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혁명 참여자 황성도의 증손자 황대규

문) 아산과 예산지역에서 일어났던 동학농민혁명의 역사적 의미를 되살리고, 그 정신의 현재화를 위해 아산지역 유족회 활동은 물론이고 지역의 기념사업 단체 활동에도 적극적이신 선생님을 이렇게 찾아뵈니 기분이 새롭습니다. 먼저, [녹두꽃] 독자들에게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답) 안녕하세요. 저는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황성도의 증손자 황대규입니다. 현재 예산·아산유족회 회장과 전국동학농민혁명유족회 부회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원래 제 고향은 천안 직산면 마정리입니다. 증조할아버지께서 동학농민군으로 실제 활동하신 지역이에요. 그런데 동학농민혁명 이후에 그곳 고향을 떠나서 살았지요. 동학농민혁명 이후 혁명에 가담한 사람은 물론이고 그 자손들까지 역적의 가족으로 몰려 박해가 심해서 도저히 살 수가 없어 증조할머니께서 자식들을 데리고 고향을 떠나신 거죠. 그 당시 제 할아버지가 10살, 작은 할아버지가 7살이었다는데, 어린 아들 둘을 데리고 집안을 지켜야 되니까 증조할머니께서 고향을 떠나 아산으로 이사를 해서 자리를 잡았다고 해요. 그래서 저는 고향이 아산입니다. 이후 저는 젊을 때 서울로 올라가 사업을 하다가 나중에 아산으로 내려왔는데, 아산으로 내려와 산 지가 벌써 34년 정도 되었네요.
문) 황성도 증조부님께서 1894년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했다는 사실은 언제 알게 되었는지요?
답) 제가 성주황씨 대종손이거든요. 어릴 때 어른들께서 보통 집안 내력에 대해서 말씀을 해주시잖아요. 더군다나 저는 종손이니까 저한테는 그런 말씀을 더 많이 해주신 것 같아요. 제가 초등학교 저학년쯤 되었을 때, 증조할머니는 80살이 넘은 노인이었어요. 증조할머니 말씀이 증조할아버지께서 동학농민혁명에 가담을 했다가 수원 감영에 붙잡혀서 돌아가셨는데, 직접 시신을 모셔다가 장례를 치렀다는 이야기를 하셨어요. 그 당시에 일꾼들 대여섯 명을 두고 농사를 크게 지어서 집안이 살만했었데요. 수원감옥에서 교수형을 당해 돌아가셨는데, 일꾼들을 데리고 가서 시신을 수습해서 모시고 온 거죠. 이런 이야기를 증조할머니께 직접 들어서 참여사실을 알게 되었어요. 증모할머니께 그런 얘기를 듣기는 했지만 그동안에는 먹고 사는 게 바쁘다보니 거기에 관심이 없었죠.
문) 증조부께서 동학농민혁명 당시 천안 직산에서 활동하셨는데, 증조할머니나 아니면 다른 분께 증조부께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게 된 배경이나 갑오년 당시 그분의 활동 등에 대해 얘기를 전해들은 것은 없으신지요?
답) 증조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는 증조할머니께서 해주셨는데 어릴 때 들어서 그런지 기억이 잘 나지 않아요. 증조할아버지가 활동하신 지역인 천안 직산면 마정리는 꽤 외진 곳이에요. 산 중인데다가 동네하고 동떨어져 있는 외진곳이었다고 해요. 그렇게 외진 곳인데도 증조할아버지가 살아계실 때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고 해서 외지 사람들의 왕래를 잦았다고 해요. 증조할아버지를 만나러 밤낮없이 찾아오는 손님들이 많았고, 증조할아버지도 가끔씩 집을 비우고 나가셔서 며칠씩 묵고 들어오시곤 했다고 해요. 상당히 활동이 활발하셨던 것 같아요. 집이 산 중에다가 외진 곳이니까 도리어 암암리에 모여서 무슨 일을 추진하기에 안성맞춤이 아니었나 싶어요. 그래서 많은 외지 사람들이 찾아들었던 것은 아닌가 싶어요.
문) 증조부님은 어떤 분이셨다고 들으셨는지요? 증조부님에 관한 일화나 전해 내려오는 얘기가 있으면 말씀해주십시오.
답) 증조할아버지께서는 1894년 10월, 집에 계시다가 갑자기 붙잡혀갔다고 그래요. 증조할머니께서 한 달 동안 수원에 가서 옥바라지를 하면서 거기서 지내셨다고 하더라고요. 잡혀가신지 한 달 만에 교수형을 당하셨대요. 증조할머니한테 제게 직접 얘기해주신 것으로 지금도 생생한 것은 증조부 시신을 모시고 오는데 상당히 어려움을 겪으셨다고 해요. 일꾼들을 데리고 수원에서 숙소를 정해놓고 지내다가 틈을 살펴서 시신을 수습하여 모셔왔다고 하더라고요. 현재 천안 직산면 마정리 성주황씨 선산에 모셔져 있는데, 저희는 손이 귀한 집안이라 그곳에 조상 묘가 대대로 있어요. 증조할아버지 제삿날이 족보에서는 음력 11월 20일인데, 서류상에서는 11월 19일인가 하루 이틀 차이가 나더라고요.

문) 혹여 증조부께서 남긴 서책이나 동학농민혁명 당시 활동하시면서 남긴 유품은 없는지요?
답) 예전에 집안에 궤짝이 하나 있었어요. 그 궤짝에 서책이 가득 차 있었는데, 옛날 시나 어떤 일에 대한 내력을 쓴 것들로 보였어요. 그런데 제가 젊었을 때 서울로 올라가 건축 관련 일을 업으로 삼다보니 이사를 자주 다녔어요. 그 과정에서 안식구가 간수하기도 곤란하고, 이사 다닐 때마다 짐스러워 힘이 든다고 홀랑 불태워버렸어요. 그걸 지금도 굉장히 후회하고 있어요. 안식구도 그 일 때문에 지금도 많이 속상해하고 그래요.
문) 지금으로부터 123년 전인 1894년 낡은 봉건제도를 개혁하고, 일본 제국주의의 국권침탈에 맞서 결연히 일어났다가 갑오선열들께서 희생되셨습니다. 그분들의 희생에도 불구하고 동학농민혁명은 일제 강점기라는 우리 민족의 암흑기를 거치면서 극심하게 왜곡되었고, 해방 이후로도 국내외 정치정세가 여의치 못해 그 역사적 의미가 제대로 바로서지 못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했던 분들은 ‘비도’, ‘역도’등으로 매도되었고, 그 후손들도 숨죽이면서 살아야했습니다. 증조부께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했다는 사실 때문에 피해를 입었다든가 고초를 겪었다던가 하는 얘기를 어른들에게 들은 적은 없는지요?
답) 증조할아버지가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기 전에는 형편이 괜찮았었는데,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셨다가 증조할아버지께서 사형을 당하신 후 살기가 무척 어려웠다고 해요. 고향에서 재산도 제대로 정리도 못한 채 적당히 정리를 해서 아산으로 도망치듯, 야반도주하듯 아산으로 이사를 왔다고 해요. 고향을 떠나서도 어린 자식들 때문에 젊어서 고생을 많이 하셨겠죠. 저희 집안이 손이 상당히 귀해요. 그래서 아들 둘을 지켜야 되니까 할머니는 오직 자식을 지켜야 한다는 마음으로 사셨다고 해요. 종갓집이 되다보니까 종손 며느리인 증조할머니 책임이 굉장히 무거웠을 것 같아요. 그렇게 힘든 상황에서도 아들들을 열심히 키우고 집안을 잘 지켜서 가문을 보존해주신 증조할머니가 우리집안에서는 아주 공이 큰 분이시죠. 증조할머니는 1942년쯤 아산으로 이사 오고 돌아가셨으니까 해방 직전 1942년쯤 돌아가셨어요.
문) 동학농민혁명은 오랜 시간 왜곡을 겪어오다가 백주년을 전후하여 전국에서 기념사업단체가 역사바로세우기에 나섰고, 그 과정에서 뿔뿔이 흩어져 있던 유족 분들을 찾아 동학농민혁명유족회도 창립준비위원회를 조직하고, 1994년에 정식으로 유족회가 창립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전국의 기념사업단체 관계자들과 유족회 회원들의 헌신적인 활동에 힘입어 2004년 2월 29일 [동학농민혁명참여자등의명예회복에관한 특별법]이 제정되었고, 3월 5일 대통령령으로 공포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실로 110년 만에 반란사건의 멍에를 벗고 의로운 혁명으로 복권이 이루어지게 된 것이지요. 이에 대하여 참여자 후손으로 감회가 남다를 것 같은데 어떻습니까?
답) 어릴 적부터 동학에 대해서 들어왔지만, 동학~하면 그런가보다 하고 별 관심이 없었어요. 특별법이 생기면서 참여자 후손 유족등록을 하게 되니까 천안에서 참여자 조사위원으로 활동했던 6촌 동생이 연락을 해왔더군요. 그래서 유족등록을 하려고 준비를 시작했는데 참 애로사항이 많았어요. 증조할아버지 관명이 황영헌이거든요. 그런데 동학에 활동하신 이름은 황성도로 되어있어서 이름이 다르다는 거예요. 여러 자료에는 황성도로 나오는데, 할아버지 관명은 황영헌이니까 이름이 맞질 않아요. 그래서 조사를 자세히 하게 되었는데, 마정리에서 거주한 황씨가 누구인지 조사해보니 그곳에 거주한 사람은 우리 밖에 없었어요. 지역 사람들도 증조할아버지가 어떻게 돌아가셨고, 증조할머니께서 시신을 모셔온 것도 아니까 동학에 참여한 사실이 증명된 것이죠. 또 미력산 그 지역이 6만평이 넘는데, 그 산이 우리 종중산이니까 다른 사람은 살 수도 없었고 우리밖에 없었거든요. 황성도라는 사람이 황영헌과 동일 인물로 인정되어서 유족등록이 되었어요. 이름이 달라서 그때 조사하느라고 시간이 꽤 걸렸었어요. 조사를 하면서 무슨 생각을 했냐면 사람이 궁지에 몰리게 되면 살기 위해서 여러 가지 꾀를 내잖아요. 아마 본인 이름을 대면 집안에 여러 곤란한 일이 생길까봐 이름을 바꾼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그렇게 해서 유족등록이 이루어졌습니다.

문) 인근 예산과 태안지역에서도 동학농민혁명 정신을 계승·발전시키고자 많은 분들이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데, 서로 기념사업을 추진할 때 연대해서 활동하시죠?
답) 기념사업을 추진하는 단체가 예산지역과 아산지역 그리고 태안지역에도 있어요. 태안에서는 매년 10월 추모제를 지내고, 예산에서는 11월에 제례를 지내는데 아산에서는 아직 특별하게 추진하는 행사가 없어요. 그래서 지금 아산에서도 뭔가 새롭게 기념사업의 바탕을 마련할 기초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아산지역 회원 몇 명과 아산지역 유적지 답사도 다니고, 다른 지역에서 개최되는 기념행사에도 참석하면서 견문을 넓히고 있습니다.
문) 참여자 후손 분들의 연세가 70~80대 어른들이시라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저기 저 느티나무에다가 세월을 묶어놓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참여자 유족 어른들께서 날이 다르게 연로해지시니 걱정입니다. 선생님께서도 각별히 건강 유의하셔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기념재단에 바람이 있다면 말씀해주십시오.
답) 동학농민혁명은 전라도 지역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전국 각지에서 모두 들고 일어난 전국적인 혁명이었잖아요? 특히 충청도 지방에서도 많은 전투가 벌어졌고, 이쪽 지역의 사람들이 정말 많이 희생되었다는 것이 밝혀졌어요. 태안 백화산도 그렇게 예산 관작리도 그렇고, 홍성도 그렇고... 그런데 현재까지는 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이 전국적으로 활발하지 못하고 주로 전북지역에서만 활발하잖아요? 다른 지역에서 기념사업을 늦게 시작한 때문이기는 하지만 기념재단이 물론 전라도 지역의 일도 해야겠지만 정부부처 산하기관이니만큼 전국적인 선양사업, 범국민적인 선양사업을 기획하고 추진하는 것에 더 중요한 일이다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문) 네, 선생님 말씀 유념하겠습니다. 바쁘신 와중에도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내내 건강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