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혁명 참여자 김영원의 증손자 김창식

문) 선생님 반갑습니다. 동학농민혁명유족회 행사나 우리 기념재단에서 추진하는 정신 선양사업 때마다 만나니까 명절 때에나 보는 멀리 떨어져 사는 형제보다 더 가깝게 느껴집니다. 지난해에도 봄철에 전국동학농민혁명유족회에서 주최한 정신선양대회 때 전주에서 뵙고, 10월에 서울 백범김구기념관에서 열렸던 제122주년 동학농민혁명기념대회 때 뵈었지요. 그리고 그 사이 동학농민혁명 유적지 답사팀과 함께 몇 차례 뵈었지요? 먼저 간략하게 선생님 소개해주실 것을 부탁드립니다.
답) 안녕하세요. 저는 전국동학농민혁명유족회 전라북도 회장직을 맡고 있는 김창식입니다. 동학농민혁명 정신을 선양하기 위해 경향각지에서 관심과 성원을 아끼지 않으신 많은 분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저희 김영원 증조부님은 1894년 반봉건, 반외세의 기치를 내건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셨고, 민족 독립을 위해 3.1만세운동을 주도하셨습니다. 증조부님께서는 1883년 봄에 후학 양성하기 위해 사재를 털어 삼요정을 세웠는데 올바른 민족정신과 애국 교육을 위한 곳으로 3.1만세운동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저희 김교민 조부님과 김정갑 아버님께서는 이곳에서 지내오셨고, 저 역시 여기에서 태어나고 자랐습니다. 아버님께서 삼요정을 복원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신 끝에 2002년도에 국고를 지원받아 복원하였고, 2003년 국가보훈처에 현충시설물로 등록되었습니다. 이곳으로 제가 객지생활을 접고 내려온 지도 벌써 10년이 되었는데, 조상의 일이기 때문에 누군가는 와서 지켜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했고 지금은 제가 있지만 추후에 여기를 관리하면서 지낼 후손이 있을까 하는 염려가 많이 됩니다.
문) 동학농민혁명은 우리나라 민주주의 뿌리로서 조선왕조의 부패한 권력에 거부하여 평등세상을 이루고자 했고, 일본의 불법적인 침략에 맞서 일어난 반일민족항쟁입니다. 그런데 일제 강점기 등을 거치면서 반란사건으로 매도된 채 역사의 뒤안길에 버려져왔습니다. 다행스럽게 2004년 특별법이 제정되면서 그 명예를 회복할 수 있는 길이 열렸는데, 이제 겨우 20년이 조금 넘었습니다. 동학농민혁명 정신이 대중적으로 확산되었던 1994년, 혁명 100주년 이전까지만 해도 동학농민혁명 후손이라는 말도 떳떳하게 내놓고 말하지 못하던 세월을 지내왔지요? 증조부께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했다는 사실은 언제 알았는지요?
답) 제가 어렸을 적에 할아버지께서 천도교 활동을 하시면서 마을로 ‘월성비’를 받으러 다니셨어요. 할아버지 심부름으로 저도 같이 다니기도 했는데, 그때는 동학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제 형제들이 7남매인데, 모두 객지에서 어렵게 생활하면서 늘 의식주 해결이 급선무였기 때문에 동학이라는 것에 관심을 갖지 못했습니다. 증조부께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신 사실은 상당히 오래전에 알았습니다. 할아버지께 들었는데, 제 증조부께서 1963년 대통령 표창을 받았습니다. 증조부께서 독립운동 활동하신 것으로 조부께서 훈장을 받으셨거든요. 그래서 증조부님 활동사항에 대해서 알게 되었습니다. 그때 제가 스무 살이었는데 동학농민혁명에도 참여하셨고, 일제 강점기 때 독립운동까지 참여하셨다가 일본 경찰에 잡혀 옥에서 돌아가셨다는 얘기를 할아버지께 들었습니다.
문) 할아버지께서 증조부님이 어떤 분이셨다고 얘기를 해주셨는지요?
답) 증조부님은 1894년 동학농민혁명 때 우금치전투까지 참전하셨다가 후퇴하여 순창 회문산으로 피신하여 목숨을 건졌다고 들었습니다. 그 뒤 회문산에서 나와 1904년에 자신의 머리를 깎는 등 스스로를 혁명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근대 평등사회를 이룩하기 위해 당시 집안에 거느리고 있던 식솔과 노비 20여 명의 노비문서를 불태우면서 이제는 양반도 노비도 없는 평등한 세상이라고 하셨다고 해요. 그때 우리 집의 노비로 있었던 사람들이 30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 집으로 찾아와 고맙다는 인사를 하면서 넌지시 증조부님 얘기를 하곤 했습니다.
문) 이곳 삼요정은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난 1894년보다 앞선 1883년 설립되었지요? 올해로 무려 134년이나 지났네요. 기록에 따르면 증조부께서 과거시험 공부를 위해 이곳에 정자를 지었다가 이내 동학을 만나 입도하여 새로운 세상을 여는데 뛰어들었다고 하던데, 삼요정 건립에 대해 전해들은 이야기는 없으신지요?
답) 증조부님께서는 어릴 때 부모님을 여의고 유년기부터 농사일을 하면서도 주경야독으로 학문에 임하여 제자백가설에 이르렀다고 해요. 20세에 유학자로 자리를 잡고, 26세 때 정읍 칠보에 있는 무성서원에서 학장까지 지내셨습니다. 대원군이 집권한 뒤에 서원철폐가 단행되면서 유일하게 남아있던 무성서원마저 철폐되자 후학들과 함께 임실로 넘어와서 삼요정이라는 정자를 짓고 후학 양성에 나섰다고 합니다. 삼요정이라는 이름에는 자연환경이 좋은 곳이고, 학문을 연마하기에 좋은 곳이며, 애국정신을 고취하기에 좋은 곳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고 할아버지께 들었습니다. 실제로 일제강점기 때 삼요정은 임실지역 3.1독립만세운동의 핵심적인 거점이었다고 합니다.
문) 자료를 읽다보니 증조부이신 김영원 선생님께서는 1889년에 동학에 입도하신 것으로 확인되더군요. 그 시기가 동학 2대 교주 해월 최시형이 강원도 산간에서 소백산자락 충북 보은군으로 내려온 후 호남지방에 동학을 적극적으로 포교하기 시작한 때인데, 증조부께서 동학 입도 후 활동한 내용에 대해 들은 것은 없으신지요?
답) 동학농민혁명이나 3.1만세운동은 제가 태어나기 전 일이라 집안 어른들과 동네 분들께 들은 이야기가 대부분입니다. 1880년대 후반에는 인접한 임실, 오수, 남원이 거의 같은 시기에 포교가 이루어졌다고 해요. 그때 증조부께서도 동학에 들어간 것 같아요. 증조부께서는 동학에 입도한 후 1894년 갑오년 3월 백산봉기에 참여했고, 7월에는 최승우 대접주를 도와 폐정개혁에 힘쓰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동학농민군이 우금치전투에 패전하여 후퇴하는 동안 각 지역에서 민보군이 결성되어 농민군을 토벌했는데 남원 운봉에도 박봉양이라는 토호가 민보군을 조직해서 농민군을 공격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동학농민군이 남원 운봉의 박봉양을 치러 전투를 벌였던 운봉전투에 참전했고, 남원부의 여원치전투, 관음치전투, 방아치전투 등에도 참전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남원성전투 때도 참전했다고 들었습니다.
문) 증조부께서는 남원성전투에서 패한 후 최승우 대접주 등 20여 명과 함께 회문산으로 피신하여 6년 동안 은신한 후 다시 임실로 돌아오셨다는 사실을 자료를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임실로 돌아온 이후 김영원 선생님께서 활동은 어떠했다고 들으셨는지요?
답) 증조부님은 회문산에서 나오신 다음 얼마 지나지 않아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곧바로 독립운동의 길을 걸으셨다고 합니다. 회문산에서 나온 뒤 처음에는 후학을 양성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에서 사재를 털어 전주와 임실 청웅에 각각 학교를 설립했다고 합니다. 전주에는 창동학교, 임실에는 삼화학교를 설립하여 초대 교장을 맡으셨습니다. 그러는 과정에서 증조부님께서는 3.1만세운동 66인의 발기인으로 참여하셨는데, 나중에 1919년 3.1만세운동 때는 증조부께서 연세가 많으셔서 박준승, 양한묵 두 제자를 민족대표 33인으로 추천하여 독립선언에 합류를 시키셨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당신께서는 삼요정을 거점으로 임실지역 만세운동을 주도하셨습니다. 동학농민혁명에도 참여하고 3.1만세운동까지 직접 참여한 것으로 확인된 분으로는 제 증조부님과 임실군 오수면의 한영태 선생님 등 몇 사람밖에 안 된다고 들었습니다. 한영태 선생님은 증조부님과 운암에서 동학 활동을 같이 하셨던 것 같아요.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김영원의 증손자 김창식
문) 김영원 선생님과 제자였던 양한묵, 박준승 선생님은 국가유공자예우에관한 법률에 의거하여 국가유공자로 지정되었지요? 그래서 박준승 선생님은 몇 년 전에 생가복원사업이 이루어졌지요.
답) 네. 제자 두 분 모두 국가유공자로 지정되었습니다. 1962년 양한묵과 박준승 선생님이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되었고, 제 증조부님은 1963년 대통령 표창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1991년는 전북 사람으로는 김영원 증조부님과 한영태 선생님께서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았습니다.
문) 지금 선생님께서 생활하고 계시는 이곳 삼요정의 역사가 파란만장했지요? 일제가 3.1만세운동 2년 뒤인 1921년에 독립운동 근거지를 없앤다면서 삼요정을 강제로 철거시켰는데, 다시 건물이 세워지게 된 경위 등에 대해 말씀해주시지요.
답) 1883년 후학양성을 위해 건립된 삼요정은 일제강점기 때는 독립운동의 근거지가 됩니다. 독립선언문 인쇄물도 갖다놓고 각 지역으로 배분하고 그랬다고 합니다. 3.1운동이 끝난 후 일제가 삼요정을 독립운동의 본산으로 지목하여 불태워버렸습니다. 그래서 2000년도로 들어서서 지역주민들과 뜻있는 분들이 힘을 모아 임실군 등에 삼요정 복원을 요청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임실군의 지원금과 주민모금 등으로 2002년에 삼요정을 복원하였고, 복원된 건물이 2008년 10월 국가보훈처로부터 현충시설로 지정을 받게 되었습니다. 원래 삼요정이 있던 자리는 지금 복원된 곳보다 좀 더 깊이 들어간 산 안쪽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곳이 너무나 산골짜기라 겨울철에 눈이라도 내리면 차가 다닐 수 없고 해서 현재 있는 곳에 복원하게 되었습니다. 증조부님은 동학농민혁명에 이어 독립운동까지 하시면서 사재를 털어 학교도 설립하고 하다 보니 결국 빚만 남아있게 되었어요. 제 아버님 때는 할머니와 함께 다른 집으로 밥을 얻으러 다니고 그랬다고 합니다. 그리고 할머니가 자기 머리카락을 잘라 모아 그것을 팔아서까지 겨우겨우 자식들을 먹여 살렸다고 합니다. 사재를 몽땅 털어서 나라의 독립과 평등세상을 위해 써버린 탓 에 그 자손들인 우리가 고생을 많이 한 셈이죠.

삼요정과 삼요정복원기념비
문) 증조부님께서 일본 경찰에는 어떻게 체포되어 곤혹을 치렀는지 말씀해주십시오.
답) 어른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중조부님께서 일제 경찰에 붙잡혀 간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감옥에서 돌아가셨을 때 연세가 66세였는데, 요즘이야 90세, 100세까지 사니까 그렇지 그때만 해도 환갑 넘기기가 수월한 일이 아니었어요. 그러니까 증조부께서는 3.1독립운동 이후 일본 경찰에 붙잡혀 감옥에 들어간 후 고령이라 고문을 당해 거동이 불편해지면 감옥에서 내놨다가 건강이 호전되면 다시 잡아다 감옥에다 가두기를 거듭했다고 합니다. 그 과정에서 1919년 8월 25일 옥사(獄死) 하셨습니다.
문) 김영원 선생님은 현재 어디에 모셔져 있는지요?
답) 저희 선산에 모셔져 있습니다. 옥사 후 일제가 형무소 앞에 시신을 내버렸다는 소식을 듣고도 곧바로 시신을 찾으러 가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때 분위기가 하도 살벌해서요. 상황을 살피다가 임실군 운암면 천도교 제1교구 교인들이 야밤을 틈타 몰래 시신을 운반해왔다고 합니다. 전주형무소에서 선산으로 곧바로 모셔오지 못하고 선산에서 한참 떨어진 선거리라는 마을 공동 산에 안장했다가 해방된 후 10여년 쯤 지나 자손들이 지금의 묘소가 있는 선산으로 이장했다고 합니다.
문) 흔히, 동학농민혁명을 미완의 혁명이라고 말하면서 무기의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일본군에게 학살당하고 말았지만, 갑오선열의 구국애민 정신은 3.1운동 4.19혁명 등으로 면면히 이어져왔다고 말합니다. 이런 인식이 엄연한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다는 것을 김영원 선생님 삶의 궤적이 확인해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갑오선열의 숭고한 정신을 널리 알려나가는 일에는 많은 사람들의 힘을 모으는 것이 중요할 것 같습니다. 현재, 그러니까 제10대 전라북도의회 문화건설안전위원회 한완수 위원장님이 임실 출신이죠? 위원장님께서 임실지역의 동학농민혁명사에 대해 깊은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계시는데, 이런 분들과의 적극적으로 협의해나갈 필요성이 있다고 봅니다. 어쨌거나 민족의 자랑스러운 역사,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후손이라는 긍지와 자부심이 남다를 것 같습니다.
답) 네, 한완수 위원장님을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동안 이곳 삼요정도 여러 차례 다녀가셨어요. 동학농민혁명사는 물론이고 우리 임실지역 역사에 대해 아주 관심이 많은 분이지요. 필요한 사안이 생기면 찾아뵙고 그럴 생각입니다. 제 아버님은 살아생전에 증조부님께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신 일에 대해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후손으로서 긍지와 자부심이 남다르셨습니다. 돌아가실 때 할아버지가 국가와 민족을 위해 온몸을 던지고 고생을 하시면서 나라를 되찾겠다고 하셨는데, 자손이 못나서 할아버지의 업적을 다 알리지 못하고 죽는다고 안타까워하시면서 증조부님의 뜻을 세상에 널리 알리고 펴는 일에 힘을 써야할 것이라고 유언하셨습니다. 아버님의 유지를 따라 저 또한 조상의 일에 대해 항상 기억하고 가슴에 새기며 지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였다는 사실을 사회에서 말을 할 수도 없었잖아요? 그간 고달픈 생활을 해왔지만 이제는 조상이 역적의 누명을 벗었으니 우리 자손들은 그분들의 뜻을 더욱 알리는데 힘을 써야겠지요.
문) 선생님 긴 시간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