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6주년 제주 4·3 추념식 참관기 
최두현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기획운영부장
  잔인한 계절이라는 4월. 제주 4·3을 만나는 것은 늘 고통이고 눈물이다. 아름답다고 표현으로는 부족해 어법에 안 맞는 ‘너무’가 들어가야 딱 맞는 ‘너무 아름다운’ 섬 제주. 이곳에서 1948년 4월 3일, 이승만 주도의 남한 단독 총선거를 반대하는 항쟁이 일어났다. 38선 남쪽만 실시하는 총선은 결국 남과 북이 분단국가가 될 것이라는 너무도 명백한 분단 시나리오를 거부했다.
  제주도민들의 항쟁에 이승만과 미 군정은 대규모 토벌 작전으로 제주도를 그야말로 죽음의 섬, 살아있는 것들은 다 죽여도 괜찮다는 초토화 작전을 펼쳤다. 한라산 중산간 지대에 산다는 이유로, 젊다는 이유로, 마을에서 봉기군이 나왔다는 이유로, 부모·형제가 산으로 토벌대를 피해 들어갔다는 이유로, 그저 제주도민이라는 이유로 학살을 당했다. 참으로 말하기 불편하고, 무서운 말이지만, 국어사전은 이것을 양민 학살이라고 정의한다. 그 숫자가 자그마치 3만 명이라 한다.
  이들은 토벌대에 의해 총탄을 맞았고, 동굴 속에서 연기에 질식사했고, 제주북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총살되었고, 관덕정 앞 거리에서, 성산 일출봉 아랫마을에서 그리고 제주 관문인 제주국제공항 활주로에서 총살되고 암매장되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수십 명씩 배에 태워져 바다로 가 수장되었고, 수천 명이 목포와 광주, 전주, 대전, 경기도 등의 형무소로 이송되어, 그곳에서 한국전쟁 직후 총살당하거나 행방불명되었다. 76년이란 세월이 흘렀지만, 이렇게 잔인하고 무도한 학살이 진행되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
  2019년 추념식에서 김연옥 할머니의 사연을 소개한 대학생 손자는 바다가 보이는 곳을 자주 찾는 할머니를 보며 “우리 할머니는 바다를 참 좋아하신다.” 생각하면서도 바다에서 난 것은 멸치 하나라도 먹지 않는 할머니를 보며 이상하게 생각했다고 한다. 뒤늦게 할머니 사연을 들어보니, 4·3 당시 아버지와 어머니, 오빠, 동생이 모두 바다에 수장되어 죽임을 당했다. 그 여덟 살의 할머니는 부모·형제의 시신을 물고기들이 다 먹었을 거라는 생각에 아무리 먹고 싶어도 바다 고기 먹는 것을 참고 70년을 살아왔다고 한다.
  76주년 추념식이 열린 올해도 유족 김옥자 할머니는 다섯 살 나이에 아버지와 어머니가 죽임을 당했다. 다섯 살 할머니는 부모가 죽자 고모의 자식이 되어 살았다. 평생 아버지, 어머니라는 말을 한 번도 소리 내어 불러보지 못했다고, 친구들이 “우리엄마, 우리아빠” 할 때 자기는 그런 말을 한 번도 해보지 못했다고 한다. 부모 없이 자라며 제대로 배우지 못해 육지에서 식모로 공장 여공으로 일하다 다시 제주로 돌아왔다. 김 할머니는 76주년 추념식에서 AI 기술을 활용해 복원한 아버지 얼굴과 목소리를 처음 봤다. 다소 의례적인 식순과 발언 등으로 진행되던 추념식 현장에서 김옥자 할머니 사연은 모든 참여자가 눈물을 훔치게 했다. 여기저기 객석에서 터져 나오는 “아이고, 얼마나 힘들었을까, 참말로, 우리랑 비슷하네.” 등을 들으며 눈물을 감출 수 없었다. 젊은 20대 남성도, 교복을 입은 학생들도, 유명 정치인이자 야당 대표도, 현장을 찾은 국무총리도, 일본과 몽골에서 온 참여자들도 다섯 살 어린이가 부모 없이 76년을 살아온 삶의 무게와 설움, 한 번도 불러보지 못한 아버지, 어머니를 부르는 눈물에 함께 울었다.

각명비: 4·3 당시 희생당한 분들의 성명·성별·당시 연령·사망 일시와 장소 등이 기록되어 있다.(자료 출처: 제주4·3평화재단)  죽음의 제주 섬을 피해 4·3 당시 일본으로 밀항한 사람들도 많았다. 많게는 약 1만 명의 제주도민이 일본으로 밀항했다. 일본 오사카 이쿠노구 코리아타운에는 제주 출신들이 특히 많이 살고 있다. 4·3 당시 “제발 내 눈앞에서는 죽지 말라.”라는 부모님의 호소에 20대 청년, 시인 김시종은 부모와 영원한 이별을 했다. 제주 출신 소설가 김석범도 제주 4·3에 빚진 삶에 조금이라도 부끄러움을 덜어내고자 12권짜리 소설 『화산도』를 30년이 넘는 기간에 걸쳐 완성했다. 살기 위해 제주를 탈출한 밀항자의 삶을 그린 반성문 같은 소설을 남겼다. 그것은 소설이 아니라 저자의 눈물이고, 제일 조선인의 피맺힌 절규이며, 제주와 일본 사이의 바닷물로도 채울 수 없는 그리움과 살아남은 사람들의 회한일 것이다.
  76주년 제주 4·3 추념식에 참석하기 위한 우리 일행은 동아시아민주네트워크 소속, 5.18재단, 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 노근리재단,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그리고 우리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사람들이 제주 4·3 평화재단의 초청으로 참석했다. 100mm 이상의 비가 내린다는 예보가 있었지만, 행사 시간 때인 오전 11시 바람 많은 제주도지만, 비바람 없어 실외행사로 1만 명의 제주도민과 유족들이 참석한 가운데 진행될 수 있었다.
  제주 출신 배우 고두심 씨가 부모 없이 살아온 다섯 살 김옥자 할머니를 소개했고, 가수 인순이 씨가 할머니와 유족들을 노래로 위로했다. 국무총리가 유족과 희생자를 위로하고, 국가의 책임과 역할에 미흡한 점이 없도록 노력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럼에도 제주지사와 유족회장, 행사장에서 만난 사람들은 아직도 밝혀져야 할 진실이 너무 많다고 말했다. 4·3을 왜곡하는 사람들의 무지와 억지를 바로잡아야 하며, 여전히 찾지 못한 행방불명자, 당시 불법 재판으로 수형생활을 했던 사람들에 대한 보상과 배상, 트라우마 치유를 위한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 등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돌아오는 길, 함께한 동료가 “역사적 사건을 기념하는 일의 무게가 참 만만치 않다.”라고 말했다. 추념식 장소에서 눈물 흘리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우리도 자랑스러운 동학농민혁명의 정신을 어떻게 계승하고 선양할 것인지 그 책임감이 더욱 무거워지는 4월이었다.
  끝으로 끈질기고 열정적인 활동으로 제주를 인권과 평화의 섬으로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하고 있는 4·3평화재단에 깊은 존경과 감사를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