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소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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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봄 27호
일본 나라여자대학 명예교수 나카츠카 아키라 인터뷰

일본 나라여자대학 명예교수 나카츠카 아키라 인터뷰


  이번 호 [명사대담] 코너에는 한일관계사, 청일전쟁과 동학농민혁명사 연구의 권위자인 나카츠카 아키라(中塚明) 일본 나라여자대학 명예교수를 모셨다. 대담은 2016년 10월 20일 전남 진도군에서 ‘진도 동학농민혁명의 동아시아적 의미와 그 위상’이라는 주제로 열린 학술대회 참가 후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전북 정읍 황토현전적지)을 방문하여 이루어졌다.


일 시 : 2016년 10월 20일 16:00

장 소 :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회의실

대 담 : 나카츠카 아키라 일본나라여대 명예교수, 문병학 기념재단 기념사업부장



나카츠카 아키라 일본 나라여대 명예교수


문) 교수님, 어서 오십시오.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기념사업부장 문병학입니다. 반갑습니다. 동학농민혁명기념관을 방문해주신 것과 대담에 응해주신 것에 대해 깊이 감사드립니다. 교수님께서는 『1894년, 경복궁을 점령하라』(푸른역사, 2002.), 『동학농민전쟁과 일본-또 하나의 청일전쟁』(모시는사람들, 2014.) 등 동학농민혁명 관련한 무게 있는 저술로 한국에도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교수님을 알고 있는 한국의 지인들을 위해 먼저 교수님 근황을 말씀해주십시오.


답) 나는 작년 (2016년) 10월에 「동학 농민군의 역사를 찾는 여행」에 참가했습니다. 2006년부터 이어져 온 이 여행의 11번째였습니다. 다음달 11월 16일에는 나의 편저인 『일본의 조선침략사 연구의 선구자 -야마베 켄타로와 현대(日本の 朝鮮侵略史研究の先駆者 山辺健太郎と現代)』한국어판(김성순 역, 씨알누리 발행) 출판 기념 강연회(서울: 천도교 중앙대강당), 그리고 그 다음날인 17일에는 경북대학교 사회과학연구원 주최의 “을사늑약 111주년을 기억하는 강연회”에 초대받아 처음으로 경북대학교를 방문할 예정입니다. 강연은 모두 “일본 근대사 연구와 역사 교육 -나의 일본 근대사 연구를 되돌아보며”를 주제로 했습니다. 1960년대 초부터 반세기를 넘은, 주로 청일전쟁(1894~95)을 대상으로 하는 내 연구의 총괄과도 같은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작년은 나에게 하나의 고비의 해였습니다. 내가 “미수(米壽)”를 맞이했기 때문입니다. 미수는 88세를 말합니다. 쌀 米자를 파자해 보면 八十八이 되기 때문에 그렇답니다. 일본 남성의 평균 수명이 80.79세(2015년)라고 하니까 나는 좀 너무 오래 산 것 같습니다. 게다가 재작년 (2015년) 초부터 아내(1934년생)가 걷기 힘든 상태가 되어 집안 일을 모두 내가 하게 되었습니다. 매일 가정 “주부(主婦) ”가 아니라 “주부(主夫) ”가 된 셈입니다. 그래서 새로운 과제를 향해 개척적인 연구를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다만『일본의 조선침략사 연구의 선구자 야마베 켄타로와 현대』를 씀으로써 내 연구의 궤적을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후의 일본의 역사학, 이른바「전후역사학」속에서 자리 매기는 일을 할 수 있으면 싶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문제에 있어서는 일본인의 “전쟁 책임”과 “식민지 책임”의 문제가 중층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과 동시에, 일본 근대사· 일본 제국주의사의 연구사를 현재의 시점에서 정리하는 일이 되기도 하고, 한편으로 현재 일본의, 특히 지식인들의 역사의식 문제와도 연결되는 광범위한 과제에 도전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도저히 이와 같이 중대하고 광범위한 문제를 가지고 연구를 새롭게 진행시킬 수 없습니다만 적어도 문제 제기적인 소묘(素描)라도 그려보고 싶다고 생각합니다.



문) 제가 교수님을 처음 뵙게 된 것은 2001년 사단법인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와 동아시아평화·인권한국위원회가 공동으로 주최한 국제학술대회 때였습니다. 전북 전주에서 ‘동학농민혁명의 동아시아적 의미’라는 주제로 동학농민혁명 107주년을 기념하여 열린 이 국제학술대회 때 한·중·일 삼국(三國)의 연구자 다수가 참가하여 열띤 토론을 벌였는데, 그 때 교수님께서 「갑오농민전쟁과 일본 –조선왕궁 점령사건 및 그 뒤의 일본이라는 주제의 글을 발표하셔서 참가자들은 물론이고, 국내외 언론사 기자들로부터 많은 관심을 받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 학술대회 당시 상황을 회상하시면서 한 말씀해주실 것을 부탁드립니다.


답) 2001년에 전주에서 개최된 「동학농민혁명의 동아시아적 의미」를 주제로 한 국제학술대회는 청신(淸新)하면서도 정열적이고 매우 잘 준비되고 세련된 학술대회였다는 강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됩니다. 박맹수 선생님으로부터 권유를 받고 참가했는데 그때 박맹수 선생님은 46세였습니다. 이 국제학술대회를 기획하고 실행한 한국의 연구자들은 박맹수 선생님을 비롯해 1980년대의 민주화 투쟁을 한 체험을 국제학술대회로 실현시킨 사람들이라는 것을 학술대회를 통해 피부로 느꼈습니다. 한국어는 물론이고 중국어·일본어 번역까지도 실린 두꺼운 대회 보고집이 사전에 멋진 책자로 만들어지고 참가자 전원에게 배포되었는데 이것은 대단한 노력이 필요한 일입니다. 그리고 대회 보고가 제때제때 진행된 것이나, 또 현장 답사 때에 무거운 마이크의 앰프를 학생들이 백산(白山) 위까지 들어 올려서 설명하여 참가자들에게 잘 들리게 해준 것 등등 헌신적으로 운영하고 있다는 것을 도처에서 느꼈습니다. 나는 1990년대 전반 어느 해 어떤 학회로부터 초대를 받고 처음 서울에 간 적이 있습니다. 그 때와 비교해보면 한국 민주화 운동에 몸을 바친 세대가 이제야 학술계의 주요 무대에 등장했구나 라고 참으로 강렬하고 선명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이 학술대회에서 주제발표 이외에 강한 감명을 받은 것은 현장답사였습니다. 그 중에서도 고부의 “무명동학농민군위령탑”과의 만남은 잊을 수 없습니다. 학술대회 전날 매우 바쁘신 와중에 박맹수 선생님이 일본에서 같이 온 야부타 유타카 선생님(藪田貫 =칸사이대학 교수)과 나를 택시로 데려가 주었습니다. “무명동학농민군위령탑”의 주탑(主塔) 곁에 서 있는 화강암의 석주(石柱), 거기에 새겨진 농민의 얼굴, 얼굴, 얼굴들……. “효수”의 형상에 가슴이 막혔습니다. 그때 받은 감동이 ‘동학농민군의 역사를 찾는 여행’의 시발점이 되었습니다.



고창 선운사 마애석불 답사 때 일행과 함께


문) 교수님께서는 국제학술대회 이후 일본의 역사교사나 한일관계사 혹은 한국의 역사에 관심이 많은 분들로 팀을 꾸려 매년 동학농민혁명 유적지를 답사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저도 원광대학교 박맹수 교수님을 따라 몇 차례 합류한 적이 있습니다. 외국으로 떠나는 역사답사팀을 10년 넘게 운영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닌데, 연로하심에도 불구하고 쉽지 않는 일을 수행하신 것에 대해 감회가 남다를 것 같습니다. 이에 대해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답) 우리가 기획하고 실행해 온 「동학농민군의 역사를 찾는 여행」은 2016년에 11번째입니다. 왜 그렇게 계속되었는가? 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투어 참가자 개개인은 각각 나름대로 생각을 가지고 참가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만 나 자신은 우선 이 여행이 “일본이라는 나라가 과연 어떤 나라인가를 생각하는 여행”이라고 생각합니다. 동학농민군의 역사를 찾는 것이 왜 “일본이라는 나라가 어떤 나라인가를 생각하는” 일이 되는가? 지금 일본인은 한국·조선에 어떤 역사가 있는지, 조선에 대해 일본인이 무슨 짓을 했는지, 이웃 나라인데도 아무것도 모르고 있습니다. 특히 19 세기 중엽 무렵에 일본이 근대 통일국가가 된 이후에 이웃 나라인 조선에 대해 무슨 짓을 해온 것에 대해 도무지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편견”만을 가지고 있는 일본인이 무척 많습니다 “한국·조선은 후진국이어서 자주적으로 사회를 변혁하는 힘이 없다. 그러니까 늘 대국의 뜻에 좌지우지되고 있는 타율적인 민족이다. 그래서 일본이 도와주지 않으면 중국이나 러시아에 지배당하고 일본의 안전을 유지할 수 없게 된다”이런 식의 논리를 가지고 메이지(明治)시대에 청일·러일전쟁을 일으키고, 제2차대선 패전 후에도 “조선 지배는 식민지 지배가 아니었다. 조선을 근대화시켜 주기 위한 것이었다” 라고 계속 우겨왔습니다. 그리고 한국·조선의 민족적인 움직임을 완전히 무시하고 있는 것이 1945년의 패전 이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일본의 정부, 나아가서는 언론매체 등까지도 널리 공통된 인식입니다. 일본인은 역사에 무지한 국민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한국·조선의 역사상 “동학농민혁명”을 비롯한 “항일운동”을 말하지 않는 것과 “일본의 침략”을 숨기는 것은 방패의 양면입니다. 나는 이러한 “허구에 친숙해진 일본제국”이었기 때문에 청일전쟁부터 불과 50년인 1945년에 크게 패배하고 파탄하게 되었다고 굳게 믿고 있는데, 이것을 한국의 역사현장에서 동학농민군의 전적을 찾는 여행을 하면서 생각하는 것, 그것이 바로 내가 「동학 농민군의 역사를 찾는 여행」을 계속하는 이유입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나의 문제 제기에 공감해주는 일본인이 점점 늘어나고 있어서 투어가 계속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문) 전라북도 고창군에 소재한 사단법인 고창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에서는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연구 및 기념사업 등을 통해 그 정신을 선양하는 것에 기여한 공로가 많은 사람을 선정하여 매년 [녹두대상]을 시상하고 있습니다. 2014년에는 교수님께서 [녹두대상] 수상자로 선정되어 상을 받으셨지요? 동학농민군이 군사훈련을 실시한 곳으로 알려진 고창군 공음면 신대리 왕제산 아래 신왕초등학교 교정에서 열린 시상식 때 교수님께서 수상소감으로 “한국과 일본 두 나라의 미래를 위해서는 과거사를 제대로 규명하고, 사실(史實) 인정하는 것에 궁색해서는 안 된다.”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동학농민혁명의 역사를 잘 이해할 수 있게 하는 일에 힘쓰겠다.”는 요지의 말씀을 하셨던 것으로 기억납니다. 그래서 그곳 참가자들에게 많은 박수를 받으셨지요. ‘녹두대상’을 수상하신 그해 11월 『동학농민전쟁과 일본 –또 하나의 청일전쟁』이라는 저서를 한국에서 출간하셨는데, 수상소감에서 말씀하신 것과 연관이 있을 것으로 여겨지는데, 이 점에 대해 말씀해주십시오.


답) 내가 2014년 4월에 “녹두대상”을 수상한 것은 말할 나위도 없이 나 개인 역량이 아니라 내 연구를 도와준 친구들, 또 한일 간 평화와 우호를 위한 연대 활동을 함께해 온 일본·한국의 친구들과 함께 쌓아 올린 성과를 평가해준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한일 양국민이 마음속으로부터 화해하기 위해서는 역사적 사실을 외면하지 말고 직시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이것은 나의 확신이 되어 있습니다. 동학농민전쟁의 역사를 사실에 의거해서 제대로 이해하는 연구가 일본에서 본격적으로 진행되기 시작한 것은 신기하게도 “동학농민혁명” 100주년이 되는 해부터였습니다.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만 1995년 “한국 동학당 수괴의 수급”으로 묵서된 두개골이 일본의 홋카이도대학에서 발견되었고, 이 두개골의 유래를 조사하기 위해 한국에서 박맹수 선생님이 일본 홋카이도대학으로 유학을 오셨습니다. 1997년 가을에 나는 홋카이도대학 이노우에 카츠오 선생님과 박맹수 선생님을 삿포로에서 처음으로 뵈었습니다. 역사적인 만남이었습니다. 이를 계기로 2001년에 한국 전주에서 국제회의 「동학농민혁명의 21세기적 의미」에 참가하게 되고, 큰 감명을 받은 것은 먼저 대답한 바와 같습니다. 일본에서는 홋카이도대학 명예교수이신 이노우에 카츠오 선생님이 동학농민군에 대한 일본의 군사적인 대응, 집단학살 작전의 실태를 밝힐 사료 수집에 큰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종군한 일본 병사의「진중일지」와 만나게 되는 등 동학농민혁명과 일본과의 관계를 밝히는 데 있어서 획기적인 발견을 하셨습니다. 「진중일지」는 금방 발간될 것이라고 들었습니다만 일본 근대사 위에서 보기 드문, 상당히 귀중한 발견이었습니다. 2012년 봄, 우연히 교토에 유학중이었던 박맹수 선생님과 내가 이노우에 선생님부터 이 기록에 대해 듣고 책으로 펴내자고 뜻을 모아 2013년에 이노우에 카츠오, 박맹수, 나카츠카 아키라 공저로 『동학농민전쟁과 일본-또 하나의 청일전쟁(東学農民戦争と日本--もう一つの日清戦争)』(高文研)을 출판할 수 있었습니다. 이 책은 이노우에 카츠오 선생님의 『메이지 일본의 식민지 지배(明治日本の植民地支配)』(岩波書店)과 함께 동학 농민군을 주력으로 한 조선의 인민 대중이 일본의 침략과 어떻게 싸웠는지, 그 항일 투쟁에 대해 일본정부·일본군, 일본 병사가 무엇을 했는지를 밝힌, 사실에 의거한 가장 새로운 연구성과입니다.



제7회 녹두대상 수상식장에서


문) 근년(近年)의 동아시아 정치정세를 두고 국내외 많은 사람들이 우려하고 있습니다. 특히, 일본의 우경화 혹은 군국주의화를 염려하는 목소리가 큰데 이점에 대한 교수님의 생각을 듣고 싶습니다. 예컨대, 평화헌법 9조를 개정하여 전쟁을 할 수 국가를 추구한다든가, 자위대 창설 등의 움직임이 확연해지면서 근대초입(近代初入)과 20세기 내내 동아시아가 겪었던 악몽(惡夢)이 되살아나는 것은 아닌지 하는 우려가 큰데 이점에 대해 말씀해주십시오.


답) 아베 신조(安倍晋三) 수상이 이끄는 일본 정부의 내외 정책, 특히 군사국가를 지향하는 정책이 동아시아 각국, 특히 한국사람들이 많은 우려를 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근대 초두부터 20세기 사이에 일본의 침략에 의해 일어난 ‘악몽’이 다시 오게 되느냐”는 일본 국민과 여러 이웃 나라 국민의 정치적 동향에 달려 있다고 하겠습니다. 현재 일본에서는 아베 자민당과 공명당, 그리고 그 보완 정당으로써의 「일본 유신의 회」등의 정권 여당의 독주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한편 야당과 시민의 공투(共鬪)도 진행되고 있습니다. 작년의 참의원 선거에서는 전국 32개의 선거구 모두에서 야당 통일 후보가 실현되고, 11개 선거구에서 승리했습니다. 또 10월의 니가타현 지사 선거에서는 “원전의 재가동을 허락하지 않는다”고 공약한 야당과 시민의 통일 후보가 압승했습니다. 야당과 시민의 공동의 힘이 조직적으로 전국적인 정치 동향에 대해 큰 영향력을 발휘한 것은 일본의 근대 정치사상에서도 처음의 일입니다.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각 국민들의 정치적 역량도 일본 군국주의가 침략을 자행한 100년 내지 150년 전과 크게 변했습니다. 역사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않고 한국을 비롯하여 동아시아 각 민족을 침략해 놓고 그 죄과를 여전히 인정하지 않고 있는 일본의 아베신조 정권이 과연 세계의 여러 국민들한테 존경 받을 것 같습니까?



문) 끝으로, 동아시아 공동번영을 위해서 무엇이 필요하며, 동학농민혁명에서 우리가 배워야할 것은 무엇인지에 대해 교수님의 고견(高見)을 듣고 싶습니다.


답)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70년이 지났습니다. 세계에 눈을 돌리면 제국주의의 시대에 소수의 제국주의 국가들이 침략을 자행하던 시대와 크게 달라졌습니다. 미국에서는 “트럼프 선풍”과 같이 그것에 기대하는 세력이 여전히 힘을 가지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만 세계사적으로 볼 때 온갖 측면에서 모순을 드러내고 있는 “월가 자본주의”가 계속 발버둥치면서 지구를 존망의 위기에 몰아넣을지, 아니면 세계의 이성이 그것과 맞서 새로운 시대를 개막시킬는지 그 역사적, 지구사적인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후천개벽(後天開闢)을 주장한 동학농민혁명의 사상이 전세계의 이성과 함께 인류사의 새로운 문을 여는 데 한몫 해주는 것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문) 긴 시간 대담에 응해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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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겨울 6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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