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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겨울 26호
보은동학농민혁명계승사업회를 찾아서

보은동학농민혁명계승사업회를 찾아서


일 시: 2016년 11월 3일

장 소: 보은동학농민혁명계승사업회 사무실

대 담: 박달한 | 보은동학농민혁명계승사업회 회장, 문병학 | 기념재단 기념사업부장



 

문) 회장님 반갑습니다. [녹두꽃] 2016년 겨울호 지역대담을 보은동학농민혁명계승사업회와 갖게되었습니다. 먼저 [녹두꽃] 독자들을 위해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답)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저는 충북 보은에 살면서 지역문화 활동에 뜻을 두고 1993년부터 풍물이나 택견 등 전통문화예술 관련 활동을 하면서 우리 보은지역의 동학농민혁명 역사적 의미를 되살리기 위해 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에도 힘을 기울이고 있는 박달한이라고 합니다. 2001년 우리 보은지역에서 전개되었던 동학농민혁명의 역사적 의미를 기리고 계승하기 위하여 보은동학농민혁명계승사업회를 창립하였고, 지금은 제가 계승사업회의 회장직을 맡고 있습니다. 또한, 1996년에는 교육문화단체인 「삶결두레 아사달」이라는 모임을 만들어 전통문화예술 활동을 심화시키고 2000년 들어서 성인문해교육과 방과후학교 등의 활동을 해왔으며, 여기에 더하여 2006년부터는 다문화관련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문) 충청북도, 그 중에서도 보은지역은 동학농민혁명과 아주 깊은 연관이 있지요? 계사년(1893년) 3월에는 전국의 동학교도를 비롯하여 수많은 농민들이 모여 보은집회(보은취회)를 열었던 곳이고, 1894년 12월 18일과 19일에는 우금치전투에서 패배한 이후 전라도 원평·태인까지 후퇴했다가 북상한 동학농민군이 일본군을 맞아 전투를 벌였던 북실전투지(보은군 종곡리)가 있는 역사의 현장입니다. 보은지역에서 전개된 동학농민혁명의 역사적 사실을 대중적으로 알리고, 그 정신을 계승·발전시키기 위해 상당히 오래 전에 기념사업단체를 창립하여 활동을 해오셨지요? 보은지역에서 기념사업단체가 창립되게 된 배경과 이후 전개해온 기념사업 혹은 정신 선양사업에 대해 말씀해주시지요.


답) 1996년 설립된 교육문화단체인 「삶결두레 아사달」 구성원들은 1998년 국민의정부가 들어선 이후 21세기를 맞아 우리 사회에 새로운 이정표를 정립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논의를 진행하면서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관심을 나타내게 되었습니다. 그 때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아우르는 행사를 기획해서 추진하자고 의견이 모아져서 [4331 솟대장승굿 –하늘이 열리고, 이땅에 지킴이가 서다]라는 주제로 행사를 기획해서 추진했습니다. 단기 4331년이라는 연호를 행사명에 넣은 것에서 엿볼 수 있듯이 우리 지역에서는 서구로부터 강제된 ‘근대’라는 정체불명의 문화가 파괴해버린 단군 이래 오천년 이상을 이어온 우리의 고유한 전통문화를 살려야 한다는 뜻을 담고 있기도 합니다. 구성원들의 생각이 이러하다보니 아주 자연스럽게 전국 각 지역에서 반봉건, 반외세 기치를 들고 일어섰던 동학농민혁명에 대해 깊이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잘 알고 계시듯이 동학농민혁명은 낡은 봉건제도를 혁파하여 만민평등의 세상을 만들고자 했던 반봉건 항쟁이자, 함포로 위협하면서 밀고 들어온 정체불명의 서구 근대에 대항한 반외세 민족항쟁이었잖습니까? 그래서 1999년부터 「삶결두레 아사달」 구성원들은 보은지역에 숨쉬고 있는 동학농민혁명 유적지를 찾아가는 행사를 기획하여 추진했습니다. 그것이 ‘4332보은동학굿<북실진달래- 동학으로 가는 길>’이라는 행사였습니다. 2000년‘4333보은동학굿<사람이하늘이니-동학농민혁명만세>’행사를 추진하기 위해 추진위원회를 구성하였고, 그 여세를 몰아 조직을 확대하여 2001년 4월 7일 보은 동학농민혁명계승사업회를 창립했습니다. 이후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활동이 저하되기도 했지만 2002년에는 보은군과 한국문예진흥원에서 나오는 예산을 일정부분 지원받아 ‘보은동학굿’이라는 행사를 새롭게 기획하여 추진하기도 했습니다. 이후로도 보은동학농민혁명계승사업회와 삶결두레 아사달은 보은동학굿을 꾸준히 이어왔습니다. 판이 잘 벌어질 때도 있었고 근근히 명맥만 유지 할 때도 있었습니다. 길위 김창환접주님이 일찍부터 2013년 보은취회 120돌을 준비하자고 하여 2012년에는 새로운 고민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동학농민혁명 119돌, 보은취회 120돌을 맞아서는 이전에 추진해온 기념사업과는 달리 전국적인 연대를 통해 판을 벌이게 되었고 전국적인 추진접주들이 형성이 되었습니다. 보은취회 121돌· 동학농민혁명120돌 때는 채희완선생님을 비롯한 전국 문화패들이 합류하여 ‘동학농민혁명120년 역사맞이 보은생명평화대회’를 성대하게 치르게 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지난해와 올해 2016년에는 보은취회가 지역주민과 전국에서 찾아온 많은 학생들과 접주님들이 함께 참여하는 살아있는 축제로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문) 보은동학농민혁명계승사업회 창립 무렵 보은지역의 사회적인 상황과 동학농민혁명에 보은지역 주민들의 역사인식은 대체로 어떠했는지요?


답) 당시 보은지역에서 활동하는 진보적인 단체로는 농민회와 전교조가 있었습니다. 보은농민회는 1980년대 아주 왕성하게 활동하였으나 1990년대로 들어서면서 조직이 급격하게 약화되어 그 활동이 중단된 상태에 이르렀습니다. 전교조 또한 90년대 들어서면서 지역사회에서의 활동이 미미해졌습니다. 이런 현상은 비단 보은지역 뿐만이 아니라 어느 지역이나 비슷하겠지요. 근데, 우리 보은지역은 보수적 향토정서가 강해서 다른 지역보다 좀 더 심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기때문에 1990년대로 넘어오면서 보은지역에서 동학농민혁명을 기념하는 일도 급격하게 그 동력이 저하되었습니다. 그 무렵을 생각하면 지금도 암담한 생각이 먼저 듭니다.



문) 박회장님 그때가 언제였지요? 기억이 명확하지 않습니다. 제가 보은취회가 열렸던 장내리 들판에 동학농민군을 기리는 장승을 세울 때 그 행사에 참가했었는데... 그때가 몇 년이었지요? 제가 사단법인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사무국장으로 근무할 때였는데, 보은지역 뜻 있는 분들, 예컨대 한국민족문학작가회의 보은지회 지회장님 등이 그 행사에 함께했던 기억이 납니다. 장승을 세우면서 고천문을 읽고 막걸리를 올리는 등등 제례를 올릴 때 기억이 선명한데 언제인지 감감해요. 그 무렵의 기억을 좀 떠올려주시죠.


답) 동학농민혁명 보은집회 터에 장승을 세웠는데 그해가 2000년도였습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제가 그때 가장 열정도 넘치고 해서 굉장히 적극적으로 활동했던 때였던 것 같습니다. 지금보다 훨씬 젊었을 때였으니까 이런저런 것들에 걸림이 없이 생각한대로 밀어붙이면서 일을 적극적으로 추진했었지요. 보은취회 터인 장안(보은군 장내리) 들녘에 세웠던 그 장승에는 비밀이 있어요. 그때 장승을 세우기로 마음먹고 여기저기 장승재목을 구하러 다녔어요. 장승을 깎을 목재를 구입하는 것이 그렇게 쉽지는 않았어요. 1999년 행사 땐 급히 구한다고 구한 장승목재가 수입목이었어요. 근데 우리의 얼을 담아 세울 장승을 수입목으로 깎는 것은 좀 그렇잖아요? 기왕이면 조선소나무면 좋잖아요. 그렇죠? 그렇게 고민고민하고 있는데 어느 날 아는 농민회 선배가 전화를 걸어와 “행사 준비하느라 바쁘지? 틈내서 술 한 잔 하러 와라” 그러는 거예요. 그래서 에이~ 바쁜데.. 그러면서 선배님이 오라니 가야지 어떡합니까. 그래서 머리도 식힐 겸 소주나 한 잔 하자 싶어서 나갔어요. 그날 그 술자리에서 제가 장승목이 수입목이라 걱정이라고 했더니 그 선배가 대뜸 저쪽 자기가 아는 어느 무덤 앞에 장승을 깎고도 남을 만큼 큰 조선소나무가 한 그루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날 바로 그 조선소나무로 대체하여 보은취회 터에 장승을 세울 수 있었어요. 그때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라구요. 아~ 농민군이 내가 장승을 세우려는 일을 돕는가보구나... 기분 좋았죠.(웃음) 그렇게 해서 조선소나무로 장승을 깎아 바람이 심하게 불던 날 허허벌판 논둑길에 세웠어요. 그날 바람이 너무 많이 불어서 어휴... 그날 행사 생각나지요? 와~ 종이술잔이 바람에 날아가 뒤집히고... 대단했었잖아요. 그때 장승을 조각한 사람이 김준곤씨였는데, 제가 북실(보은군 종곡리)에 세울 동상은 피와 한이 서린 곳이니 장승도 숙연한 느낌이 들게 조각하고, 보은취회 터에 세울 장승은 우렁찬 민중의 함성을 떠올릴 수 있도록 표정을 그렇게 조각해달라고 부탁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네요. 김준곤씨는 굉장히 공을 들이고 신명을 다해서 그 장승을 조각했지요.



문) 명 (命)이 다한 그 장승 한 쌍을 제123주년 보은집회 기념행사 때 장례를 치루는 일종의 화장을 한 ‘장승다비식’을 가졌었지요? 장승다비식은 풍파로 인해 헤진 장승을 화장시키는 일종의 장례식을 거행한 것인데, 제 고향이 굉장한 시골이에요. 웃자고 하는 말로 “집 앞마당에서 산토끼가 발맞추는 곳”이라고 말할 정도로 깊은 산골인 전라남도 순천시 승주읍에 있는 선암사 뒷산이에요. 산골마을이라 그런지 마을 앞에 거의 장승들이 세워져 있었는데, 어릴 적 우리 마을의 장승을 불태우는 ‘장승다비식’을 본적이 있어요. 40여 년이 넘는 기억인데 그동안 살아오면서 그 장승다비식을 까맣게 잊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지난 봄 보은취회 기념행사 때 장승다비식을 다시 보게 된 거예요. 그날 갑자기 잊고 있었던 40여 년 전의 기억이 선명하게 떠올랐고, 급속도로 진전된 소위 근대화 과정에서 고유한 우리의 전통문화가 사라지는 줄도 모르고 살아왔다는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역 기념사업단체에서 동학농민혁명의 역사적 의미를 복원하고, 왜곡되고 축소된 역사를 되살리는 일 못지않게 근대화 과정에서 잃어버린 우리의 귀중한 문화전통을 되살리는 것도 중요하겠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래서 언젠가는 박 회장님과 장승다비식에 대한 얘기를 나눠보고 싶었는데, 그 행사를 기획하면서 장승다비식을 포함시킨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요? 기획자로서 의도랄까? 편하게 생각을 말씀해주시지요.


답) 지금으로부터 16년 전 2000년 10월 29일 보은동학기념사업추진회와 문화마당 아사달, 보은민예총이 여러 벗들과 민중의 소박한 염원을 담아 “사람이 하늘이다, 동학농민혁명 만세”를 외치면서 세웠던 장승입니다. 이 장승 한 쌍은 지난 14년 동안 보은취회 터에서 밤이나 낮이나 할것 없이 세찬 비바람과 눈보라를 맞으며 그곳을 지켰지요. 그런데 그렇게 의연하게 서 있던 장승이 2년 전 모진 세월을 이겨내지 못하고 끝내 쓰러져버렸습니다. 그래서 그 장승을 보은 동학농민혁명 기념공원으로 옮겨 공원 한쪽 구석에다 눕혀놓았습니다. 이후 이곳을 다니면서 자꾸 그 장승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사람들의 염원이 깃든 장승인데, 저렇게 구석에 처박아놓은 것은 큰 죄를 지은 것 같고, 그렇다고 어디다가 함부로 내다버릴 수도 없고... 그래서 생각한 것이 보은취회를 기념하는 대중적인 행사 때 장례를 치러줘야겠다 생각했고, 그 생각을 올해 봄에 실행한 것입니다. 특별한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니고, 자연에서 왔으니 자연으로 되돌려드리는 것이 이치에 맞을 것 같아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문) 수운 최제우 선생이 관군에게 체포되어 1864년 3월 10일 경상감영이 있던 대구 장대에서 순국하신 후 해월 최시형 선생께서 태백산으로 숨어들어 동학을 포교하였지요. 그러다가 삼남지방 등으로 동학교세가 급격하게 확산되자 1880년대 중반 해월 선생께서 소백산맥 속리산자락인 이곳 보은 장내리에 도소를 설치하고 자리를 잡았지요? 이곳에서 육임제 등 동학교단 조직체계를 정립했는데, 여기에 대해 아는 대로 얘기해주시기 바랍니다.


답) 동학은 조선말 19세기 후반 외세의 침탈과 삼정 (전정田政·군정軍政·환정還政)의 문란, 탐관오리의 횡포 등으로 백성들의 삶이 도탄에 빠져 고통에서 신음하던 때 1860년 4월 5일 수운 최제우 선생이 사람이 하늘을 모시고 있다는 시천주(侍天主)사상을 바탕으로 하는 보국안민 (輔國安民: 나라를 바로잡고 백성을 편안케 하다)의 도(道)로 창시 (創始)한 것입니다. 보은은 1885년 5월 동학 2대 교주 해월 최시형 선생이 보은 장내리에 은거하면서 동학포덕의 중심지가 되었고, 1887년 6월경에 육임소(六任所)가 설치되어 명실상부한 동학교단의 중앙본부 역할을 하게 된 역사적인 고장입니다. 또한, 1893년 3월 11일에는 전국 각지에서 사람답게 사는 새로운 세상을 꿈꾼 동학교도와 민중 3만여 명이 장내리에 모여 취회를 열고 보국안민 척양척왜로 혁명의 깃발을 높이 들었던 곳이기도 합니다. 보은취회 때 수만 명이 모였지만 가래침조차도 함부로 뱉지 않고 대소변을 보면 반드시 땅에 묻어 머문 자리는 흔적도 남지 않을 정도로 청결하였으며, 행동이 질서 정연하여 동학도의 행위가 올바르니 선무사 어윤중도 보은취회를 민회 (民會)로 보고 조선조정에 무력으로 진압하지말 것을 건의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보은취회를 통해 이 땅의 농민들이 주인의식을 공고히 하게 되었으며, 자신감을 갖고 보국안민의 의지를 더욱 다지게 된 계기가 되었지요.



문) 동학농민군이 공주 우금치전투에서 일본군의 근대적인 신무기를 극복하지 못하고 쓰러진 후 후퇴하면서 논산 황화대전투, 원평 구미란전투, 태인전투 등을 벌였으나 계속 패배하였습니다. 갑오년 11월 25일 (음력) 원평 구미란전투에서 패배한 동학농민군은 태인 쪽으로 후퇴하여 다시 27일 태인의 주산인 성황산, 한가산, 도리산 등 9개 산봉우리를 장악하고 일본군과 관군 연합부대를 맞아 싸웠으나 이 전투에서도 패배하고 말았습니다. 이로써 동학농민군은 주력부대를 해산, 이른바 남접 농민군은 광주, 화순, 능주, 나주 등을 거쳐 전남 장흥으로 내려갔고, 북접농민군은 임실을 거쳐 무주, 황간, 영동, 청산 등을 거쳐 보은으로 올라왔지요. 그래서 12월 16일 보은관아를 점령하고, 그 이튿날인 17일에는 종곡리 (북실마을)로 이동하여 밤부터 18일까지 일본군과 상주 소모영 부대 등과 대접전을 치렀습니다. 주한일본공사관기록이나 토비대략, 소모사실 등의 사료들을 통해 엄동설한에 북실마을 산자락이 온통 시산혈해를 이루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데, 그래서 보은계승사업회에서 한동안 겨울에 위령제를 모셨었지요? 몇 년도였던지? 그 위령제 때 추위에 아주 덜덜 떨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 제례를 봄철 보은취회 행사로 통합시켰지요?


답) 2000년대 초반기에 4년 정도 12월 (음)에 위령제를 올렸었지요. 너무 추워서 그 제례를 멈추고, 대신 2007년부터 보은군에서 군비를 들여 건립한 보은 동학농민혁명 기념공원 안의 기념탑 앞에서 4월에 제례를 올리고 있습니다. 보은 동학농민혁명기념공원은 보은군에서 약 3천여 평의 부지에 주차장, 기념탑 등을 비롯한 다양한 기념시설물을 설치하여 완공했지요. 기념공원은 마지막 전투인 북실전투가 벌어진 종곡리 앞에 위치해 있으면서 속리산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자리 잡고 있어서 보은지역 동학농민혁명사를 알리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매년 보은취회 기념행사를 펼치고 있는데, 보다 많은 사람들이 참여해서 갑오선열의 정신을 기리고 계승할 수 있도록 12월 제례를 이 행사와 통합시켜 추진하고 있습니다.



문) 박 회장님은 1990년대 초반기부터 20년이 넘도록 보은지역 동학농민혁명의 역사적 의미는 물론이고, 동학사상이 갖고 있는 의미를 계승하기 위한 많은 일들을 추진해온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처럼 동학농민혁명 정신선양을 추진하면서 느낀 점들을 얘기해주시기 바랍니다.


답) 어찌 보면 오래됐다고 볼 수 있고 또, 달리 보면 얼마 안 되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동학농민혁명 정신 선양사업을 추진하면서 이 피 흘림의 역사를 오늘 날 살아있는 굿판으로 승화시키자. 그렇게 해서 우리의 밝은 미래사회를 선도하는 솟대로 삼을 수 있도록 갑오선열들의 정신을 계승하자 뭐 이런 생각으로 기념사업에 뛰어들었고,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별로 변한 것이 없습니다. 저는요, 동학농민혁명은 단순히 1894년의 사건만을 바라보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동학의 개벽사상은 단지 동학, 우리나라만의 사상이 아니라 인류가 추구해야할 개벽의 사상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동학을 통해 좀 더 원대한 꿈을 꿀 수가 있다고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박달한 보은계승사업회 회장


문) 지난 1994년 동학농민혁명 백주년을 전후한 시기에 기념사업의 방향과 목표는 반란사건으로 역사의 뒤안길에 버려진 역사적 의미를 혁명으로 복원하기 위한 것에 초점이 맞춰져 전국적으로 ‘역사바로세우기’ 운동으로 전개되었습니다. 그 결과물이 2004년 특별법 제정인데, 특별법 제정에 따라 이제는 동학농민혁명의 역사적 의미를 기리고 계승하기 위한 기념사업의 방향과 목표도 달라져야 할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이전시기에는 조선왕조와 일제강점기, 그리고 세계사적 차원의 동서냉전체제시기를 거치면서 왜곡되고 축소되어온 동학농민혁명의 역사적 사실을 복원하기 위한 학술연구 등에 중점을 두었다면, 21세기 이른바 문화의 세기를 맞아 이제는 동학농민혁명의 숭고한 애국애족 정신을 범국민적으로 확산시키기 위한 문화콘텐츠 활동 등으로 방향전환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보는데, 박 회장님 생각은 어떻습니까?


답) 아주 옳으신 말씀입니다. 동학, 동학농민혁명은 단순히 지난 역사로 보는 것이 아니고 우리 사회 미래를 열어갈 수레요, 솟대요, 열쇠라는 인식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봅니다. 시대적 고민과 사회적 고민을 함께해나갈 때만이 동학농민혁명 정신선양 사업의 미래가 열린다고 봅니다. 처음에 ‘솟대를 세우자 ’막연히 민족·민중·지역이란 화두를 바탕으로 솟대 (지향)를 세워보자는 취지의 행사를 했던 것이 그 다음해에는 그 솟대를 동학에서 찾아보자고 생각을 갖게 되었던거죠. 우리 사회의 많은 이론들이 서구에서 넘어온 것이지 않습니까? 이제는 우리 역사 속에서 우리 것으로 텍스트를 삼아 새로운 사회운동의 길을 모색해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문) 끝으로 못다 한 얘기라든가, 기념재단 혹은 전국의 기념사업단체에서 활동하고 계시는 분들께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시면 해주시기 바랍니다.


답) 늦은 감이 없지 않지만, 기념사업의 대선배인 문부장님이 기념재단에 들어가서 일을 하게 된 것이 이제라도 잘 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동학농민혁명 정신의 전국화·세계화가 필요한 시점인데, 문부장님이 지역의 기념사업단체에서 20년 넘게 기념사업에 몸담아 왔으니까 누구보다도 지역단체의 사정을 잘 알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심적으로 기념재단이 많이 가깝게 느껴지고 의지가 되고 그렇습니다. 그래서 기념재단에서 지역단체를 이렇게 찾아온 것도 참 좋습니다. 인터뷰 형식으로 이렇게 전국의 단체들과 원활하게 소통하는 것도 지역단체 활동의 내용을 기록으로 남기고, 지역에서 사업을 추진하면서 갖게 된 노하우나 경험 등을 서로 나누는 자리가 되어 기념사업의 전국화 구현에 아주 중요한 기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유족 선생님들과 전국에서 기념사업을 추진하고 있는 많은 분들, 그리고 기념재단의 앞날에 밝은 빛이 가득하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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