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소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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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가을 61호
대둔산 벼랑 위에 선 동학농민군

동학농민혁명 마지막 항전지 기행(2024년 3월 13일)


신병구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기념관운영부장


1. 동학농민혁명의 끝


  대중이 ‘동학’으로 통칭하는 동학농민혁명은 어두웠던 대한민국 근대사를 밝힌 불꽃임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왜곡되고 숨겨진 채 100년 이상을 지나왔다. 동학농민혁명이 제 이름을 찾고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뿌리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은 채 30년도 되지 않았다. 그 30년 동안 작고하신 이이화, 한승헌 같은 분들과 전국의 동학농민혁명 연구자, 기념사업 단체 활동가들이 노력한 결과 2004년에는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명예 회복법(약칭)”이 만들어지고, 2019년에는 동학농민혁명 국가기념일이 제정될 수 있었다. 이와 더불어 법률에 따라 문체부 특수법인으로 세워진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이 2010년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기념사업을 해 왔지만, 우리 사회의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인식은 아직 ‘고부 군수 조병갑’과 ‘녹두장군 전봉준’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에게 동학농민혁명이 어디서 어떻게 끝났는지 아느냐 물으면 열에 아홉은 대답을 머뭇거린다.


  동학농민군 총관령 김개남이 전주(1895년 1월 8일)에서 목이 잘리고 녹두장군 전봉준이 종로에서 사형(1895년 3월 30일)을 당한 이후, 거의 30만 명에 달했다는 동학농민군 중에 살아남은 이들은 얼마나 될까? 그리고 그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 동학농민혁명 당시 최대 전투였던 공주 우금치 전투 이후 전라도로 후퇴한 동학농민군을 포함한 고산, 진산 일대의 접주 이상의 동학농민군들은 대둔산 정상 부근으로 모여들었다. 초막 3개 동을 구축하고 관군과 민보군, 일본군과 대치하였다. 결국, 1895년 1월 24일(양력 2월 18일) 관군과 일본군의 공격으로 소년 1명을 제외한 25명의 동학농민군이 관군과 일본군의 총에 맞아 장렬한 최후를 맞이하였다. 이 중에는 임산부도 있었으며, 접주 김석순은 일본군에 항복하지 않고 한 살쯤 되는 여자아이를 끌어안고 150m 되는 절벽으로 뛰어내려 최후를 맞이하였다.(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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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규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연구조사 부장

[전북일보](2015. 1. 9.) 기고문 중에서

 

  서울로 향하던 동학농민군의 주력부대가 우금치에서 일본군에 의해 무너지고, 사방으로 흩어진 농민군들은 전라도 장흥에서 충북 보은에서 또 전국 각지에서 죽임을 당했다. 특히 여기 대둔산은 여러 문서에서 동학농민군의 마지막 항전지로 기록하고 있는 곳인데, 연구자들을 제외하고 그 내막에 대해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지금으로부터 25년 전인 1999년 어느 날, 역사학자인 신순철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이사장(전 원광대 사학과 교수)과 이병규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연구조사 부장은 문헌으로만 확인한 대둔산 동학농민군 최후 항전지를 찾아보기로 마음먹고 조사단을 꾸려 대둔산으로 왔다고 한다. 그들은 대둔산 형제바위 근처를 맴돌며 찾아 헤맨 끝에 동학농민군들이 3개월간 항전을 벌였다는 절벽 위 역사의 현장을 찾아냈고, 탄피 등을 수습하여 동학농민군 마지막 항전지의 실체를 세간에 밝힐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2. 동학농민군을 따라 대둔산으로


  동학농민혁명 130주년이 되는 올해 초,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에서는 대둔산 최후 항전지 답사를 계획하였다. 최근 완주군을 중심으로 대둔산 항전지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상황에서 JTV 전주방송과 우리 기념재단이 대둔산 최후 항전지를 답사하며 그 과정을 촬영하기로 한 것이다.


  기념재단 답사팀의 길라잡이는 대둔산 항전지 최초 확인자인 신순철, 이병규 두 분이 맡아 주시기로 하고, 2024년 3월 13일 오전 9:30까지 대둔산호텔 주차장에 집결하기로 했다. 우리 목적지가 대둔산 정상 높이까지 올라가야 하는 상황이라 전체 인원을 둘로 나눠 코스도 두 갈래로 잡았다. 한 무리는 신순철 이사장님이 이끌고, 또 한 무리는 이병규 연구조사 부장이 이끌기로 한 것이다.


  우리 팀은 JTV 촬영팀 3명, 나와 이병규 부장을 포함한 재단 직원 7명으로 총 10명이었는데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가 능선을 오르내리며 유적지를 찾아가기로 했다. 다들 평소 운동 없이 사는 사람들인지라 길 없는 산비탈을 몇 번씩 오르내려야 한다니 지레 겁먹고 우는소리를 했다. 하지만 130년 전에 쫓기고 쫓겨서 할 수 없이 이 계곡을 건너고 산비탈을 올라갔을 이들을 생각하면 함부로 투덜거리기도 민망했다.


  중간중간 길이 없는 곳이 나올 때마다 이병규 부장이 방향을 짚어줘서 그나마 헤매지 않고 항전지를 숨겨 품은 절벽 앞에 다다를 수 있었다. 시간은 케이블카에서 내리고 난 뒤 1시간 반 가까이 지나 있었다.


동학농민군 대둔산 항전지가 있는 절벽 


  “항전지는 이 절벽 너머에 있습니다.” 이병규 부장의 안내를 듣고, 이곳을 마지막 항전지로 삼겠다고 처음 생각한 이는 누구였을지 궁금했다. 처음 이곳에 도착한 이들 중 누군가는 나처럼 이렇게 암벽을 타고 올라갔을지 모른다. 하늘로 날아오르는 방법 외에는 더 도망갈 곳이 없는 막다른 곳에 이르러 동학농민군들은 어떤 내일을 상상했을까 하는 생각도 스쳐 지나갔다.



3. 바람이 되어 날아간 사람들


  농민군이 머물렀던 자리는 생각보다 넓었다. 절벽 위 편평한 공간 안쪽에 고인돌처럼 놓인 큰 바위가 있고, 그 아래로 몇 명은 들어갈 만한 공간이 있어 이곳이 주둔지의 중심이려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일행이 항전지를 둘러보며 숨을 돌리고 있을 때 멀리서 우리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신순철 이사장님 일행도 건너편 정상에 도착한 것이다. 부르는 쪽 가장자리로 가니 벼랑 끝에 농민군이 쌓은 것으로 보이는 돌무더기가 경계석처럼 낮게 이어져 있었다. 아래를 내려보다 아찔해서 나무에 기대앉았다. 허공 너머 건너편까지는 어림짐작해서 직선거리로 150m 정도 되려나 싶은 거리다. 농민군이 이곳에 결사항전의 자세로 버티고 있을 때 관군이, 일본군이 저 건너편 정상으로 올라와 이쪽을 향해 항복을 종용하기도 하고 총으로 공격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사장님 일행이 이쪽으로 넘어와 합류하기를 기다리며 우리는 방송에 나갈 인터뷰를 촬영했다. 내 차례가 왔을 때, PD가 질문했다. “여기에 오겠다고 마음먹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130년 전에 여기 계셨던 분들이 어떤 심정이었을지 그 마음을 더듬어보기 위해 올라왔습니다.”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사무실에 앉아 책을 보면서는 생각하기 어려운, 그들이 서 있던 자리에 섰을 때 비로소 실감할 수 있는 그런 마음을 여기 오면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막상 올라와서 보니, 백척간두에 서더라도 꿈꾸던 세상을 포기하지 말자고 다짐했던 사람들이 더듬어지고, 동학농민군이라면 마지막 한 사람까지 잡아 죽이겠다고 쫓아 올라온 저쪽 사람들도 어른어른 상상이 된다.


  지금이야 이쪽저쪽 서로 반갑게 손 흔들었지만, 130년 전 그때는 저 봉우리에서 이 봉우리로 험한 말이 날아왔을 것이고, 총탄이 날아왔을 것이다. 한겨울 눈보라처럼 차디찬 적개심과 협박이 농민군들을 극한으로 몰아붙였을 것이다. 더이상 물러설 곳 없이 내몰린 그들의 심정을 나는 차마 상상도 하기 어렵다. 벼랑 끝에 서서도 꿈을 버릴 수 없었던, 의지를 지키고 싶었던 마지막 농민군들은 결국 여기서 바람이 되어 날아오를 수밖에 없었으리라.



4. 동학농민혁명, 아직 끝나지 않은


  동학농민군의 마지막 항전은 여기 대둔산, 해발 700m 공중에서 끝났지만, 그렇다고 동학농민혁명이 끝나버린 건 아니다. 근대식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은 동학농민군과 싸워 이기고 결국 조선의 상투를 잡아 흔들었다. 그리고 한반도를 전진기지 삼아 전선을 넓혀 아시아 전체를 전장으로 만들었고 헛되고 몰염치한 망상을 좇느라 수많은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동학농민혁명의 후예들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저항했으며, 일제 강점기에도 어린이 인권운동, 여성 인권운동, 독립운동으로 그 정신을 이어 나갔다. 그리하여 끝내 대한민국이라는 독립된 국가를 이뤄냈고, 오늘날 이 나라를 세계가 손꼽는 선진국의 대열에 합류하도록 만들었다.


  그러고 보면 백성들은 3•1운동으로 4•19혁명으로 5월 광주로, 나라가 필요할 때마다 몇 번이고 다시 봉기하였으니 동학농민혁명은 갑오년에 그냥 끝나버린 것이 아니었다. 불의한 것들에 저항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못 배기게 만드는 강력한 혁명의 DNA,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동학농민혁명이 우리 후손들의 핏줄에 심어준 위대한 유산이 아닐까 생각한다.


동학농민군 대둔산 항전지에서 희생자를 기리며 


  하산 중에 신순철 이사장님은 조만간 도청, 완주군과 협의하여 대둔산 동학농민군 마지막 항전지 정비 사업을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가는 길이 위험해서 항전지까지 탐방로를 연결할 수는 없겠지만, 바로 저곳이 마지막 항전지이고 이런 사람들이 있었다는 걸 후세가 알 수 있도록 안내판을 세워야 한다는 의견이다. 정상으로 가는 등산로 중간, 항전지가 가장 잘 보이는 곳에 표지석을 세우고 설명하는 안내판을 세우는 것이 최선일 것이다. 이와 더불어 폐사지 샘터로 가는 길에 대한 설명과 표지도 함께 만들어주면 좋을 듯싶다.


  누군가는 죽는 그 순간의 모습으로 살아온 삶 전체를 증명하는 예도 있다. 여기 마지막 항전지에서 생을 마감한 다양한 나이의 동학농민군도 그런 경우라고 생각한다. 이들은 각기 살아온 길이 달랐지만, 마지막 순간을 스스로 선택함으로써 함께한 사람들과 같은 꿈을 꾸고 있었으며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130년 전에 올라가 결국 내려오지 못한 사람들을 등 뒤에 두고 나는 올라간 지 몇 시간 만에 산에서 내려와 집으로 간다. 집으로 가면서 생각했다. 대한민국의 미래 세대에게 물려주어야 할 중요한 가치가 함께 잘사는 상생(相生)이면 좋겠고, 더불어 공평한 공정(公正)이면 좋겠고, 불의한 것에 굴복하지 않는 당당함이면 좋겠다고. 이런 가치야말로 130년 전, 대둔산 벼랑 위에 섰던 동학농민혁명군이 흔적으로 남아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유산이요, 정신이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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