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호사 한승헌 인터뷰
일 시 : 2017년 4월 17일 12시
대 담 : 한승헌 변호사, 문병학 기념재단 기념사업부장

이번 호 대담은 2017년 4월 17일 서울에서 한승헌 변호사를 만나 동학농민혁명 100주년을 준비하던 단계에서부터 [동학농민혁명참여자등의명예회복에관한특별법]이 제정되기까지 기념사업의 역사를 되돌아보는 내용으로 진행되었다.
우리나라 양심수 변호사의 대명사격이자 김대중 국민의정부 때 감사원장을 역임한 한승헌 변호사는 1992년 동학농민혁명백주년기념사업회 공동대표직을 맡은 후 (사)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이사장, 동학농민혁명백주년기념사업단체협의회 공동대표, 동학농민혁명군지도자유해봉환위원회 상임대표 등을 맡아 일제 강점기를 통해 왜곡되고 축소된 채 역사의 뒤안길에 버려져온 동학농민혁명사의 복권을 위해 10년 넘게 헌신적으로 활동하였다.
문) 변호사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자주 찾아뵙고 인사 여쭤야 하는데 그러지 못해 죄송합니다. 우리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에서 발행하는 소식지 『녹두꽃』 독자들께 귀한 말씀 전해주시기 위해 이렇게 시간을 내주셔서 고맙습니다. 먼저, 변호사님 근황은 어떠신지요?
답) 보내주시는 <녹두꽃>, 잘 받아보고 있습니다. 먼저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의 발전에 박수를 보냅니다. 저는 조상 때부터 ‘한가’인데 아직도 한가하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예전에 비해서 외부 활동을 줄이고 은둔하는 가운데 책과 자료 등의 정리에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런 중에 옛날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시절의 여러 기록과 자료도 다시 접하게 되어 감회가 새롭기도 하지요. 금년 초에는 일본의 다큐멘터리 감독인 마에다 겐지(前田憲二) 씨가 동학농민혁명을 주제로 한 기록영화를 만드는데 후원회 대표를 맡아 스토리펀딩으로 제작비 모금을 해서 보냈습니다. 요즘에는 외부와의 접촉을 최대한 억제하고는 있지만, 그렇다고 아직 한가하지는 못해요. 토정비결이 그런가 봅니다.
문) 제가 변호사님을 처음 뵌 것이 1992년 6월 동학농민혁명백주년기념사업회 창립대회 때였습니다. 그러니까 벌써 25년이 되었습니다. 변호사님께서 동학농민혁명백주년기념사업회 약칭 ‘동백사’공동대표를 맡으신 것을 시작으로 동학농민혁명백주년기념사업단체협의회 공동대표, 동학농민혁명군지도자유해봉환위원회 상임대표, 사단법인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이사장 등을 역임하시면서 왜곡되고 축소되어온 동학농민혁명의 역사를 바로세우기 위한 사업에 오랫동안 헌신하셨습니다. 먼저, 동학농민혁명백주년기념사업회가 창립되었던 1992년 상황에 대해 말씀해주십시오.
답) 벌써 그렇게 많은 세월이 흘러갔군요. 저는 1992년에 동학농민혁명 100주년 기념사업회(동백사)가 출범할 때에 축사를 한 것이 인연이 되어, 처음엔 조용술 목사님, 김삼용 원광대 총장님과 3인 공동대표로 기념사업회를 이끌기로 하고 참여의 첫발을 내딛게 되었지요. 그리고 이 단체가 1993년 7월에 사단법인체로 전환하면서 이사장으로 취임하게 되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동학농민혁명’이란 말보다는 ‘동학란’이란 말이 널리 쓰이던 시절이었고, ‘동학’이란 말만 나와도 무슨 반란 사건처럼 불온시하는 분위기가 남아 있을 때여서 여러모로 힘이 들었지요.

문) 법인체로 인가 받은 바로 다음 해인 1994년 동학농민혁명 100주년 기념사업을 전국적인 차원에서 다양하게 펼쳤지요?
답) 그렇습니다. 먼저 역사문제연구소, 한국민족예술인 총연합 등 전국의 11개 단체가 참여하는 ‘동학농민혁명 백주년기념사업단체협의회’를 결성했지요. 전주시청 앞 광장에서 성대한 기념식을 하기로 예정되어 있었는데, 문제는 지도층 인사들이 참석을 꺼리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전북지사에게 축사를 부탁했더니, “지금으로 말하면, 도지사인 제가 반란군(농민군)에게 쫓겨 도망간 관찰사인 셈인데, 무슨 면목으로 기념식에 가서 축사를 합니까?”라는 대답이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오늘의 문민정부가 농민군에게 쫓겨 관찰사가 도망가던 왕년의 그런 부패 무능 정권이라면 굳이 행사장에 나오실 필요도 없습니다.”라고 했지요. 그런데 기념식에 지사가 행사장에 나오셔서 놀랐습니다. 물론 축사도 했고요. 따라왔던 경찰국장에게는 만세삼창을 맡겼지요. 이렇게 해서 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의 합법 공간이 넓어져서 그 후 각계의 협조와 참여를 이끌어내는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신문 방송 등 언론기관에서도 우리 기념사업회의 활동을 널리 보도해주곤 해서 활기를 띠게 되었지요.
문) 동학농민혁명 백주년 기념사업을 성대하게 마치고 난 2년 뒤에는 일본 훗가이도(北海島) 대학에 방치되어 있던 동학농민군 지도자 유해를 봉환하는 뜻깊은 일을 추진하셨는데, 그때의 과정이나 화제를 말씀해주십시오.
답) 100주년 기념행사 이듬해인 1995년 여름, 일본의 한 일간지와 국내의 한겨레신문에 일본 훗가이도(北海島) 대학 문학부의 한 방에서 종이박스에서 몇 구의 유골이 발견되었다는 기사가 사진과 함께 보도되었습니다. 발견된 6구의 유골 중 5구는 훗가이도의 아이누족 유골이었고, 나머지 1구의 유골 표면에는 “한국 동학당 수괴의 수급”이라는 글씨가 선명했고, 그 옆에 “전남 진도(珍島)에서 수거했다”는 문구가 적혀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홋가이도 대학 측에 그 유골의 한국 송환을 요구하는 서한을 보낸 뒤에, 직접 그 대학을 방문하여 그 유골이 동학농민군 지도자의 유해임을 확인하고, 한국에 송환하기로 합의를 보고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단체협의회, 동학농민혁명유족회, 천도교 등 전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 관련단체들과 협의하고 연대하여 ‘동학농민혁명군지도자유해봉환위원회’를 구성하여 유골의 한국 봉환을 추진하였습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 1996년 5월 30일, 동학농민군 지도자 유골을 한국으로 모셔 와서 진혼과 위령 행사를 거행하게 되었습니다.
문) 이때 변호사님께서 동학농민혁명군지도자유해봉환위원회 상임대표를 맡으셔서 동분서주하셨는데, 그때 일들에 대해 좀 더 자세히 말씀해주십시오.
답) 일본에 건너 간 우리 측 봉환단은 그해 5월 29일, 홋카이도대학 측과 공동으로 ‘동학농민군지도자 유해 봉환식’을 그 대학 강당에서 거행했는데, 그 행사에는 그 대학 총장을 비롯한 교수들, 각계 인사 및 시민운동가들과 삿뽀로의 한국영사관 관계자들이 참석하여 엄숙하게 진행되었습니다. 나는 고유문(告由文)을 통하여 “일본의 국립학교에서 의도적으로 한국인의 유골을 수집 방치한 데 대하여 일본정부가 마땅히 사죄하여야 한다.”고 역설했습니다. 그 자리에서 그 대학의 문학부장 하이야(灰野) 교수는 지난날 일본의 대학에서 식민학, 인종론 등을 연구한다며 한국인의 유골을 수집 방치한 처사를 사과했습니다. 그날 제가 읽은 고유문 중에는 “단언컨대, 그것은 산 사람을 끌어온 것보다 훨씬 더 음모성이 강한 야만적 처사다.”라고 질타했는데, 나중에 일본 측의 기록에 보니까 일본인들이 상당히 충격과 감명을 받은 것으로 적혀 있었습니다.

문) 유해는 동학농민군의 전주성 입성일 전날인 5월 30일에 국내로 봉환되어 진혼식 등 의식을 갖추었는데, 그때의 상황을 좀 들려주시겠습니까?
답) 유해는 KAL기편으로 김포공항에 도착 직후 공항 제2청사 의전실에서 동학농민유족회가 마련한 추모식이 있었고, 서울 시내 천도교 수운회관에서 동학민족통일회 주관의 위령식을 마치고 전주로 운구한 다음날인 5월 31일 동학농민혁명 전주입성 기념일에 사단법인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가 주관하는 진혼제를 거행하였습니다. 뒤이어 정읍 황토현전적지에 자리한 구민사(사당)로 이동하여 정읍동학농민혁명계승사업회 측에서 집전하는 제례를 마지막으로 모든 봉환 의례가 엄숙하게 잘 마무리하였습니다. 이 유골 사건의 홋카이도대학 측 진상 조사 및 한국 봉환에는 사학자인 이노우에(井上勝生) 교수의 진솔한 노력이 돋보였으며, 그와 동행 입국한 하이야 문학부장은 전주에서 열린 진혼제에서 이 유골 사건에 관하여 한국민에게 사과하는 문서를 낭독하기도 했습니다. 그때의 유해 봉환은 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단체 간의 유대 협력을 다지는 계기가 되었을 뿐 아니라 전국의 신문 방송에 크게 보도됨으로써 기념사업회의 역량을 널리 과시하는 기회가 되기도 했습니다.
문) 변호사님께서 사단법인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이사장으로 재임 중 추진하신 의미 있는 사업들이 참 많습니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일제가 식민사학자들을 동원하여 동학농민혁명이 지닌 핵심적인 내용의 하나인 반일민족항쟁의 역사적 의미를 거세했습니다. 이를 복원하기 위하여 1996년 10월 26일 반일항쟁의 기치가 본격적으로 올랐던 제2차 삼례봉기 지역에 ‘동학농민혁명 삼례봉기 기념비’(전북 완주군 삼례읍 삼례리)를 건립하고, 이후 삼례봉기 역사광장 건립을 추동하셨습니다. 이처럼 여러 의미 있는 기념사업을 추진하셨는데 그 중에서도 2001년 전주에서 열린 ‘동학농민혁명 국제학술대회’는 아주 특별했던 것 같습니다. 저도 그때의 기억이 아주 생생한데, 한·중·일 3국 역사학자들이 참여하여 성황을 이루었던 이 대회에 대해 말씀해주십시오.
답) 지금 생각해도 매우 벅차는 국제학술회의를 그만큼 성공적으로 마친 것은 큰 보람이었지요. 2001년 5월, ‘동학농민혁명의 동아시아적 의미’라는 큰 주제를 내걸고 한 중 일 세 나라의 학자, 전문가, 운동가, 각계 인사들이 모여 3박 4일간, 시종 진지한 분위기 속에서 발표와 토론이 진행되어 큰 성과를 올렸지요. 보통 국제학술회의라면 단상만 ‘국제’가 되는데, 그 행사에서는 객석 참가자들 중에도 일본인 중국인들이 상당수 섞여 있어서 ‘단하의 국제화’까지 이루어져서 참 좋았습니다. 이런 비화도 있었지요. 학술회의 기간 중에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문제가 재연되었을 때, 일본의 나카스카(中塚明) 교수가 자기 나라 정부에 대한 비난 성명 기초에 앞장서고, 그 발표(낭독)까지도 자기가 직접 하겠다고 자청한 것은 매우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문) 변호사님께서 펼치신 여러 사업들 중에서 또 잊을 수 없는 특별한 사업으로 동학농민혁명 대서사시 ‘음악극 천명(天命)’순회공연을 들 수 있습니다. 1999년 1월 서울 극립극장에서 상연되어 극찬을 받은 ‘천명’을 광주와 전주를 순회하면서 공연을 함으로써 대단한 호평을 받았습니다.
답) 음악극 ‘천명’은 도울 김용옥 원작, 국창 안숙선 주연의 동학농민혁명을 다룬 음악극이었는데, 제가 국립극장에서 그 공연을 보고, 우리 기념사업회가 주관하여 지방공연을 하면 1석2조의 효과가 있겠다 싶어서 전주의 기념사업회 임원들을 오시라고 해서 함께 관람을 하고 의견을 물었지요. 그랬더니 모두 대찬성이었어요. 그러나 국립극장 측에 지불할 거액의 비용을 마련할 방안이 없어서 막막했습니다. 그때 저는 감사원에 들어가 공직을 맡게 되어 어려움이 있기는 했지만, 어찌어찌해서 지방 공연이 성사되었지요. 그런데 광주와 전주 두 곳에서 뜻밖에도 호응이 커서 입장료 수입이 예상을 훨씬 넘어 선데다, 여기에 얼마쯤의 자발적인 협찬금을 보태어 적자 공연을 면할 수가 있었지요. 음악극이 너무 좋아서 감동의 박수가 대단했지요. 우리 사업을 널리 알리는데도 큰 보탬이 되었고요.
문) 음악극 ‘천명’ 순회공연 등으로 우리 기념사업에 대한 인식과 홍보 효과가 상승되는 분위기 속에서 2000년대로 들어서면서 동학농민군 현창사업 등을 보다 적극적으로 추진할 수 있게 되었지요?
답) ‘동학농민혁명 국회의원 연구모임’(회장 김태식 의원)을 만들어 국회에서 동학농민혁명 역사특강 또는 학술 세미나를 갖는 등 분위기 조성을 통해 동학농민혁명 특별법 제정을 위한 논의를 본격화했습니다. 그 결과 대한민국 제17대 국회에서‘동학농민혁명참여자등의명예회복에관한특별법’(2004.2.29.)이 제정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 무렵 저는 이사장직을 떠났지만, 주위의 요청이 있으면 의원들의 행사에 참석하여 축사를 하고 격려와 당부를 하곤 했지요.
문) 그밖에 더 남기실 말씀이 있으시면 들려주세요.
답) 독재자의 장기집권을 그토록 비난하던 제가 기념사업회 이사장을 10년 넘게 장기 집권을 했으니, 실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었지요. 하겠다는 사람이 없으니 어쩔 수가 없었어요. 동학농민혁명과 그 기념사업에 대한 인식을 새로이 바꾸도록 하고, 조직의 운영과 사업에 필요한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각종 모금행사를 하고, 협찬금도 얻어와야 하는 ‘고등 구걸’도 해야 하니 힘들기도 했지만, 그에 못지않게 보람도 컸습니다. 기념사업회의 임원 여러분과 우애를 다지며 일해 온 것을 회상해보면, 특히 이사장인 저를 믿고 열심히 돕고 참여해주신 여러분께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문) 귀한 말씀 더 오랜 시간 듣고 싶은데, 지면의 제한 등으로 더 많은 말씀 듣지 못해 아쉽습니다. 바쁘신 중에도 긴 시간 내서 대담에 응해주신 것에 대해 깊이 감사드립니다. 변호사님 내내 강건하시기를 빕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