 좋은 사람은 화승총을 사용하지 못했다고 해요. 그렇게 전투에 임하여 최경선 장군과 우금치전투까지 참여하고 후퇴를 같이 해서 광산, 나주, 남평, 능주를 거쳐서 동복까지 피신했다고 해요. 그 때 후퇴해온 최경선 장군 부대가 270여명이었다는데 동복에서 추격하는 일본군과 다시 전투가 벌어져 240명 정도가 희생되었다고 합니다. 동복에서는 하루 저녁 사이에 140여명이 죽었어요. 능주(화순)역사에도 나오는데 이장 오씨가 남면 사평리에 동학쟁이들이 와서 진을 치고 있다고 밀고를 했어요. 140여명이 하루저녁에 죽고 나머지 130여명이 남아 있는데, 양한묵 선생이 동학농민군을 살리기 위해 큰일을 하셨어요. 관군 대표를 불러서 내일 아침이면 어차피 일본군에게 잡혀서 죽을 것이기 때문에 그냥 보내주자고 설득하여 빼돌렸다고 해요. 양한묵 선생이 원래 화순분인데 해남에서 성장하고 고향으로 와서 세무관을 지냈어요. 동학농민군을 위해 큰일을 해주신 양한묵선생 기념비를 화순군청 입구에 모시는데 저도 앞장서서 힘을 보탰습니다.



 

문) 아까 말씀하신 내용 중에 해방 이전에 초등학교 다닐 때 동학쟁이 후손이라고 불리며 멸시를 받으셨다고 하셨는데, 할아버지께서 동학에 참여하셨다는 사실은 주로 누구에게 들으셨습니까?


답) 오홍섭씨라고 어릴 적부터 위아래 동네에 살고 친하게 지내던 할아버지 선배님이 계세요. 할아버지는 난리가 나고 겨우 살아남아 화순군 춘양면 월평리 오홍섭씨 집에서 머슴으로 위장하여 정착하셨다고 해요. 새벽에 화승총을 메고 동복에 있는 외가로 숨어들어 오셨는데, 외가니까 고발을 하지 않고 뒷방에서 지낼 수 있었던 것이죠. 거기서 지내다 오홍섭씨의 집에서 머슴으로 위장해서 살았던 것이죠. 그때 당시에는 ‘깔담살이’라고 했는데, 오홍섭씨가 외가에서 은신하고 본인에게 와서 ‘깔담살이’를 하면서 정착하라고 그랬대요. 이런 이야기를 저희 할아버지는 전혀 안하셨는데 오홍섭씨가 동학농민혁명과 관련된 이야기를 많이 해주셨어요. 할아버지가 동학군이었는데 화승총을 메고 일본군을 때려잡은 사람이라고 하시면서, 일본군하고 싸우다 겨우 살아서 우리 동네에 피신을 시켜서 너희 할아버지가 결혼도 하고 너희들도 낳은 거라고... 주로 마을회관에 앉아서 그런 이야기를 해주셨는데 할아버지는 아무 말씀도 우리에게 안 해주셨어요. 그때 당시 이장이 친일파였는데 우리를 ‘동학쟁이’라 몰아붙이고, 괄시했기 때문에 우리는 죄지은 사람처럼 서럽게 숨죽이고 사는 처지였어요. 그래서 그런 말씀을 더욱 안하셨던 것 같아요. 아버지는 일찍 해방 전에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그 내용에 대해 알지만 난리 속에 많은 고생을 하셔서 그런 이야기를 해주실만한 상황이 아니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할아버지께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신 사실은 오홍섭 씨를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문) 전국동학농민혁명유족회 회장으로서 이루고 싶은 일들이 많을 텐데, 여러 가지 중에서 회장님께서 임기 중에 꼭 이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시는 사업으로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요?


답) 올해는 동학농민혁명 기념일 제정사업과 기념공원 조성사업이 제 궤도에 올랐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모든 국민이 갑오선열들의 애국애족 정신을 다함께 기릴 수 있는 날이 하루 빨리 오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현재 동학농민혁명 국가기념일 제정과 관련해서는 전주화약일인 6월 11일이 문화체육관광부에 신청이 되어있지요. 행정자치부로 넘어가 국무회의에서 반려가 되면 재신청이 힘들다고해서, 그런 것을 방지하기 위해 교수진으로 역사학계 자문단을 구성하여 논의를 진행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기념일 제정과 관련해서는 여러 문제들이 많은데, 이 부분은 정부 부처에 신청한 상황이기 때문에 문화체육관광부에 맡겨 놓고 기념공원 조성하는 일에 모든 힘을 기울이고 싶습니다. 기념공원이 빨리 완성돼서 갑오선열을 추모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었으면 좋겠어요. 묘역을 만들어서 그분들을 빨리 모셔야하고... 그래야 성묘도 하면서 우리 선조들이 나라와 민족을 위해 투쟁하시고 돌아가셨다는 것을 후손들에게 알릴 수 있을 거 아닙니까?



문) 회장님께서 기념행사 때 축사를 하시면서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몇 번 본적이 있습니다. 반란군 후손으로 몰린 세월의 한이 얼마나 깊었으면 저렇게 말씀 중에 울컥~ 하시나 그런 생각에 저 또한 가슴이 먹먹해졌었는데, 회장님의 바람대로 모든 국민들이 갑오선열을 기릴 수 있는 날이 빨리 올 수 있도록 우리 기념재단에서도 보다 적극적으로 일을 추진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끝으로 하고 싶은 말씀 있으시면 해주시기 바랍니다.


답) 네. 제가 몇 군데서 축사를 하다가 복받치는 감정에 눈물바람을 한 적이 있었어요. 고창 무장기포 기념제 때와 장성 황룡전투 승전기념식 축사 때 그랬던 것 같아요. 긴 세월을 반역자 로 몰렸다가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었으나 명예회복은 아직 많이 미흡하다고 생각해요.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선조들을 선양하는데 있어 국가가 앞장서서 해야 하는데 그런 부분이 아쉬운 것 같아요. 나라를 위해 싸우다 죽은 분들이 반란군으로 몰리면 누가 나라가 위태로울 때 나라를 위해 목숨을 내놓겠습니까? 이점을 늦었지만 국가가 바로잡아야 합니다. 국가가 역사를 무시하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역사를 바로 알고, 후세에 제대로 알려야 그 역사에서 배워서 국민의 역할을 제대로 해내지 않겠어요? 그래야 국가가 튼튼해지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국회에서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을 만든 거잖아요? 선조들의 의를 기리자고 제정된 법률에 정해진 정신선양사업이 활성화되기를 진심으로 바라마지 않습니다. 감사합니다.



정기구독 신청

발행처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56149)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동학로 742

TEL. 063-530-9400 FAX. 063-538-2893

E-mail. 1894@1894.or.kr

COPYRIGHT THE DONGHAK PEASANT REVOLUTION FOUNDATION.

ALL RIGHTS RESERVED

2025년 가을 61호
목차
目次 cont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