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소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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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겨울 26호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최성칠의 손자 최정길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최성칠의 손자 최정길



 

문) 반갑습니다. 지난 10월 11일 서울 용산구 [백범김구기념관]에서 열린 제122주년 동학농민혁명기념대회 때에 수고 많으셨지요? 덕분에 전국 각지의 참여자 유족 분들이 많이 참석해서 행사가 성황이었습니다. 현재 전국동학농민혁명유족회 수석부회장을 맡고 계시죠? 먼저 [녹두꽃] 독자들에게 간략하게 본인의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답) 안녕하세요. 저는 전국동학농민혁명유족회 수석부회장 최정길입니다. 부회장으로서 우리의 현안사업인 동학농민혁명 기념일 제정과 기념공원 조성사업 그리고 참여자 조사·발굴사업 및 추가 유족등록 신청 등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이루지 못한 채 금년 한 해도 저물어갑니다. 평생 투철한 군인정신을 가지고 국방임무 수행을 위해 몸담아 온 한 사람으로서 사명감을 가지고, 동학농민혁명 정신선양을 위해 꾸준히 노력해왔지만 큰 벽에 부딪히고 보니 한계를 느끼곤 합니다. 그럼에도 현안 문제에 대해서는 계속해서 관심을 가지고 꾸준히 노력하겠습니다. 동학농민혁명 유족 여러분들 다함께 힘을 모읍시다.



문) 조부이신 최 성자 칠자 참여자께서는 동학농민혁명 당시 전남 화순에서 활동하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조부께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했다는 사실은 언제 알게 되었는지요?


답) 제가 군에서 정년퇴임을 하고 난 후, 2006년도 여름으로 기억합니다. 작은집 형님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는데, 저에게 MBC뉴스를 봤느냐고 물으셨어요. 보지 못했다고 무슨 내용이었냐고 되물으니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얘기를 하시면서 우리 할아버지께서 동학농민혁명군으로 활동을 하신 게 틀림없다고 말을 해줘서 그때 처음 알게 됐습니다. 그때가 특별법이 제정된 지 몇 년 지난 뒤니까 지금으로부터 십여 년쯤 전에 알게 된 것이지요.



문) 그 이외에 집안 어른들로부터 조부께서 어떤 활동을 하셨는지 들은 얘기는 없으신지요?


답) 할아버지께서 국가와 민족을 위해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셨는데, 그동안 아무런 말씀이 없으셨는지 궁금했습니다. 2006년도 할아버지께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였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 이렇게 훌륭한 일을 하셨는데 왜 후손들에게 관련된 이야기를 안 하셨는지 아버지에 대한 원망도 조금 있었어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각종 행사 및 학술대회에 참여하며 조금씩 이해가 되었습니다. 그 당시는 워낙에 동학농민혁명에 대해 쉬쉬하던 시절이었으니까 행여나 가족들에게 피해가 되지 않을까 조심하셨던 것 같아요. 할아버지의 참여 사실을 알게 된 후 화순의 동학농민혁명의 거괴 최 성자 칠자를 찾아보니 갑자년 12월 초 전라남도 화순군 동복 출신으로 기록들이 남아있더라고요. 12월 초에 동학농민군 220명이 일군본과 전투를 벌였는데 전투하던 중 157명은 포살되었고, 63명만이 겨우 살아남았다고 해요. 그 때 살아난 사람들 중에 우리 조부님도 계셨는데, 불과 며칠 후인 12월 7일 일본군에게 붙잡혀 12월 12일 전후 처형되었다는 기록을 서울대 규장각 문서고 사료를 통해 확인했습니다. 저희 고향에서 화순의 오성산이 보이는데, 작은형님께서 우리 할아버지가 저기 보이는 오성산에서 말을 타고 다니시면서 전투에 참가하셨다가 체포되어 장렬하게 순직하셨다는 이야기를 주민들에게 전해 들었다고 합니다. 조부님은 현재 화순 선산에 모셔져 있습니다. 방금 제가 장렬하게 순직하셨다고 이야기를 했는데 사실은 작두, 왜 있잖아요? 옛날에 시골마을에서 풀을 베다가 자를 때 쓰는 그 무지막지한 장비 작두 말이에요. 그 작두로 조부님 몸을 일곱 토막으로 잘랐다고 합니다. 작두로 일곱 토막을 낸 뒤 마대에 담아 내버리고 간 것을 주민들이 아버지에게 얘기해줘서 옮겨 모셨다고 해요. 생각만 해도 아주 치가 떨립니다. 일본 놈들이 천인공로할 만행을 자행한 거죠. 갑오년 12월 초 최경선 장군이 인솔해 움직였던 동학농민군은 220명쯤 되었는데, 전투에서 일본군에게 밀려 후퇴를 거듭하다가 마을로 은신을 했는데, 마을 이장 오씨가 밀고를 해서 체포를 당했다고 합니다. 체포된 지 5일 만에 작두로 잔인하게 처형이 되었다고 합니다.



문) 아버님께서 아무 말씀을 안 하시고 세상을 떠나셨다고 했는데, 혹시나 조부께서 남긴 서책이나 동학농민혁명 관련 유물 등이 전해져오는 것은 없는지요?


답) 제가 세살 때 저희 가족은 화순에서 나와 광주에서 생활을 했어요. 그런데 그 후에 얼마 지나지 않아 큰 홍수가 나서 생가가 쓸려 내려가 버렸어요. 그래서 아무런 흔적이 남아 있지 않아 너무나 안타깝습니다. 생가가 있었더라면 서책이나 관련된 유품 등이 얼마만이라도 남아 있어서 제가 볼 수 있었을 텐데 아예 집이 흔적조차 없이 사라져버렸으니 관련 유물이나 조부님의 유품 등이 아무 것도 전해져오지 않습니다.



문) 지금으로부터 122년 전인 1894년 동학농민군은 낡은 봉건제도를 개혁하고, 일본 제국주의의 국권침탈에 맞서 하나뿐인 목숨을 걸고 결연히 떨쳐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동학농민군은 일본군의 근대적인 신무기를 극복하지 못한 채 스러지고 말았습니다. 이후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는 등 우리나라는 일제강점기로 접어들면서 역사가 극심하게 축소·왜곡되면서 애국자가 매국노로, 매국노가 애국자로 뒤바뀌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펼쳐졌습니다. 그 과정에서 우리나라 민주주의 시원이자 애국애족 정신의 표상인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는 ‘반란군’으로 매도되었습니다. 이처럼 부침이 심했던 우리나라 근현대사를 겪으면서 참여자 후손들은 반란군의 자식이라는 멍에를 뒤집어쓴 채 숨죽이면서 살아야했는데, 집안 어른들로부터 조부께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했다는 사실 때문에 피해를 입었다든가 하는 얘기를 들은 적은 없는지요?


답) 글쎄요. 집안 어른들로부터 피해를 입었다는 말씀은 직접 못 들었습니다. 그러나 좀 전에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동학농민혁명 참여사실이 드러날까 무서워 쉬쉬했기 때문에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았겠지만 어찌 우리 집안이라고 피해가 없겠습니까? 어머니 말씀에 의하면 할아버지께서는 젊은 시절에도 국가관이 투철하셨고, 성품이 아주 곧은 분이셨다고 합니다. 민중의 고난을 고민하셨던 분으로 1894년 3월 25일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셨고 그 길로 집에 돌아오시지 못하여 할아버지 제사를 3월 25일에 모시고 있습니다. 나중에 1894년 12월 초 화순 오성산전투 이후 체포되어 작두형을 받으셨다는 내용을 알게 된 것이지요. 증조할머니께서 할아버지의 태몽 꿈을 꾸셨을 때, 북두칠성을 보시어 할아버지 존함을 별 성(星) , 일곱 칠 (七)자로 지었다고 하셨습니다. 훌륭하신 할아버지 기를 받아 형님께서는 경찰서장을 하셨고, 저 또한 장교로 복무하였으며, 작은집 조카는 현재 공군장군 소장으로 복무하고 있습니다. 잠깐 저희 집안 선조들의 활동사항에 대해 이야기 하겠습니다. 저희 본관은 황해도 해주 최가이고, 고려전기에 활동하신 최충 정치인의 아버지가 저희 시조입니다. 최충 (984~1068) 할아버지께서는 과거에 급제하여 문화시중, 현재 직급으로는 국무총리를 43세에 역임하시고 72세 벼슬에서 물러나실 때까지 관직생활하시면서 84세에 생애를 마치셨습니다. 최충 정치인 후손으로 최경회 장군(1532~1593)이 계십니다. 최경회 장군은 조선중기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동하셨고, 진주성을 지키다 전사하셨습니다. 선조들의 활동사항을 보면 저희 집안은 나라를 위해 헌신하신 분들의 피를 이어받아서 그런지 국가에 대한 사명감이 남다른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문) 동학농민혁명은 지난 한 세기 동안 내내 반란사건으로 치부된 채 역사의 뒤안길에 버려져왔습니다. 그러다가 천만 다행으로 1986년 서울에서 [역사문제연구소]가 설립되면서 소장학자들이 동학농민혁명 연구를 본격화되었습니다. 그분들의 연구 성과에 힘입어 1980년대 후반기로 접어들면서 전국 각지에서 동학농민혁명 역사바로세우기 운동을 추진하는 기념사업단체들이 창립되어 1백주년 기념사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습니다. 한편으로는 역사학계 연구자들과 기념사업단체가 힘을 모아 전국에 뿔뿔이 흩어져있는 참여자 유족을 찾아 나섰고, 1993년에는 드디어 ‘동학농민혁명유족회 창립준비위원회’를 발족시킬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동학농민혁명 백주년이던 1994년 봄에 서울 고려대 교우회관에서 유족회가 정식으로 출범하여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지요. 이렇게 해서 전국의 기념사업단체들과 유족회 회원 분들이 결합되어 동학농민혁명 백주년 기념사업을 성공적으로 치렀고, 그 결실로 2004년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어 실로 110년 만에 반란사건으로 치부되던 동학농민혁명의 역사적 의미가 대한민국 국회에 의해 명실상부하게 그 복권이 이루어졌습니다. 선생님께서는 특별법이 제정된 이후 참여자 유족 등록을 거친 후 동학농민혁명 유족회 활동에 본격적으로 나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특별법 제정에 대한 감회가 후손으로서 남다를 것 같은데 어떻습니까?


답) 참 오랜 세월 동학농민군은 반란군으로 매도가 되었습니다. 우리 선조들은 부정부패한 관리들을 없애고 탐관오리를 제거해서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만들고자 했고, 일본이 경복궁을 무단점령하고 청일전쟁으로 도발하는 과정에서 반외세를 외치며 일어난 것 아닙니까? 그런 측면에서 의로운 혁명인데 오랜 시간 반란군으로 매도되어 왔다는 사실이 너무나 가슴 아픕니다. 방금 질문을 듣고 보니 유족의 한사람으로 참 부끄러워요. 제가 2010년도부터 유족회에 5년 이상 몸담아 왔는데 총무부터 시작해서 국장, 총장, 지금은 수석부회장으로서 많은 일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명예회복심의위원회가 2004년 9월 17일에 설치되었다가 2009년 12월 31일부로 활동이 종료되었습니다. 현행 특별법 시행으로 등록을 마친 참여자는 498명이고, 후손이 나타나지 않은 참여자 3,162명입니다. 총 3,660명이 확인되어 등록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에는 100만 명 이상이 참여해서 30여만 명이 희생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후손으로 확인되어 등록된 사람의 숫자가 이것밖에 안 된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지금 명예회복심의위원회 활동이 종료되면서 유족등록 권한이 현재 특수법인 기념재단으로 승계가 되어 지속적으로 이어져야 하는데 현행법 상 제한이 있습니다. 그렇게 때문에 특별법을 서둘러 보완하거나 정비하여 참여자 발굴사업 및 유족 등록 신청을 추진할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유족 등록이 다 되어서 20-30만 명 정도가 되면 국회의원이나 정부에서도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되지 않겠습니까? 현재는 1만 3천 명 정도밖에 되지 않으니까 정부에서 관심을 덜 갖는 것 같습니다. 유족 등록 사업을 지속적으로 해나간다면 많은 참여자 후손들이 확인되어 유족회에 들어올 수 있을 것입니다. 참여자 유족 등록이 서둘러서 재개되었으면 합니다.



문) 전국동학농민혁명유족회 수석 부회장으로서 동학농민혁명 정신을 선양하느라 동분서주하시는데, 어떤 부분에 주안점을 두고 활동하고 계신지요. 또 개인적으로나 전국 동학농민혁명유족회 차원에서 올해는 반드시 이루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바람 있다면 말씀해주세요.


답) 먼저 유족의 한사람으로서 책임을 통감합니다. 말씀드린 것과 같이 기념일 문제는 민주주의 방식에 의해서 충분한 검토 및 논의가 다 이루어졌습니다. 문화체육관광부는 하루속히 행정안전부로 발송해주시기 간곡히 요청하며, 아울러 기념공원예산 배정, 참여자 및 유족 추가등록 신청에 있어서도 문화체육관광부와 기념재단이 관심을 가지고 법 개정을 서둘러 추진해주시기 바랍니다. 우리 할아버지들을 정부에서 지정한 추모공원으로 모셨으면 하는 것이 우리 유족들의 간절한 소망입니다.



문) 이전 동학농민혁명 백주년을 전후하여 전국 각지에서 창립된 기념사업 단체들은 협의체를 구성하여 일제 강점기 등을 거치면서 반란사건으로 왜곡·축소된 혁명의 역사적 복원을 위해 대중적인 기념사업을 적극적으로 추진했습니다. 그 결실로 특별법 제정되기에 이르렀고, 이후 특별법에 의거하여 설립된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은 동학농민군이 내세웠던 만민평등과 차원 높은 인본주의 정신의 현재화를 위해 전국화·세계화·미래화를 기치로 정신선양사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습니다. 기념재단에 바라고 싶은 점이 있으면 말씀해주십시오.


답)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은 2010년 2월 24일 문화체육관광부로부터 특수법인으로 인가를 받아 설립된 재단입니다. 현재 이르기까지 유족의 현안문제인 기념일 제정, 기념공원조성 사업, 참여자 발굴사업 및 추가 유족등록 뭐하나 제대로 진행한 것이 없어 참으로 유감스럽습니다.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 제9조 4항 2절 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 및 추모사업과 4절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와 그 유족을 위한 명예회복사업을 추진해야 한다고 명시되었습니다. 기념재단은 유족 때문에 설립된 재단입니다. 기념일 제정, 기념공원 조성사업,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발굴사업 및 유족 등록신청은 유족의 염원입니다. 동학농민혁명 정신선양사업을 추진하기 위해 특수법인으로 설립된 기념재단에서 사명감을 가지고 사업들을 추진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문) 동학농민혁명은 우리나라 민주주의 뿌리이자 구국애민 정신의 표상입니다. 이처럼 뜻 깊은 갑오년의 역사를 이루어낸 참여자와 그 후손, 그리고 반란사건으로 치부된 암울한 역사를 떨쳐내고 혁명으로 복권시켜내고자 20여 년 가까이 각 지역에서 지원금 한 푼 없이 기념사업을 추진해온 기념사업단체 임원과 회원님들의 바람에 부응하여 나름대로 기념재단은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일들이 성과적으로 수행되기 위해서는 여러 여건들이 잘 맞아들어가는 것도 중요하다고 여겨집니다. 특히, 무엇보다도 사업예산을 제때 적실하게 확보하는 일이 참 중요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 기념재단은 관계기관 등과의 원활하게 소통하면서 열심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또한, 지속적으로 유족 등록사업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특별법 개정이 필요하기 때문에 문화체육관광부, 국회 등과 협의를 통해 특별법 개정안을 현재 국회에 상정, 논의를 진행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지금까지도 그랬지만 앞으로도 기념재단은 참여자 명예회복을 위한 기념사업은 물론이고, 전 국민적으로 갑오선열들의 숭고한 정신을 확산해나가는데 혼신의 힘을 기울여나갈 것입니다. 많은 지원과 성원, 격려와 자문을 부탁말씀 올립니다. 끝으로, 바쁘신 중에도 이렇게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면 해주시기 바랍니다.


답) 끝으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우선 저에게 이런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인터뷰 내용 중에 다소 불편한 표현이 있더라도 양해바랍니다. 저의 개인적인 생각이 아님을 분명히 말씀드리고 다시 한 번 기념재단이 왜 설립되었는지 깊이 생각해보셨으면 좋겠습니다. 동학농민혁명 관련행사에 참석하고 싶어도 연령이 높아 몸이 불편하신 유족 분들, 또 세상을 떠나신 유족 분들께 현안문제를 해결해드리지 못해 참으로 마음이 아픕니다. 우리 유족회도 부족한 점이 많습니다. 법에 정해진 정신선양사업이 하루빨리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정신 선양사업을 위해 애쓰는 기념재단 임직원 모든 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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