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전남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를 찾아서
일 시: 2017년 8월 11일 (금), 10:00~12:00
장 소: 광주·전남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사무실
대 담: 이상식 | 광주·전남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회장, 문병학 | 기념재단 기념사업부장

이상식 광주·전남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회장
문) 이번호 지역대담은 지난 1990년대 전남대학교 사학과에 재직하시던 때부터 줄곧 광주·전남지역의 동학농민혁명에 깊은 관심과 열정을 쏟아온 이상식 선생님과 갖게 되었습니다. 더위가 유난스러운데 선생님 건강은 어떠신지요? 먼저, 녹두꽃 독자들을 위해 소개와 함께 근황을 말씀해주십시오.
답) 아닌 게 아니라 올 여름은 유난히 더운 것 같습니다. 제가 나이를 좀 먹어서 그런지... 여름 넘기기가 만만치 않네요. 지난번에 이이화 선생님을 만났는데 전봉준 장군 순국 터인 서울 종로구에 동상건립을 추진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문 선생이 서울시장에게 건의해서 첫 단추가 아주 잘 끼워졌다고 좋아하시더만, 하여간 문선생도 더위에 건강 잘 챙기세요.
문) 선생님께서 1990년대 초부터 광주·전남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창립을 준비하셨지요? 광주와 전남지역 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 추진 필요성 등을 갖게 된 배경이나 계기 그런 것이 있었는지요?
답) 1990년 초반기에 이이화 선생님 등과 만나면서 동학농민혁명 100주년 기념사업에 대해 얘기하곤 했어요. 그러다가 1992년부터 광주·전남 기념사업회 창립을 준비했지요. 그래서 1993년 겨울에 전주에서 창립된 동학농민혁명백주년기념사업단체협의회 결성 때부터 활동을 시작했지요. 요즘 저는 100살까지 살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내가 산 100년의 역사라는 책을 꼭 남기고 싶어서예요. 가팔랐던 한국 현대사를 살아온 역사를 공부한 사람인 제가 그것들을 기록으로 남길 필요가 있겠다 싶어요. 그러려면 100살은 무조건 살아야 하는데(웃음) 『내가 산 100년의 역사』를 출판하고 죽더라도 죽어야겠다 싶어요.

문) 네, 선생님 그 출판기념식 때 저도 꼭 참석하고 싶습니다.(웃음) 동학농민혁명 전개과정에서 장성 황룡전투가 갖는 의미가 남다른 측면이 있다고들 말합니다. 서울에서 파견되어 내려온 경군을 물리친 전투가 바로 황룡전투인데, 황룡전투가 갖는 역사적 의미에 대해 말씀해주십시오.
답) 대학에서 역사를 가르칠 때 학생들을 데리고 장성 황룡전적지 답사를 자주 다녔습니다. 그때마다 저는 황룡전투야말로 한국 근대사의 전환점을 가져온 중요한 하나의 계기였다는 점을 설명해주곤 했어요. 황룡전투는 막강한 화력을 갖춘 서울의 정예부대를 보잘 것 없는 죽창이나 화승총 몇 자루가 고작인 동학농민군이 물리친 전투예요. 동학농민군이 이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확고한 믿음을 갖게 되었다고 말해도 그다지 틀린 말은 아니지요.
문) 갑오년 당시 광주 인근의 나주(羅州)가 동학농민혁명을 반대했던 보수 세력이 아주 강대했던 곳이었습니다. 이로 인해 동학농민군이 전주성을 함락시킨 후 각 지역으로 내려가 폐정개혁을 단행하던 때도 나주는 완강했지요. 그래서 삼례 2차 봉기를 단행했을 때 손화중 휘하 농민군이 광주에 남아 나주의 보수 세력과 혹시 모를 일본군의 남해안 침략 등을 대비하였습니다. 이렇듯 광주전남 지역은 동학농민혁명 전체 전개과정에서 독특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이점에 대해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답) 장성·영광·함평·담양 등 서·남해안 쪽 동학농민군은 2차 봉기 때 북상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문 선생이 얘기한 것처럼 일본군이 남해안쪽으로 진격할 수 있다는 판단에서 이를 대비하기 위함이었지요. 그리고 나주 수성군의 존재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농민군이 모두 북상하게 되면 강성했던 나주 수성군이 역으로 호남지역을 휘젓고 다닐 위험성을 배제할 수 없었으니까요. 갑오년 당시 동학농민군에게 나주성은 함락되지 않았지만 주변의 동학농민군 세력은 대단했습니다. 비록 나주 관아 등지에 집강소를 설치한 것은 아니지만 나주에도 농민군 지도자 오권선(吳權善) 장군 거소에 집강소가 설치되어 폐정개혁을 단행했었습니다. 나주 집강소가 설치되었던 곳은 나주의 삼도지역인데, 용진산 바로 아래입니다. 이곳에 오권선 장군 집이 있었던 곳이고 그 휘하 농민군의 주요한 활동무대였습니다. 비록 동학농민군이 나주읍성을 장악하지는 못했지만 그 외각 지역은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지요.

문) 현재 광주와 전남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기념사업가 상당히 많지요? 선생님께서 회장을 맡고 있는 광주·전남기념사업회를 비롯해서 무안기념사업회, 장흥기념사업회, 함평기념사업회, 장성기념사업회 등이 생각나는데, 광주·전남기념사업회가 1993년 가을에 금호문화예술회관에서 창립되었지요? 창립대회를 마치고 황룡전적지를 답사했던 기억이 생생한데 당시의 상황들을 얘기해주시기 바랍니다.
답) 1990년 초반기만 해도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대중적인 인식은 ‘동학난’이었어요. 그래서 기념사업을 추진하는 것은 상당히 어려움이 따랐지요. 특히 장성지역은 예로부터 호남의 양반세력이 가장 강했던 곳입니다. 장성의 울산김씨, 광산김씨, 행주기씨, 연안김씨, 황주배씨 등 5대 성씨 가문이 향반으로써 대단한 영향력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기념사업을 추진하는 것에 반대가 심했지요. 그러나 황룡전투가 갖는 의미가 워낙에 크기 때문에 어려움을 무릅쓰고 적극적으로 기념사업 단체 창립을 추진했습니다. 당시 장성군 지역에는 “반란군을 기념하는 것이 말이나 되는가?”이런 분위기가 강했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전국적으로 100주년 기념사업 추진 분위기가 형성된 것에 힘입어 광주·전남기념사업회를 창립할 수 있었지요.

문) 광주·전남기념사업회 창립 후 곧바로 황룡전적지에 기념공원을 조성하는 사업을 추진하셨지요? 황룡전적지 공원조성에 필요한 재원 마련 등 만만치 않았을 텐데 어떻게 성공적으로 추진할 수 있었는지요?
답) 지금 생각해도 참 그때 제가 용감했어요. 완전히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에 가까웠어요. 지금 생각해도 참 큰일이었다 싶어요. 당시 시대적 분위기가 지금과는 사뭇 달라서 전승기념탑 건립을 준비하면서 자칫하면 감방에 갈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했어요. 그런 것들을 각오하고 나니 용기백배해지더라구요. 그래서 아주 적극적으로 사업구상을 현실화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었습니다. 그 결과 전라남도로부터 2억 원, 장성군으로부터 1억을 지원받았지요. 부족한 3억 원 정도는 지역에 기반을 둔 사업체들 고려시멘트 등등을 거듭 찾아다니면서 설득해서 기금을 모았습니다. 그렇게 해서 일정하게 기념공원을 조성할 수 있는 경비를 마련하고 나니 다음은 기념공원을 어떻게 조성하는가 하는 문제가 나섰습니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가 결국 기념공원 설계공모를 택했지요. 공모작품들 중에서 조각가 나상욱 씨가 제출한 죽창 모형의 승전탑으로 결정지었습니다. 공모작품 심사위원들에게 동학농민군의 기상을 잘 형상화한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은 작품입니다. 그 작가가 나중에 5.18광주망월동 국립묘지 상징탑 제작자로 선정되기도 했지요. 버려진 야산과 논밭이 얼크러진 황룡전적지를 정비할 때 여러 일화가 있습니다. 그중 빼놓을 수 없는 일화가 한 가지 있는데, 당시에 향토사단 사단장이었던 분이 역사에 관심이 참 많은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향토사단에서 『향토수호역사서』를 편찬한다고 제게 도움을 요청해온 적이 있어요. 그런 인연으로 제가 향토사단장과 가끔 만날 일이 있었어요. 그 무렵 제가 황룡전적지 기념공원 조성에 몰입해있었기 때문에 그 사단장과 만난 자리에서 황룡전적지 정비가 고민이라는 얘기를 했어요. 그러고는 얼마 지나지 않아 연락을 받았는데 그곳 정비를 향토사단에서 지원하겠다는 거예요. 그러더니 머지않아 포크레인 등 군장비들을 동원해줘서 어렵지 않게 전적지를 깔끔하게 정리할 수 있었어요. 문제는 그 다음에 일어났는데, 기념공원이 조성된 후 그 사단장이 누군가로부터 투서인지 뭔지를 받아 곤경에 처해졌습니다. 조선의 반란군 승전기념공원을 조성하는데 대한민국 정규군이 장비를 빌려줬다는 이유로 좌천이 된 것입니다. 것이 말이 안 된다는 것)내용이었습니다. 그 일로 결국에는 사단장 자리에서 좌천되었습니다. 그 무렵 사단장을 만날 일이 있었어요. 그 자리에서 제가 “인간사 세옹지마(塞翁之馬)라고 하지 않던가요 너무 낙담하지 마세요”라면서 거듭 죄송하고 고맙다고 말씀드렸어요. 그런데 말입니다. 그 사단장이 좌천된 지 그리 오래지 않아 정부가 바뀌었고, 바뀐 정부에서 좌천되었던 자리에서 육군본부 인사국장으로 영전되면서 중장으로 승진까지 되었습니다. 그래서 역시, 갑오선열의 얼을 중하게 여기는 사람에게는 동학농민군 영령들께서 보살펴주시는구나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문) 죽창 형태의 승전기념탑이 보는 이를 압도합니다. 탑 뒷면에 새겨진 ‘조선의 눈동자’라는 시도 의미심장하구요. 또한 탑 전면에 말을 타거나 혹은 장태를 굴리면서 진격하는 장면을 청동 부조로 생생하게 형상화 한 것이 아주 인상적입니다. 이 승전기념탑 건립 당시의 얘기를 좀 해주시지요.
답) 죽창 형상의 이 탑을 보고 어떤 연구자 한 사람이 동학농민군 곧 죽창 이렇게 연계시키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 말하더군요. 그건 그 사람이 지나치게 편협하게 농민전쟁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 연구자의 생각은 말이 안 된다는 것이 제 생각이에요. 죽창은 군수물자가 적었던 6·25전쟁 때도 무기 대신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더욱이나 갑오년 제1차 동학농민혁명 때는 무기가 변변치 않아 농기구나 죽창 등으로 농민군이 무장하고 봉기했지요. 이건 역사적인 사실이에요. 물론 농민군이 세력이 강대해지면서 관군에게 무기를 빼앗거나 관아의 무기고를 열어 무기를 갖추기도 했지요. 그래서 2차 봉기 이후에는 농민군도 상당수가 화승총이나 관군에게 빼앗은 총을 소지하기도 했고, 포를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그렇다고 동학농민군과 죽창을 연계시켜 상징화 하는 것이 문제가 있다고요?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도리어 사실관계에 대한 심각한 왜곡이자 편향입니다. 하여튼 죽창 모형으로 전승기념탑을 선정한 것은 당시 심사위원들의 만장일치 의견이었어요. 탑 뒷면에 새겨진 ‘조선의 눈동자’그 시를 생각하면 지금도 애간장이 녹는 것 같습니다.(웃음) 곽재구 시인에게 시를 청탁했어요. 그런데 건립기공식이 임박해도 도대체 시가 써지질 않는다는 거예요. 애간장을 태우고 태우다가 준공식 임박해서야 시가 완성되어 겨우 새겨 넣었지요. 지금 생각해도 참...
문) 동학농민혁명 황룡전승기념식을 거행해온 것이 1994년부터이니까 벌써 23년째지요? 20년 세월을 넘도록 일관되게 어떤 일을 지속적으로 추진한다는 것이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닌데, 보람과 함께 참 어려움도 많으셨지요?
답) 그렇지요. 생각해보면 참 많은 사람들에게 신세를 졌네요. 그동안 장성지역 유지 분들이나 장성군 각급 기관과 농민회, 농업경영인회, 부녀회 등등 정말 많은 사람들에게 신세를 졌네요. 신세라기보다는 그분들이 누구보다고 황룡전적지가 갖는 역사적 의미를 알고 긍지를 가진 분들이기 때문에 지원해주셨던 것 같아요. 행사를 매년 준비해야하는 제 입장에서는 고맙고 고마운 분들이 아닐 수 없지요. 근년에 들어와서는 장성지역에서 접주로 활동하면서 장태를 제작해 황룡싸움을 승리로 이끄는데 큰 공을 세웠던 이춘영 장군의 증손 이공우 씨가 고향으로 내려와 생활하기 시작하면서 기념사업에 많은 기여를 하고 있습니다. 참 고맙고 감사한 일이지요.
문) 지난 해, 그러니까 2016년 5월이었지요? 광주 남구 이장마을에 광주동학농민혁명 기념공원이 조성되었는데 그 일도 선생님께서 적극 관여하셨지요? 광주광역시 남구청의 지원과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후손인 고영두 씨 사재로 기념공원이 조성되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이장마을이 지닌 역사적 의미와 함께 기념공원 조성에 대한 얘기들을 해주시지요.
답) 현재 그곳의 정확한 행정구역은 광주광역시 남구 이장리입니다. 이곳은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이었던 고경명 장군이 활동했던 유서 깊은 곳이기도 하지요. 그 후손인 고씨 문중에서 보기 드물게 3형제가 함께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했습니다. 대촌면 이장마을은 바로 그 고씨 삼형제의 고향이지요. 갑오년 당시 이곳 대촌면 일대는 동학농민혁명에 가담하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로 농민군 세력이 왕성했다고 합니다. 그런 까닭으로 동학농민군이 패배한 이후 이곳은 피해가 아주 컸다고 합니다. 다른 곳으로 피신했다가 끝내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한 경우도 많았다고 합니다.
문) 근년 들어 기념사업을 이어갈 후계를 마련하지 못했다며 염려를 많이 하셨는데, 지난 봄에 장성지역의 뜻있는 분들을 한데 모아‘장성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를 창립하셨지요? 그 창립식에서 축사를 대신하여 선생님께서 이제 광주·전남지역 특히, 장성지역 기념사업 추진을 위한 젊은 세력이 구성되었으니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하셨는데, 장성기념사업회 창립 경과와 향후 추진할 사업계획 등이 있으면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답) 나이도 들고 그래서 활동력도 떨어지고 걱정이 많았어요. 황룡전적지가 기념공원으로 정비되었고, 국가사적으로 지정되어 관에서 관리도 하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도 미완성이거든요. 그런데 제가 나이를 이렇게 먹어버렸으니 걱정이지요. 그래서 장성지역의 여러 분들과 뜻을 모았습니다. 장성이 지역구인 이개호 국회의원님을 비롯해서 장성군수님, 군의회의장님, 여러 군의회의원님 등등 여러분들이 힘을 모아주셨어요. 그래서 지난 봄에 성대하게 장성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를 창립할 수 있었습니다. 앞으로 장성기념사업회는 황룡전적지나 그 인근에 부지를 마련해서 전시관을 건립할 것입니다. 자라나는 청소년들이나 이곳을 찾는 뜻있는 분들 그리고 관광객들이 황룡전적지에서 일어난 역사적인 사실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전시관 건립이 기념공원 조성사업의 화룡정점이지요. 이를 위해서 지금 이개호 국회의원 등과 장성군 및 시민사회단체 등이 한 마음으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머지않아 전시관을 건립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기념재단에서도 많은 관심과 함께 적극 지원해주실 것을 부탁드립니다.
문) 끝으로 빠뜨린 말씀이나 꼭 하시고 싶은 말씀 있으면 해주시기 바랍니다.
답) 가능한 빨리 동학농민혁명과 광주민주화운동을 주제로 학술대회를 열었으면 합니다. 동학농민혁명이 3.1운동, 4.19혁명, 5.18광주민주화운동, 6.10민주항쟁 여기서 나아가 최근 광화문 촛불시민혁명의 모태라는 것은 나만의 생각이 아니라 우리 역사학계의 근현대사를 전공하는 사람들이면 대체로 인정하는 일반적인 인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점들을 학술적으로 조명하는 학술대회를 개최하려고 마음먹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기념재단에서도 적극적으로 관심 가져주실 것을 부탁드립니다.
문) 선생님 무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긴 시간 대담에 응해주셔서 고맙습니다. 항상 건강 각별히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