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고은 인터뷰
이번 호 명사대담은 고은 시인을 만나 역사와 사상, 문학 전반에 대한 폭넓은 대화로 진행되었다.
· 일 시 : 2016년 9월 5일
· 장 소 : [고은재단] 경기도 수원시 영통구
· 대 담 : 고은 시인, 문병학 기념사업부장

고은 시인
문) 선생님 오랜만에 찾아뵈었습니다. 지난달 말 슬로베니아에서 펼쳐진 시축제 (詩祝祭)에 다녀오셨지요? 아직 여독이 풀리기 전일 텐데 이렇게 시간을 내주셔서 고맙습니다. 먼저 [녹두꽃] 독자들을 위해 선생님 근황을 간단하게 소개해주십시오.
답) 먼저 나는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에 대한 가책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 기념사업회의 창립 무렵 첫 회장직을 제안 받았으나 사절한 일 때문입니다. 그 당시 내 문학에 대한 절박성과 또 여러 가지 세계 관련 임무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줄곧 내 고향의 이 위대한 신세계를 위한 농민혁명을 기리는 일에 내 실천을 바치지 못한 사실을 뉘우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다행히 내가 아닌 이이화형 (兄)이 이 사업의 초대 (初代)를 잘 꾸려가셨습니다. 그동안 나 자신에 대한 고백이나 어떤 응답은 한두 번이 아니게 거듭되어 왔습니다. 그래서 어떤 세상의 여러 문제에 대한 내 판단이나 견해 표백의 담론은 좋아해도 나 자신에 대한 것은 단념하고 싶습니다. 다만 지난날의 내 삶에 대해 무조건적인 자기찬성으로 일관하는 것은 무척 싫습니다. 그래서 나는 뉘우치고 있습니다. 뉘우친다고 해서 고쳐지는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뉘우침조차 없어서는 안 될 것 같아서 말입니다. 앞으로 남은 생애는 모르겠지만, 지금까지 살아온 날들을 통틀어서 시인으로서 창작에 내가 얼마나 충실했는가 라는 자문(自問)에는 어떤 대답을 할 수가 없을 정도로 충실하지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단정을 하는 건, 사람들은 내가 많은 작품을 썼다고 하지만 스스로를 돌아보면 작가로서의 시간보다 작가의식을 놓아버린 시간이 더 많지 않았나 싶기 때문이지요. 1960년대는 허무 속에서 귀중한 시간을 낭비하고 거의 술집에서 보냈습니다. 1970년대 이후에는 우리 민족의 현실과 모순덩어리였던 한국사회를 변혁해야한다는 돌연한 현실의식으로 바람 찬 마당에 뛰어들어 정작 작가로서의 시간을 너무 갖지 못했습니다. 그나마 틈나는 시간을 내어 멈추지 않고 작품을 써온 것이 스스로 갸륵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만족스럽지 않습니다. 그래서 나는 요즘 어떻게 작가의 시간을 충실하게 보내야 하나 하는 고민을 많이 합니다. 작가의 질은 시간의 질이기도 합니다. 지난 20년 동안 외국으로부터 시축제와 문학강연 등의 초청을 받아 나다닌 게 80-90회쯤은 될 거에요. 수십 개 나라를 다녔는데, 그런 시간에는 아무래도 제대로 된 작품을 쓰지는 못합니다. 문학 강연을 하고 문학 관련 공연에 참석하는 것은 독자와 만나는 시간일 뿐 작품을 쓰는 시간도 공부하는 시간도 아니지요. 그 화려한 무대들은 의미야 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창작의 시간을 허비하는, 큰 결핍의 시간입니다. 그래서 앞으로는 해외초청을 받아들이는 일을 줄이려고 합니다. 어떤 초청은 미루기도 하고, 또 어떤 초청은 사양하기도 하는데, 사양하면 무척 섭섭해 해요. 가령 중남미의 어떤 나라에서는 우리나라가 가난하고 구석진 곳에 자리 잡고 있어서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 건가라는 항의도 나와서 참 곤혹스러울 때도 있습니다. 작년에는 6번의 해외 일정이 있었는데, 올해도 이미 5번의 해외 초청에 다녀왔어요. 루마니아, 중국 항저우, 슬로베니아에 이어 9월 중순에는 미국 국회도서관과 조지 워싱턴대학교에서 시행사가 있었고, 10월 초에는 대만에서 초청이 있어서 다녀왔습니다. 11월 하순에는 중국의 심천과 광저우 시축제에 가야 합니다. 기왕에 약속된 것이어서 어쩔 수 없어요. 내년 상반기에 초청받은 스코틀랜드의 시축제는 그 전에 로마문학제에 꼭 참석해야 할 일이 생기면서 후년으로 미루었습니다. 그밖에도 베트남과 프랑스 등 몇 나라의 초청과 행사가 있지만 참석할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앞으로는 시간을 잘 짜서 작가로서의 시간을 최대한 늘리려고 마음먹고 있습니다. 가능하면 집에서 공부하고, 글 쓰는 시간을 많이 가지려고 합니다.

문) 다른 사람도 아니고, 시집을 포함해서 수백 권의 저작물을 상재하신 선생님께서 작가로서 창작활동에 모든 것을 다 쏟지 못했다고 스스로 반성하시니 저처럼 창작에 게으른 후배들은 낯 뜨겁고,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대담 시작하자마자 회초리를 맞고 시작하니까 정신이 번쩍 드네요. (웃음)
답) 우리 근·현대 문학사를 보면 작가들의 생애가 거의 중단되었습니다. 동시에 작품도 중단되었지요. 이를테면 김소월 시인은 30대 초에 자살했고, 이육사는 한참 작업할 나이에 옥에 갇혔다가 생을 달리했습니다. 윤동주도 20대 후반에 옥사(獄死) 했지요. 이상(李箱)도 스물일곱에 객사(客死) 했고, 정지용 시인도 제 명을 다하지 못하고 총살당했습니다. 월북한 게 아니라 이쪽에서 총살당한 것이라고 최근에 밝혀졌습니다. 이처럼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극심한 부침 (浮沈)으로 인해 남긴 업적이라는 게 겨우 얄팍한 시집 한두 권, 시집 한 권에 수록된 시가 30편 정도인데, 이렇듯 한국 근·현대 문학사 자체가 중단된 상태, 미완의 상태라고 볼 수 있지요. 사람들이 나를 다작(多作) 시인으로 말하기도 한다는데, 그건 아닙니다. 우리 근·현대문학사에 대비해 봤을 때 내가 쓴 작품을 많다고 느껴질 수는 있겠지만, 내가 쓴 작품은 결코 많은 게 아닙니다. 도리어 가난하지요. 빅토르 위고의 시도 몇 천편이 됩니다. 괴테의 작품도 엄청나게 많습니다. 앞서 얘기한 것처럼 세계문학사에 비춰봤을 때 우리나라 작가들의 작품은 보편적인 함량을 달성한 예가 거의 없습니다. 가령 홍명희의 『임꺽정』도 장편서사의 세계인데 미완으로 끝난것을 북에 있는 손자가 나중에 완성시킨 거 아닙니까? 박태원의『갑오농민전쟁』도 미완이었는데 북쪽에서 누군가가 마무리해서 완간됐지요. 이렇게 우리나라 작가들의 생애는 온전하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우리나라 근·현대사가 세계사의 모순이 다 모여드는 협곡이기 때문입니다. 과거 이 땅에 살았던 작가들은 비운의 삶을 살기도 했지만 자신의 운명에도 소홀했고 때로는 그런 시대의 격랑에 대응하는 힘이 모자란 경우도 있었습니다. 상대적으로 나는 한국전쟁 이후 불완전하지만 휴전된 체제에서 살아왔고, 혼란스러운 군부독재를 거치면서 불안한 당대의 체제가 일관되게 이어져 내려오는 동안 시련 속에서도 작품을 쓸 기회는 수시로 보장된 셈이었습니다. 내가 많은 작품을 창작한 것이 가난하기 이를 데 없었던 우리 문학사의 결핍을 조금이라도 메워야 한다는 사명감에서 비롯된 측면도 있다고 스스로 의미를 부여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나는 지극히 사적인 나의 문학행위가 공적인 의미로 확대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태도가 한국에서 태어나서 살아가는 시인이나 작가들이 견지해야할 중요한 자세 중의 하나라고 생각하고 습니다.
문) 수년 전에 4,000편이 넘는 작품으로 이루어진 대하드라마 시집 『만인보』(萬人譜)를 완간 하셨지요? 지난 1980년 중반에 시작해서 30여 년이 걸린 『만인보』를 두고 문학평론가를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이 “20세기 한국문학의 빛나는 역작”이라고 스스럼없이 말하면서 “고은의 문학세계는 극심한 굴절과 부침 (浮沈)이 유난스러웠던 한국 근현대사 그 자체”라고 평가합니다. 이런 반응에 대한 선생님의 생각을 듣고 싶습니다.
답) 내가 쓴 작품에 대해 주어지는 여러 의미부여 등은 어느만큼 받아들입니다. 그렇지만 나는 마음속으로는 『만인보』를 아직 끝내지 못했습니다. 나는 80년대 중반 감옥에서 풀려나와 결혼한 후 그 황홀했던 시절에 『만인보』 작업을 시작했어요. 광야에서 살았던 지난 날 같았으면 시작도 못했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 무렵 나에게는 책이 꽂혀있는 책꽂이와 원고지가 놓여있는 집이라는 곳이 있었습니다. 꽃피는 마당도 있었지요. 의욕이 많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만인보』작업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만인보』는 사실 내가 평탄한 일상적인 삶에서 생각해낸 것이 아니고 죽음을 앞둔 극한 상황에서 나온 절실한 구상이었습니다. 1980년 전두환 일당의 신군부가 나를 내란음모죄 계엄위반 및 계엄 교사 등의 중죄로 몰아 육군교도소 특별감방에 처넣어 칠흑의 암흑 속에서 구상했지요. 그런데 작품을 시작했던 1980년대 중반에 『만인보』에만 전념했으면 이미 90년대에는 완간했을지도 몰라요. 첫 3권을 내고 기자들과 만나 ‘30권으로 완간하겠다.’라고 말했어요. 그런데 1980년대 후반기에 제가 해찰을 많이 습니다. 80년대라는 시대는 너무 너무 가팔랐습니다. 글쓰기 작업에 전념할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90년대로 넘어온 후에야 15권의 절반이 나왔습니다. 시간이 좀 걸렸어요. 그런데 돌이켜 보면 다행인 것은 이런 사정으로 인하여 『만인보』에는 80년대 나의 태도, 90년대 이후의 나의 태도, 20세기 세기말의 나의 태도, 그리고 21세기 내 태도가 각각 반영되게 되었어요. 사람이 변해가는 것이 반드시 십진법에 의해 결정되는 것은 아니지만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도 있듯이 대체로 십년 단위로 사람의 정서나 사회방식이 바뀌기도 합니다. 그렇게 『만인보』는 나의 변화된 정신현상이 고스란히 스며들어있습니다. 그렇게 30권을 마무리했어요. 『만인보』는 외국에도 우리말 그대로 ‘만인보’로 알려져 몇몇 번역서에는 그걸 그대로 제목으로 쓰고 있고, 어느 나라에서는 중·고등학교 현대 고전시리즈의 외국문학 교재로 채택되기도 했어요. 또 최근에는 파리의 사회과학고등연구원의 역사학과에서도 강의하고 있다고 들었어요.

문) 실제로 많은 평론가들이 『만인보』를 “20세기 한국문학이 낳은 최고의 역작”이라고 평가하는 것은 굴절과 부침이 유난스러웠던 한국 근·현대사를 살아온 인물들, 그 삶을 문학적으로 잘 형상화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답) 외국에서는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였다는 사실도 잘 모릅니다. 우리나라도 어두웠지만 20세기는 세계 여러 나라들이 매 한가지로 어두웠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 자기들 역사만 알고, 다른 나라 상황을 살필 겨를이 없이 전전긍긍했던 거예요. 딱히 아프리카나 유럽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라 미국도 예외가 아닙니다. 어떤 면에서는 우리가 훨씬 더 열려있는 것 같기도 해요. 유럽 등 여러 나라에서『만인보』를 통해 비로소 한국 사람들이 식민지로 살았으며, 세계전쟁으로 비화된 비참한 전쟁을 겪는 등 험한 세상을 살았다는 걸 이해하게 되었다는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
문) 『만인보』는 국외 (國外)로 굴절 많았던 우리나라 근현대사를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인식시키는 역할도 수행하겠지만, 국내 (國內)에도 만인 (萬人)에 대한 선생님의 기록이 당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물론이고, 우리 후손들에게 아주 커다란 자산으로 남게 될 것이라 여겨집니다.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선생님 제가 본업인 시 쓰기를 내팽개치다시피 하고 동학농민혁명에 홀딱 빠져 1993년부터 지금까지 24년째 기념사업에 몸담고 있습니다. 선생님께서 잘 알고계시는 것처럼 동학농민혁명은 일제강점기와 해방이후 세계사적 차원에서 구축된 동서냉전체제시기를 거치면서 왜곡·축소된 채 역사의 뒤안길에 버려져왔습니다. 그러다가 1960년 4.19혁명으로 민주적 자각이 높아지면서 1963년 10월 정읍황토현에 기념탑이 세워졌고, 10월유신 이후 혼란스럽던 정국에서 1973년 11월 공주우금치에 위령탑 등이 건립되었습니다. 1980년대 들어와서도 신군부정권에 의해 정읍황토현에 기념사업이 이루어졌습니다. 그 과정에서 전북 정읍을 비롯하여 강원도 홍천, 충남 태안 등에서 민간의 기념사업이 추진되었으나 사회적 여건으로 열악했습니다. 그러다가 민간의 기념사업이 1980년대 후반으로 넘어오면서 폭발적으로 늘어났는데, 1994년 혁명 백주년 때문이었습니다. 1986년 서울에서 역사문제연구소가 설립되어 소장학자들에 의해 동학농민혁명 연구가 본격화되기 시작했고, 1980년대 후반기에 서울에서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전북지역에서 40여 시민사회 단체가 연합체로 동학농민혁명백주년기념사업회를 창립하였습니다. 저는 그때부터 줄곧 동학농민혁명과의 인연을 맺어가고 있습니다. 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을 시작하던 무렵 선생님의 시 ‘역사로부터 돌아오라’를 읽었고, 그 후로 늘 마음속에 담아두고 떠올리곤 했습니다.
벗들... / 역사로부터 돌아오라... / 이제 동학도 3.1운동도 그만 말하고 / 그 역사로부터 돌아오라 / 아무리 거기에 커다란 뜻 나붙어도 / 그것은 그것일 따름이다
역사가 커지면 / 역사가 무거워지면 / 오늘이 없다 / 벗들 역사로부터 돌아오라 / 아무리 발길로 차도 동티나지 않는 / 해골의 역사로부터 / 관념의 늪으로부터 / 가장 용기 있는 듯한 착각으로부터 / 과장으로부터 / 거짓으로부터 돌아오라
가장 잘 발달된 이유로부터 뛰쳐나와 / 그 기술로부터 뛰쳐나와 / 한낮 벅찬 역사의 길 가야 한다 / 압록강도 청천강도 대동강도 임진강도 영상강도 탐진강도 섬진강도 남강도 / 아 낙동강 7백리도 / 두만강도 / 이윽고 그 수많은 물들 바다로 가야 한다.
고은, 「역사로부터 돌아오라」 - 부분, 『네 눈동자』, 창작과비평사, 1988
선생님은 이 시를 통해 ‘우리들이 발 딛고 있는 현실과 괴리된, 박제화 된 역사인식’을 강하게 경계하셨습니다. “모든 역사는 현대사”라는 명제를 떠올리게 하는데, 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 혹은 역사를 기념하는 일에 대한 선생님의 생각을 말씀해주셨으면 합니다.
답) 그 시를 썼던 1980년대에, 나는 과거라는 것, 그 과거의 위대한 사건을 기념하는 것으로만 끝나는 것이 싫었습니다. 시인의 체험을 통해 그것은 현재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지금은 그 기념의 뜻에 대해서도 퍽 너그러워졌는데, 1980년대에는 무엇을 기념하는 행위를 아주 위선적인걸로 생각했습니다. 오늘 내가 동학농민군이 되어야지 기념만 해서 뭐 하냐 이런 생각을 했었지요. 그 무렵의 내 생각을 담은 그 시를 잘 기억하고 있군요. 1980년대는 시대 자체가 벅찼습니다. 그때는 아주 뜨거워졌던 시절이었어요. 나도 뜨거워져서 지나간 과거로서의 역사보다 당대 현실에 대한 집중이 막강했습니다.

문) 역사를 단순하게 기념만 한다면 의미가 반감될 거 같아요. 역사는 사건이 일어난 당시 ‘사실로서의 역사’, 그리고 사건 이후 시대상황에 따라 재해석되는 ‘해석으로서의 역사’ 이렇게 두 차원의 시간성을 갖습니다. 따라서 역사를 기념하는 행위는 과거의 역사를 인식하는 것에 멈추는 것이 아니라 그 역사를 현재화(現在化)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1980~90년대 추진된 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은 상당히 성공적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지난 1990년대 초반기까지도 이 사건에 대한 대중적인 인식은 반란사건이었습니다. 그런데 혁명 100주년을 전후하여 전국에서 펼쳐진 기념사업에 힘입어 2004년 [동학농민혁명참여자등의명예회복에관한특별법]이 제정되었습니다. 실로 110년 만에 명실상부한 복권을 이루어냈거든요. 선생님께서 생각하시는 역사의 현재화에 대해 말씀해주십시오.
답) 황현의 『매천야록』은 놀라운 업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지금도 그 의미는 굉장히 큽니다. 다만, 동학농민군을 비적 (匪賊)으로 기록하고 있다는 것이 봉건적 한계이지만 당시 황현의 처지를 반영한 것이에요. 그리고 동학농민혁명에 대해 선도적으로 연구한 김상기 서울대 사학과 교수의 역할도 염두에 둬야 합니다. 동학농민혁명 정신을 부정하는 ‘동학란’이라는 명칭을 사용했는데 아직 동학농민혁명이 정당화되기 이전이었어요. 황현과 김상기 박사는 동학농민혁명을 대하는 관점이 서로 크게 다릅니다. 황현은 조선왕조 입장과 철저하게 일치한 역사관점이고, 김상기 박사는 농민적 관점에 더 힘을 두었지요. 그러나 동학이라는 종교적 측면으로 다소 치우친 감이 없잖아요. 갑오년 전후하여 조선정부는 물론이고 청나라·일본·미국 등 각국 사람들은 그들의 입장에 따라 민란, 반란사건, 동비의 난 등등으로 밖에 볼 수 없었습니다. 1990년대 이전까지 우리는 이처럼 조선왕조나 일본, 청나라 등의 역사인식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했고, 거기에 익숙해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1980년대와 1990년대를 거치면서 사회적으로 역사인식의 전변이 이루어졌습니다. 우리가 갑오년 역사에 대해 정식으로 눈을 떠, 이것을 의로운 항쟁을 통해 근대를 지향한 세계사의 여러 농민전쟁과 유사한 근대혁명으로 생각해서 그 역사적 위상을 높인 것은 1980~90년대 사회정치적 상황과 깊이 맞물려 있습니다. 내 친구이기도 한 고려대 강만길 교수 같은 사람들의 연구 성과가 그러한 역사인식의 전변을 가져오게 하는데 한 디딤돌이 되었다고 볼 수 있지요. 열렬한 재야사학의 1인자 이이화 형도 있습니다. 이전에는 동학농민혁명을 아주 당연하게 동학란이라고 지칭했습니다. 그러다가 이런 진취적인 학자들의 사관에 의해서 동학농민혁명으로 자리매김 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동학농민혁명은 동학과 농민전쟁을 결합시켜 인식한 것인데, 사상적으로 동학(東學)은 당시 조선정부의 입장에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불온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동학은 서세동점시기에 서양사상에 대응해서 나온 조선민중의 주체적인 대응이었어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서학(西學)은 하늘에 사람이 속하지만 동학은 사람이 하늘이 되는 거라는 점입니다 서학과는 달리 동학은 사람과 하늘이 일체가 되어버리는 겁니다. 이건 대단한 거예요. 동학은 자아를 최고조로 끌어올린 것으로 세계사적으로도 찾아볼 수 없는 아주 오만하기까지 한 독보적인 사상입니다. 내가 바로 하늘인 것이에요. 그래서 제사를 지낼 때도 조상이나 어떤 천신에게 지내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 자신에게 제사 지내는 것이죠. 엄청난 전복(顚覆) 입니다. 유교에서는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 선조들에게 예를 하잖아요.“나”는 없어져버리고, “나”는 오직 조상에 대한 종복으로만 남죠. 동학이 그것을 전복시켜버린 겁니다. 내가 나에게 제사를 지내는 이 오만하기까지 한 동학사상의 핵심은 다름 아니라 시 (侍) 입니다. 모시는 거지요. 대단한 겁니다. 시 (侍) , 이건 정말 놀랍고도 대단한 거예요. 서양의 평등사상은 기계적인 평등인데, 동학에서 말하는 평등은 너와 내가, 서로가 서로를 모시는 평등입니다. 이건 모순이 아니라 역설입니다. 불교에서는 등(等)이 없습니다. 불교에서 평등은 곧 무등(無等) 입니다. 무등이 진짜 평등인 거죠. 그런데 동학의 모시기는 내가 너를 높이는 것으로 이루는 평등입니다. 내가 하늘인데 상대에게도 하늘이 들어있으니까, 피차 다 하늘로 드높여지는 평등이에요. 서로 예의를 갖춰서 평등해지고, 예의를 담아 공경한다는 겁니다. 서로 같이 모시는 게 시 (侍) 인 것입니다. 이건 아주 궁극(窮極)에 이른 평등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리학에서는 이것이 아주 불온하기 짝이 없는 사악한 이념이라고 인식했던 겁니다. 실제로 동학을 통해 조선 농민들은 근대적 자아에 눈을 확실하게 떴습니다. 그러니까 조선정부 입장에서는 동학이 반란일 수밖에 없었던 거죠. 우리 한반도는요, 세계문명사적으로 볼 때 그렇게 자랑스러운 땅은 아닙니다. 사실대로 이야기하면 뭐하나 발상(發祥)된 게 없습니다. 황하문명 같은 것이 우리에겐 없잖아요? 황하문명, 메소포타미아문명, 이집트문명, 인더스문명... 우리에게는 그런 게 없습니다. 조선시대 이전에는 문자도, 우리의 자생문자는 없었습니다. 물론 고대에 가림문자라는 것이 있었다는 설이 있지만 그 파편 하나 어디 기록으로 남은 게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중국의 한자를 받아들였던 겁니다. 성씨도 우리 성씨가 아니고 전부 중국성씨입니다. 본래 우리는 성씨가 없고 돌쇠, 바우 이런 식으로 이름만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중국으로부터 성씨를 받아들인 거지요. 우리 민족은 본래 시베리아 부리야트 샤머니즘에 오랫동안 길들여져 있어서 신명이 가장 잘 내리는 곳이 한국입니다. 그래서인가 우리나라 점쟁이들은 점을 잘 치지요. 시베리아 바이칼 샤머니즘이 중국에서는 학술로 나아갔는데, 우리에게는 신명으로 왔습니다. 그 신명이 불교가 들어오면서 종교와 처음 만납니다. 저 사막을 건너온 인도의 불교와 만난 것이죠. 그 다음엔 도교가 고구려를 통해 들어왔습니다. 노자사상이 나중에 종교화되어 들어온 것입니다. 그로부터 조금 뒤 유교가 들어왔어요. 그러다가 송나라 때 주자학, 성리학이 조선에 들어온 겁니다. 본래 우리에게 들어온 것은 원시유교였습니다. 근데 이 주자는 송나라 오랑캐한테 밀려서 항주, 남송으로 남하했어요. 이때부터 주자학이 국가 이념이 된 겁니다. 나라가 약해지니까 큰 나라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용기가 커져야 되었어요. 그러니까 이 유교를 이데올로기화 한 것입니다. 마침 불교의 화엄학 정통이 있으니까 논리구조가 잘 되어 있는 화엄학 체계를 원용해서 유교를 주자학, 성리학으로 탈바꿈시킨 겁니다. 동양의 유불선 종교사상이 혼재된 상태의 고대한국에서 최치원이 그것을 합성시켜 하나로 만듭니다. 하나로 만들어서 종래의 샤머니즘과 접촉시킵니다. 그것이 바로 유불선과 풍류를 합해서 만든 신선사상이지요. 타지에서 온 것을 가지고 완전하게 체화시킨 것입니다. 그런 맥락이 흘러서 조선조말 최제우의 동학, 시사상(侍思想)으로 꽃이 핀 것입니다. 동학을 사상으로 꽃피운 것은 엄청난 일입니다. 근대에 와서 아시아를 보면 중국이나 일본에는 동학과 같이 이런 대단한 사상이 없습니다. 일본은 유교를 비즈니스로 받아들였습니다. 얘기가 사상사적으로 나갔는데, 되돌리자면 최치원은 군산에서 태어났습니다. 그 아버지는 최견일이라는 사람으로 경상도 출신으로 신라의 6두품이었어요. 최견일이 신라에서 소외받은 변방인 전라도 군산으로 파견되어 군산에서 최치원을 낳았습니다. 최치원은 늦둥이로 둘째 아들이었어요. 그런데 둘째인 최치원이 어릴 때부터 문자를 줄줄 꿰는 신동이었어요. 최치원의 아버지는 재주 많은 둘째 아들의 장래를 위해 당나라로 유학을 보내고 싶어했으나 그럴 신분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중국에는 “빈공과”라고 하는 유학제도가 있었습니다. 중국이 주변국가의 왕자나 왕실 친족을 유학형식으로 받아들여 중국에 대한 반란을 일으키는 걸 예방하고 충성을 다하도록 하기 위해 만든 인질유학제도입니다. 그런데 왕자나 고관대작의 자식들이 말도 잘 통하지 않고 괄시나 받는 당나라에 나가려고 하지 않았어요. 그러자 왕족을 사칭해서 다른 사람을 대신보내는 사례가 생기게 되면서 나중에는 똑똑한 평민들이 많이 가게 되었습니다. 신라 후기에는 왕실이나 귀족 신분이 아니라도 재능 있는 청소년이 대신 갈 수 있었는데 그걸 활용해 최치원의 아버지가 아들을 당나라로 유학 보냅니다. 당나라에 들어간 어린 최치원은 빈공과에서 장원을 해버립니다. 이전에 발해가 2년 동안 장원을 해서 신라가 기가 죽어 있었는데, 최치원이 장원을 하니까 신라는 어깨가 으쓱해졌지요. 그런데 후에 최치원이 신라로 돌아왔을 때 신라 국내파들은 최치원을 견제했습니다. 진성여왕이 인재등용을 하려해도 6두품 자식이라고 국내파들이 반대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최치원은 전라도 태인 현감으로 쫓겨 옵니다. 유배살이 온 것이나 진배없었습니다. 태인 현감을 지낸 뒤 최치원은 해인사로 갔고 그후 국내산천을 유람하며 신선사상을 만들게 됩니다. 영남과 호남은 이 (理)와 기 (氣)로 서로 다릅니다. 영남에서는 이론적인 측면이 강합니다. 호남은 기가 강해서 동적입니다. 최치원의 학(學)은 이학(理學) 입니다. 유교도 이학이니까요. 그런데 전라도는 기 (氣)가 강합니다. 호남은 세계를 기로 봅니다. 기 (氣) , 이것은 오늘날의 우주 물리학과 같은 거예요. 기는 어딘가에 정체되어 있는 명사가 아니고 동사입니다. 움직이는 겁니다. 사실 모든 명사는 동사에서 나온 겁니다. 이 (理)의 땅인 경상도에서는 최제우가 나왔고, 기의 땅 전라도에서 전봉준이 나왔습니다. 최제우는 동학사상을 창도한 후 대구에서 처형당합니다. 그 동학을 널리 알린 사람은 2대 교주 최시형이었는데, 그 사상을 완전히 확대시켜서 기로 만든 게 전봉준입니다. 동학농민혁명의 그 정신이 일제강점기 때 광주학생운동으로, 1980년대에는 광주민주화운동으로 이어져온 것에는 이와 같은 역사적이면서도 사상적인 맥락이 있는 것입니다. 전라도의 기 (氣) , 그것은 에너지의 흐름이죠.
문) 수천 년 동양의 사상사적 맥락을 단숨에 오르내리면서 경주최씨 시조인 신라말기 최치원부터 조선후기 경주최씨 수운 최제우의 동학사상까지 도저하게 내려온 사상적 맥락을 짚어주셨습니다. 사상사 등으로 대담이 넓어지면 짧은 시간으로는 감당이 안 될 것 같습니다. 해서, 오늘은 동학농민혁명의 역사적 의미와 그 현재화를 위한 기념사업에만 얘기를 한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 흔히 21세기를 ‘문화의 세기’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역사를 기념하는 사업에서도 문화예술과 연계시킨 문화콘텐츠 개발과 이를 활용한 정신계승이 중요해졌습니다. 따라서 문화콘텐츠를 개발하려면 무엇보다도 ‘이야기 구성’이 중요한데, 그런 의미에서 동학농민혁명을 모티브로 창작된 문학작품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2000년대로 넘어오면서 갑오년의 역사를 주제로 다룬 문학작품 창작과 발표가 소강상태입니다. 동학농민혁명을 주제로 창작·발표된 장편소설이 남한과 북한을 대표하듯 각각 한 편씩이 있습니다. 남한에는 송기숙 『녹두장군』, 북한에는 박태원 『갑오농민전쟁』이 그것인데, 이 작품들에 대해 얘기해주십시오.
답) 송기숙 작가는 내 친구입니다. 엄연히 살아 있는 사람에게 이런 말을 해서는 안 되는 것이지만, 송기숙 그 친구가 나보다 먼저 죽는다면 장례를 치룰 때 나는 장례를 다 마칠 때까지 그의 빈소를 지킬 생각입니다. 송기숙 작가와 나는 각별한 친구입니다. 나는 어머니의 임종을 지키지 못한 아주 불효자입니다. 내가 시베리아 히말라야에 가서 40일을 지낼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어요. 그때 송기숙 작가가 내 어머니의 장례의 마지막 날 무덤까지 따라왔습니다. 이런 관계 때문인지 친구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 송기숙입니다. 내가 광주(光州)에 내려갈 일이 있다면 그 이유는 대체로 송기숙이 그 친구 때문이었어요. 그 친구와 술 먹고, 그 친구의 중언부언 (重言復言)을 들어주었습니다. 그 친구가 치매에 걸린 지 꽤 되었지요. 그래서 요즘 나는 참 불행합니다. 송기숙이 나를 알아보지 못해요. 지난번에 작가회의 원로 몇 사람이 송기숙을 만나러 광주에 한번 내려가자고 해서 사전에 그 친구 부인에게 연락을 했더니, 우리에게 내려오지 말라고 했어요. 그 부인이 남에게 조금이라도 부담 주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이라서, 못 내려갔어요. 문 시인이 4반세기, 25년 가까이 동학에 미쳐 있는 것처럼, 송기숙이 1980년대 동학농민혁명에 미쳐서, 전봉준에게 완전히 미쳐서, 전국 각지 유적지를 찾아다녔어요. 수상한 사람으로 간첩이 아니냐는 신고까지 당하면서 그렇게 해서 장편소설 『녹두장군』을 썼어요. 그 작품으로 나중에 만해문학상도 탔습니다. 그 무렵 나는 다른 데 관심이 있었어요. 그렇지요. 남쪽에는 『녹두장군』이 있고, 북쪽에는 『갑오농민전쟁』이 있는데, 양쪽에서 동학을 문학작품으로 형상화했다는 게 재밌는 대조라고 하겠습니다. 남북이 문학을 통해서 동학을 함께 공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의를 높이 사고 있습니다.

문) 송기숙의 『녹두장군』 제1권 첫 장부터 30여 페이지 분량이 고창군에 있는 선운사 마애석불에서 벌어진 비기탈취 사건을 모티브로 하고 있습니다. 송기숙 선생님은 1990년대 내내 전주 소재 사단법인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이사로 활동했습니다. 제가 사무국장이었기 때문에 그 무렵에는 송기숙 선생님을 자주 뵈었는데, 2000년대로 넘어온 후 치매가 심해져서... 어쨌거나 2015년에는 장편소설 『녹두장군』으로 동학농민혁명의 역사적 의미를 드높였다는 공로로 전북 정읍시에서 주최하는 [제5회 동학농민혁명대상]을 받았습니다. 치매로 송기숙 선생님은 시상식에 못나오시고 대신 사모님이 받으셨지요. 선생님, 제가 동학농민혁명을 주제로 한국문단에 창작·발표된 문학작품을 조사해서 분석한 적이 있습니다. 1895년부터 2000년까지 한국문단에 창작·발표된 작품은 약 300여 편인데, 소설작품이 단편과 장편 포함 20편 정도이고, 시작품이 280여 편입니다. 이 작품들은 대체로 1980년대와 1990년대 집중적으로 창작되어 발표되었습니다. 그런데 2000년대로 넘어오면서 작품발표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시대적으로 문화콘텐츠가 중요해졌는데 도리어 작품창작 열기가 시들어서 아쉽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걱정스럽기도 합니다.
답) 전북에 있는 안도현 시인 등단작이 「서울로 가는 전봉준」이지요. 그때 이후로 나에게는 묘하게 안도현과 전봉준이 동의어로 엮어져 있습니다. 1970년대 어떤 화가가 흑백 유화로 전봉준이 잡혀갈 때 찍은 사진을 초상화로 그려서 나한테 보내줬어요. 전봉준 같은 투지를 나에게 인식시키려고 화가가 선물을 한 거겠죠. 서재에 붙여놓았기 때문에 후배 시인들이나 동료들이 우리 집에 오면 한참씩 바라보고 그랬습니다. 1980년대 그때는 내가 수색과 압수를 많이 당하던 때였는데, 그 과정에서 초상화가 어디로 가버렸는지 사라져버렸어요. 내가 한 때 전봉준 초상화를 걸어두고 몇 년 동안을 낮이나 밤이나 같이 살았는데, 그 사진이 어디로 가버렸는지 지금도 알 수가 없습니다.
문) 전봉준 장군은 순창에서 체포되어 순창감옥에 갇혔다가 나주로 이송되었고, 이후 일본군에게 넘겨져서 서울로 압송되었지요. 당시 일본 영사관 순사청이 서울 남산자락 진고개, 지금 서울 중부경찰서 자리였다고 합니다. 그곳에서 재판정으로 심문받으러 오가는 과정에서 일본 신문기자가 찍은 사진이 유일하게 남은, 들것에 들린 형형한 눈빛의 전봉준 장군 사진이지요. 그 이전에도 그랬지만 재판이 진행되는 과정에서도 일본 영사관 측에서 제 편으로 끌어들이려고 전봉준 장군을 끊임없이 회유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전봉준 장군은 “나의 천명 (天命)은 여기까지다. 너는 나의 적이고, 나는 너의 적이다. 하니 다른 말은 묻지 마라”고 단호하게 거절한 후 교수대에 올라 “어찌 나를 역적이라 이르느냐. 나를 죽이려거든 내 목을 쳐서 종로 네거리에 오가는 사람들에게 피를 뿌려 주는 게 마땅하거늘 어찌 컴컴한 적굴에서 암연히 죽이는가.”라고 호통을 쳤다고합니다. 그 분의 당당함이 있었기에 초라하기 그지없는 조선말과 우리나라 근대 초입 (初入)이 그나마 덜 적막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답) 그렇습니다. 전봉준이 있어서 절벽 같았던 근대가 그래도 빛나는 겁니다. 더불어서 한국의 근대사상으로서 동학(東學)이 있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역사적으로 실천했다는 것은 우리에게 큰 긍지입니다. 체제가 보기에는 단순하게 농민의 불만이 터진 것이지만, 동학농민혁명은 하나의 명제를 가지고 있었고 그 사상을 실천한 것으로 세계사적인 가치실현의 운동이었습니다. 청나라 태평천국운동과는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태평천국사상은 교조적이고, 사이비성이 다분하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우리의 동학은 그것과 격이 다릅니다. 그래서 동학과 농민전쟁, 농민혁명은 귀중한 우리의 역사적 자산인 것입니다. 우리가 잘 계승해서 우리의 오늘 우리의 현재로 만들어야 할 아주 중요한 가치입니다. 동학과 농민혁명은 기념의 대상을 넘는 거대한 의미를 담고 있는 역사 그 자체입니다. 전봉준은 완성될 수가 없습니다. 거기로부터 동학정신의 새로운 발현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문) 네, ‘역사로부터 돌아오라’는 선생님의 시를 다시금 생각하게 하는 대담이었습니다. 선생님 귀한 말씀 고맙습니다.
답) 나는 동학농민혁명 역사 바로세우는 일, 반란사건으로 치부된 채 역사의 뒤안길에 버려진 역사를 복권시키는 일에 제대로 힘을 실어주지 못했고, 그저 이렇게 이야기할 뿐이니 미안할 뿐입니다.
문) 선생님께서 엄청나게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한국 현대사를 건너오셨다는 사실을 동시대 사람들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데, 그렇게 말씀하시니 앞에 앉아 있는 제가 부끄럽고 얼굴이 뜨거워집니다. 선생님, 바쁘신데 대담에 응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항상 건강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하시고 싶은 말씀 있으시면 해주세요.
답) 동학농민혁명은 기념만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동학에서 실천을 빼버리면 아무것도 남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새삼스레 확인해야 됩니다. 동학농민혁명은 어제의 일이 아니고 바로 오늘의 일이라는 것, “지금, 여기”를 떠나서 동학농민혁명을 얘기하는 것은 무의미할 뿐만이 아니라 도리어 독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깊이 새겨야 한다고 봅니다. 실천으로 옮겨지지 않는 동학사상은 그것이 아무리 뜻이 깊고 높아도 헛것입니다. 동학을 사상으로 말할 때 매우 조심해야합니다. 갑오년에 동학을 역동적인 실천, 불꽃으로 기화(氣化)한 전봉준의 정신 그게 중요합니다. 오늘의 동학군,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임원님과 전국의 기념사업단체 임원님들의 노고가 우리나라 현대사를 한 단계 높이는데 힘이 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