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광학원 이사장 신순철 인터뷰

 
문) 이사장님 반갑습니다. 바쁘신 중에도 이렇게 대담에 응해주셔서 고맙습니다. 1980년대부터 동학농민혁명의 역사적 의미를 되살리려는 기념사업에 몸담아오면서 전국 동학농민혁명백주년기념단체협의회 운영위원장직을 맡은 이래 2004년 제정된 특별법에 따라 설치된 동학농민혁명참여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 심의위원, 재단법인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이사 등의 활동을 통해 연구는 물론이고 역사를 바로세우기 위한 기념사업에 적극적으로 임하셨습니다. 나아가 특별법에 의거하여 설립된 문화체육관광부 특수법인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제1기, 제2기 때 이사도 맡으셨지요? 동학농민혁명과 보통 인연은 아닌 것이 분명한데, 특별한 인연이 있는지요?
답) 아마도 그때가 1989년 무렵이었을 거예요. 서울에서 신용하 교수를 주축으로 서양사를 공부하는 사람들끼리 ‘프랑스혁명 200주년 기념사업회’를 만들어 기념사업을 추진했지요. 그 중 꽤 규모가 큰 학술세미나가 열렸는데, 그 준비과정에서 학술대회 관련사항이 언론에 보도되었지요. 그 신문기사를 읽으면서 동학농민혁명 백주년도 멀지 않았는데 왜 아무런 움직임이 없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데 마침 내게 『전북문화저널』(월간)에서 칼럼 원고청탁을 해왔어요. 그 당시 전북문화저널은 전북지역의 사회와 문화예술계 전반을 다루는 창간이 얼마 안 된 잡지로 지역사회에서 호응을 얻고있었어요. 이 잡지 창간에 깊은 역할을 했던 분이 현재 사단법인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이사장인 전북대학교 이종민 교수였어요. 하여튼, 그렇게 해서 “동학농민전쟁 백주년을 준비하자”라는 칼럼을 쓴 것이 제가 지금까지 동학농민혁명에 발목을 붙잡힌 계기가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문) 네, 이사장님. 동학농민혁명 백주년 기념사업을 정리한 『동학농민혁명 백주년 기념사업 백서』(1995, 동단협編)를 발간하면서 그 칼럼을 읽어봤습니다. 그래서 정확하게 기억합니다. 그 칼럼의 제목은 “갑오농민전쟁 백주년을 준비하자”였고, 『전북문화저널』 1989년 6월호에 게재되었습니다.
답) 그래요. 그 말을 들으니 생각이 나요. 원고를 썼던 때가 짧은 장마가 지나간 직후였어요. 나중에 그 칼럼을 생각하면서 대중적인 지면에 발표하는 글은 각별히 신경을 써야할 필요성이 있구나,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어요. 그 칼럼 때문에 30여 년을 동학농민혁명에 꼼짝없이 붙잡혔잖아요? 그 칼럼을 쓴 대가를 아주 톡톡히 치루고 있는셈이지요.(웃음) 시기적으로, 동학농민혁명 백주년 기념사업 추진에 있어서 1988년과 1989년은 참 의미 있는 한 해였어요. 칼럼이 게재된 이후 전북지역 대학교수 모임인 ‘호남사회연구회’를 비롯해서 ‘민주주의민족통일전북연합’를 비롯한 시민사회단체들이 동학농민혁명 백주년 기념사업을 준비해야한다는 움직임이 시작되었지요. 그해 9월 서울에서 활동하던 역사문제연구소에서 ‘갑오농민전쟁100주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이후 ‘백추위’)를 출범시켰어요. 이런 흐름 속에서 전북지역에서는 호남사회연구회 중심으로 1991년 1월 동학농민혁명백주년기념사업회 창립 준비위원회가 결성되었습니다. 칼럼을 쓴 죄값으로 ‘준비위원장’을 맡았고, 이후 준비위원회가 준비위원회를 거쳐 1992년 6월 13일 전라북도상공회의소 대강당에서 전북지역 시민사회단체 연합체 형태로 ‘동학농민혁명백주년기념사업회’를 창립했지요. 그때부터 지금까지 줄곧 사무총장, 이사 직무를 수행해왔으니, 벌써 30년이 가깝네요.
문) ‘동학농민혁명백주년기념사업회’가 지금 전주에 있는 사단법인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를 말하는 것이지요? 백주년기념사업회로 창립된 후 1년 만에 ‘백주년’을 뺀 사단법인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로 거듭나 오늘에 이르고 있는데, 당시의 상황에 대해 기억나는 일들이 있으면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답) 앞에서도 말했듯이 1992년 6월에 동학농민혁명백주년기념사업회가 창립되었고, 초대 회장은 당시 전라북도의회 김철규 의장님이 맡으셨지요. 이후 김삼룡(원광대총장), 조용술(목사), 한승헌(변호사) 세 분이 공동대표를 맡아 애를 쓰셨지요. 그러다가 단체임원, 회원 등이 참석한 연석회의에서 백주년 한 해만 기념사업을 추진하고 멈출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기념사업을 추진할 필요성이 있다는 판단에서 백주년을 뺀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로 문화체육부에 사단법인 등록을 신청하였고, 1993년 7월 사단법인 설립인가를 받아 지금에 이르고 있지요.
문) 앞서 이사장님께서 1989년 칼럼 때문에 그 대가를 톡톡히 치루고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실제로 동학농민혁명 백주년 기념사업(1994), 일본 북해도대학에서 발견된 동학농민군 지도자 유골봉환(1996.5), 동학농민혁명 삼례봉기 기념비 건립(1996.10), 동학농민혁명 대둔산최후항전지 규명(1998), 동학농민혁명 대서사시 음악극 [천명] 순회공연(1999),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서훈을 위한 국가유공자 청원사업(2000), 동학농민혁명의 동아시아적 의미라는 주제의 국제학술대회(2001.5), 삼례봉기 역사광장 조성사업(2001) 등등 참 많은 일들을 추진했다는 것을 자료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역사학자로서 보람도 많았을 터인데, 당시의 상황들을 좀 떠올려주시지요?
답) 문 선생 얘기를 듣고 보니 참 많은 일이 있었구나 싶네요. 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과 만나는 바람에 개인적으로는 손해 본 것이 참 많다는 생각을 한 적도 더러 있었지요. 예컨대 역사학자로서 역사 관련 연구서나 저작물 간행 등 개인적인 성과로 내놓을 수 있는 일들을 거의 하지 못했어요. 하지만 다시 세월을 되돌려 그 상황이 오더라도 역시 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에 몸담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이에요. 불교적으로 생각하자면 전생에 내가 동학농민군이 아니었나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어요. 지난 1980년대 사회변혁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전북민주화교수협의회 활동을 했었는데, 그 과정에서 뭔가 아쉬움을 많이 느꼈지요. 그 아쉬움의 바탕에는 우리 사회의 변혁을 위해서는 보다 근본적이고 깊이 있는 것들부터 제대로 정립이 되어야 가능하다는 생각이 깔려있었던 것 같아요. 그러던 차에 동학농민혁명 백주년을 맞닥뜨린 것이지요. 자연스럽게 우리 사회의 변혁을 위해서는 한국근현대사의 굴절과 부침이 그대로 투영된 동학농민혁명의 역사를 바로세우는 사업, 이런 일들이 우리 사회를 변혁해나가는데 중요한 디딤돌이 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가졌지요. 실제로 동학농민혁명은 중세문명과 근대문명, 동양문명과 서구자본주의 문명의 중층적인 충돌 과정에서 발생한 사건으로 일제강점기, 동서냉전체제시기 등을 지나오면서 극심하게 왜곡되고 축소되어왔잖아요? 역사학자로서, 우리 사회의 변혁은 굴절과 부침이 심했던 한국근현대사의 역사적 의미를 제대로 세우는 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일들은 마다하지 않고 받아들였던 것 같아요.
문) 그때는 돈이 나오기는커녕 기념사업회가 전주에 있었으니까, 익산과 전주를 오가는 자동차 기름 값은 물론이고, 사무실 운영비, 사업회 실무자 활동비 등을 위해 적잖은 사비를 내놓으면서 기념사업에 헌신해오셨는데, 그래도 이후 특별법도 제정되고 해서 큰 보람을 느끼셨을 것 같아요. 어떠신지요?
답) 참 많은 분들이 기꺼이 후원금을 내주었지요. 그래서 겨우겨우 사무실 운영비는 충당했지만 간혹 모자란 운영비를 내놓아야 할 때도 더러 있었지요. 그렇지만 워낙에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힘든 줄 모르고 기념사업에 적극적으로 임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되돌아 생각해보니 참 많은 일들이 있었네요. 한 세기 동안 반란사건으로 치부되던 이 사건을 기념하기 위해 전국 각 지역에서 기념사업 단체 창립이 필요하다고 여겨 여기에 힘을 기울였던 일, 전국의 기념사업단체들을 한데 모아 [백주년기념사업단체협의회](1993. 12.)를 결성한 일, 백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추진했던 ‘고부봉기 역사맞이굿’(1994. 2.), ‘백주년 기념대회’(1994. 4.) ‘백주년 기념 학술대회’(1994. 5.), ‘공주우금티 추모예술제’(1994. 11.) 등이 어제의 일처럼 생생하네요. 이밖에도 일본 북해도대학에서 동학농민군 지도자 유골 국내봉환(1996. 5.), 동학농민혁명 대서사시 음악극 [천명] 전국 순회공연(1999. 11.), 한· 중· 일 삼국 역사학자들이 모여 ‘동학농민혁명의 동아시아적 의미’를 주제로 펼쳤던 ‘국제학술대회’(2001. 5.),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 제정(2004. 2.) 등등이 떠오릅니다. 이중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은 역시 백주년 기념사업이라고 말할 수 있어요. 백주년 기념사업은 대외적으로 동학농민혁명백주년기념사업단체협의회 주최로 추진되었지만, 사업기획과 예산마련 등은 (사)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사)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이 두 법인체가 중심이 되어 수행했지요. 백주년 기념사업을 추진한 사업예산은 문화체육부가 국비 약 250백만 원을 지원해주었어요. 전주사업회 88백만 원, 민예총 150백만 원이었지요. 지금도 큰돈이지만 당시에는 더 큰돈이었지요. 그래서 전국적인 차원에서 백주년 기념사업 추진이 가능했던 것이지요.
문) 그 때 이사장님께서 사단법인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사무총장과 동학농민혁명백주년기념사업단체협의회 운영위원장 등을 맡아 실무를 총괄하셨지요. 당시 제가 이사장님을 보좌하는 사무국장으로 일했는데, 정말 정신없이 보냈었습니다. 1994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백주년 지난 후에 행사 팜플렛 등을 보면서 이런 일들을 했었지... 할 정도로 정신없이 바빴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어떻게 그렇게 밤낮없이 열정적으로 일을 했었는지, 지금 그렇게 하라면 못할 것 같습니다.(웃음)
답) 그랬지요.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가 백주년 기념사업을 성공적으로 추진하는데 큰 바탕이었어요. 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의 역사에서 백주년 기념사업은 그 의미가 크다고 봐요. 1963년 10월 정읍 황토현 마루에 갑오동학혁명기념탑이 건립되었고, 한국사 교과서에도 1970년판부터 ‘동학혁명’으로 기재되는 획기적인 변화가 있었지만, 60~70년대 정치적인 분위기 등으로 ‘반란사건’이라는 대중적인 역사인식이 1990년대 초까지도 팽배했지요. 이 사건을 대중적으로 ‘동학농민혁명’으로 각인시킨 기점은 역시 ‘백주년 기념사업’이었습니다. 그 결실이 2004년에 제정된 [동학농민혁명참여자등의명예회복에관한특별법]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이처럼 큰 성과로 이어진 백주년 기념사업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1987년 6.10민주항쟁 등으로 변화된 우리 사회의 여건 변화와 한국사회 변혁을 바라던 많은 분들의 열정과 헌신이 잘 맞아든 결과라고 말할 수 있지요.
문) 동학농민혁명 백주년 기념사업을 마무리한 이듬해인 1995년 8월 3일 국내 주요언론에 “일본 북해도대학 옛 표본고(標本庫), 종이상자에 담긴 동학농민군 지도자 유골 1구 발견”이라는 내용이 보도 되었습니다. 이후 당시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이사장이던 한승헌 변호사께서 각고의 노력을 기울이셨고, 마침내 그 이듬해인 1996년 5월 30일 그분을 국내로 모셔온 일이 있었습니다. 당시 유골봉환 과정의 실무를 총괄하셨고, 봉환이후 그분의 신원을 확인하기 위한 ‘유골연구조사위원회’위원장직을 맡아 많은 애를 쓰셨는데, 그분을 국내로 모셔온 지 올해로 꼭 20년째인데 아직 그분을 안장해드리지 못하고 있지요? 이점에 대해 하시고 싶은 말씀이 많으실 텐데...
답) 그 분을 아직 안장해드리지 못한 일은 정말 사죄를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달리 말하자면 120여 년이 지나도록 제대로 된 장례(葬禮)를 치러 영면에 들 수 있게 해드리지 못하고 있는 셈인데... 후손된 도리를 못하고 있어서 죄스러울 따름이지요. 1894년 겨울 동학농민군은 공주 우금치전투에서 패한 후 뒤쫓는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면서 전라도 서남해안으로 밀리지요. 그렇게 해서 전남 진도까지 후퇴합니다. 일본과 조선정부 연합군은 동학농민군을 섬까지 쫓아가서 붙잡아 처형을 합니다. 아마 이분은 그 무렵, 그러니까 1895년 1~2월경 붙잡혀 처형, 효시된 후 진도군 송현리 송치고개에 유골이 방치되어 있었던 것 같아요. 그 유골을 조선총독부시절 1906년 일본인 사토 마사지가 식민지 지배 명분을 마련하기 위한 ‘인골학연구’의 자료로 쓸려고 북해도대학으로 반출한 것 같아요. 일제의 이런 행동은 정신대다 강제징용이다 뭐다 해서 산사람을 끌고 간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한 비인도적인 만행이지요. 어쨌거나 이분 유골이 발견된 후 사단법인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에서는 일본 외무성과 북해도대학 측에 공식적으로 서한을 보내는 등 여러 경로를 통해 일본 측에 국내봉환을 요구했고, 그 결과 1996년 5월 30일 국내로 모셔올 수 있었지요. 모셔온 후 영면하실 수 있도록 장례를 치루고 안장을 해드리고자 했으나 이분이 누구인지 알 수가 없어서 우선적으로 이분의 신원확인을 위한 연구조사에 착수했지요. 연구조사위원회를 구성한 후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의뢰하여 DNA검출 등 여러 가지 조사를 진행했습니다. 그러나 한 세기가 지난 유골이라 그 신원을 확인하는데 실패하였습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서 검출한 DNA 분석을 통해 “3~40대 몽골로이드인, 남성”이라는 사실은 확인되었지만 그분의 신원에 대해서는 “특정할 수 없다”는 결과를 얻는데 그쳤습니다. 이로 인해 이분의 장례를 치루는 일이 차일피일 지연되었고, 그 사이 몇 차례 안장을 추진하였으나 그때마다 여의치 못한 사정이 발생하여 지금에 이르렀습니다.

 
문) 그분의 신원을 확인하지 못했지만 안장을 해드려야 한다는 판단에서 그동안 여러 차례 안장을 추진했었지요? 맨 먼저 그분의 유골을 수습해간 장소였던 진도군 송현리에 안장하고자 박맹수 교수가 연구보고서도 냈습니다만, 그 당시 진도군 측은 유골이 진도사람이라는 확실한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거절하였습니다. 이후 2000년대로 들어와 또다시 진도군과 두 차례 안장 협의를 했으나 진도군의 미온적인 태도 때문에 안장사업이 성사되지 못하였지요. 그 뒤 정읍 황토현전적지, 김제원평 구미란전적지 등에 안장하고자 사업을 추진하였으나 번번이 예기치 못한 상황들이 발생하여 안장사업을 마무리하지 못하고 오늘에 이르고있지요. 다행스럽게 전주시에서 2년 전부터 이분의 안장을 위해 완산전투지 인근에 부지를 확보하여 [전주 동학농민혁명 역사공원 조성사업]을 추진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에 대해 알고 계시는지요?
답) 작년, 그러니까 2015년 늦은 가을이었던가? 전주시에서 [전주 동학농민혁명 역사공원을 조성하려고 기본계획용역] 발주하였고, 그 중간보고를 한다고 참석을 요청해온 적이 있어요. 그래서 참석해 기본계획에 관한 사항을 알고 있습니다. 동학농민군이 1894년 4월 27일 전주성을 점령한 후 그 이튿날부터 5월 3일까지 전주성밖에 완산칠봉 등지에 진을 친 초토사 홍계훈 부대와 격전을 벌입니다. 이를 역사학계에서는 완산전투라고 하는데, 특히 5월 3일 전투에서는 동학농민군 500여명이 희생되었다는 기록이 있지요. 그때 전사한 동학농민군을 집단으로 매장했다고 하는데 그곳이 어디인지 아직 규명되지 않았지요. 아마도 완산칠봉 끝자락 어디쯤일 텐데, 이런 면에서 전주 완산공원에 동학농민혁명 역사공원을 조성하여 이곳에 지도자 유골을 안장한다는 것은 나름대로 의미 있는 일이지요. 특히, 전주시가 기념공원을 조성하려는 곳은 완산칠봉 자락에 세워져 있는 전주입성비로부터 직선거리로 500여 미터쯤 떨어진 곳이고, 이곳은 전주한옥마을과도 직선거리로 800미터 안팎이라고 합니다. 전주한옥마을이 전국적인 관광명소로 떠오르면서 국내외 관광객이 연인원 수십만 명을 넘는다고 하니 이곳에 동학농민혁명 역사공원을 조성하여 지도자 유골을 모시고, 그 역사성을 대중적으로 알려나가기에는 아주 좋은 장소라고 볼 수 있겠지요.
문) 네, 어서 이분을 안장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당시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이사장으로 계시면서 농민군 지도자 유골을 국내로 봉환해오는 일에 온힘을 쏟으셨던 한승헌 변호사님이나 당시 사무총장으로 실무를 총괄하셨던 이사장님께서 마음이 많이 무거울 것으로 생각됩니다. 가슴 속에 큰 짐으로 자리하고 있을 터인데...
답) 그래요. 그분께서 영면하실 수 있도록 후손의 도리를 다하지 못해 많이 죄스럽지요. 내가 1998년 여름 암수술을 한 적이 있어요. 주변의 지인들은 물론이고 나를 아는 많은 사람들이 걱정해준 덕분인지 암을 이겨낼 수 있었어요. 수술을 받고나서 병실에 누워 있을 때 문득 동학농민군 지도자 이분을 모셔온 후 안장해드리지 못했다고 혼을 내시는 것은 아닌지... 그런 생각이 들었던 적도 있어요.....
문) 전주시에서 계획을 세워 추진하고 있다니 머지않아 영면하실 수 있도록 안장할 수 있을 것 같아 다행이다 싶습니다. 긴 시간 동안 백주년 기념사업과 이후 전개된 기념사업 전개과정들에 대해 말씀해주신 것을 들으면서 진짜 이사장님은 전생에 동학농민군이었나? 이런 생각이 스치네요.(웃음) 이사장님 고향이 경상북도 안동이라고 알고 있는데, 전북에 오셔서 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과 뗄 수 없는 관계를 유지해 오신 것이라든가 여러 측면에서 동학농민혁명과 인연이 아주 깊다는 것이 틀림없는 것 같은데...
답) 그러니까요. 그런 생각을 나도 해본 적이 있어요.(웃음) 나는 경북 안동 출생인데, 원광대학교 원불교학과를 입학하기 위해 말 그대로 불원천리 전북 익산으로 왔지요. 원불교학과를 졸업한 후 역사에 관심이 많던 나는 고려대학교 대학원 사학과에 입학했지요. 여기에서 강만길 선생님을 뵙게 되었고, 이후 원광대학교 사학과에서 학생들에게 한국근대사를 가르치면서 동학농민혁명과 만났지요. 사람이 나면서부터 가진 특성을 불교에서는 전생 습관이라고 해요. 사람마다 개인마다 다른 이유이기도 한데 이를 여러 생의 업보라고 하지요. 예전에 교무님들이 나나 박맹수 교수를 ‘전생의 동학군들’이라고 불렀던 분들이 있었어요. 그래서 지금 이 일을 하고 있나 요즘 들어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언젠가 『일본공사관기록』을 읽으면서 동학농민군 대둔산 전투상황이 상세하게 서술되어 있는 것을 봤어요. 그래서 이곳이 어디인지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는데 시간을 내지못해 차일피일 미루어왔지요. 그러던 차에 암수술을 하게 되었고, 암수술을 하고 퇴원한 후 매일 도시락을 싸가지고 인근의 작은 산들을 다니다가 문득 동학농민군이 대둔산에서 항전했던 유적지를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떠올랐어요. 그래서 대둔산 정상을 올라가는 길가에서 매점을 하는 김규환 할아버지께 물어봤는데, 대둔산 서쪽에 미륵바위가 있는데 옛날부터 어른들이 그곳에는 올라가지 말라고 해서 사람들이 올라가지 않는 곳이 있다는 얘기를 해주시더라구요. 그날 미륵바위를 찾아서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해가 저물 무렵이었어요, 이제 마지막으로 저 위쪽 바위만 확인하고 가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바위 뒤쪽으로 돌아서니 커다란 바위 위에 돌을 가지런히 쌓아놓은 흔적이 보이는 거예요. 순간 ‘여기다!’싶은 생각이 번개처럼 들면서 나도 모르게 정신없이 바위를 기어서 올라갔어요. 올라가보니 비스듬히 걸쳐있는 바위 아래에서 옹기파편과 탄피가 노출된 채로 100년 전의 흔적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이 유적지를 발견하기 몇 년 전에 제가 가족과 함께 대구에서 익산으로 돌아오는 길에 이곳 대둔산을 지나오면서 눈길에 차가 미끄러지면서 순간적으로‘아! 이렇게 죽는구나’했는데, 도로 끝에서 간신히 차가 멈춰서 큰 사고를 모면한 적이 있거든요. 그때 차를 세워놓고 속으로 ‘대종사님께서 살려주셨나? 아니면 농민군이 도우셨나? 하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어요.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바로 사고현장이 이 유적지 골짜기의 끝이더라구요.
문) 그러니까요. 듣고 있는 저도 그냥 가슴이 조마조마하네요. 저도 눈길 교통사고를 크게 당한 적이 있었거든요. 정말로 동학농민군이 절벽으로 떨어지는 차를 막아준 거 같네요. 일본 북해도대학에 방치되어 있던 동학농민군 지도자 유골 안장하는 문제 등등 아직 할 일이 많이 남았으니까 잘 마무리 하라는 뜻인 것 같네요.(웃음) 이사장님 오랜 시간 좌담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끝으로, 근년 들어 일본의 아베정권이 평화헌법 제9조를 개헌해서 전쟁을 할 수 있는 국가를 만들고자 혈안이 된 채 동중국해에서 중국과 영토분쟁을 벌이는가 하면, 우리나라 독도를 두고 억지를 쓰고, 일본 북해도 위쪽 러시아 경계인 쿠릴열도에 군사력을 배치한다는 등 동북아시아 정치정세가 혼란스럽기 그지없습니다. 이를 두고 사람들은 1894년 갑오년의 역사의 갈피갈피를 찬찬히 살펴서 오늘 우리나라가 처한 상황을 잘 타개해나갈 수 있는 교훈을 찾아야 한다는 말들을 많이 하는데, 19세기말에 일어난 동학농민혁명에서 오늘 우리가 얻어야할 현재적 교훈이랄까 이런 점에 대해 말씀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답) 아직도 120년 전의 동북아 구조 그대로라고 생각합니다. 해결책은 남북 간의 화해와 협력을 통해 동북아시아의 대륙세력인 중국과 러시아 그리고 해양세력인 미국과 일본 사이에서 그 이해를 조정할 수 있는 역할을 수행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재의 상황은 남과 북이 각기 해양과 대륙의 어느 한편에 서버리니 구한말 열강의 각축 속에 있던 상황과 똑같은 상황이 연출되고 있어요. 우리가 외교 군사적 측면에서 무엇을 자주적으로 해낼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니까요. 북한의 핵무기를 놓고 일부 언론은 핵무기를 두고 무슨 협상이냐 하는데, 핵을 무기로 제압하려고 하면 한반도는 그야말로 군비경쟁의 중심이 될 수밖에 없어요. 사드를 배치하면 중국도 거기에 상응하는 군사력을 배치할 수밖에 없지요. 산둥반도나 요동 쪽에 사드에 상응하는 군사시설이나 전력을 증강하지 않겠어요? 러시아도 마찬가지고, 그렇게 되면 미국은 또 이를 넘어서는 무기배치가 필요할 것이고... 냉전시대, 미국과 소련이 핵무기로 한반도에서 각축할 때와 똑같은 상황이 재현되는 것 아닌가 우려됩니다. 핵무기가 한반도 있으면 안전하다고 하는데, 만일 전쟁이 발발한다면 각종 최정예 무기가 배치된 곳이 우선적인 타격 대상이 되는 거지요. 결국 피해 볼 사람은 남, 북한이라는 거예요. 그리고 군비경쟁과 전쟁으로 남북문제가 해결될 것 같으면 6.25때 이미 해결되었을 것입니다. 전쟁으로도 남· 북간 대립을 끝낼 수 없는 이유가 예나 지금이나 주변의 열강 때문입니다. 결국 우리는 민족동질성에 호소하고, 민족의 자존과 자주를 공통분모로 해서 남북한이 단결해서 스스로 살길을 찾아가는 것이 중요하지요. 이 길이 유일한 해결 방안이기도 하구요.
문) 이사장님 오랜 시간 좌담에 응해주셔서 고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