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소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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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가을 29호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이춘영의 증손자 이공우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이춘영의 증손자 이공우



 

문) 선생님 반갑습니다. 증조부이신 이춘영 동학농민혁명 참여자께서 갑오년 당시 거주하면서 활동하셨던 마을에 찾아와 선생님을 이렇게 뵈니 한층 더 의미가 새롭습니다. 선생님 선친께서 역사학자 이이화, 이상식 교수님 등과 교우하면서 광주전남지역 특히 장성지역 동학농민혁명 관련 사실을 연구조사하는데 많은 기여를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근년에는 서울에서 생활하시다가 선생님께서 이곳 고향으로 내려와 정착하면서 장성지역 동학농민혁명 관련 학술대회나 장성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창립 등에 아끼지 않고 지원과 협조를 해주셔서 동학농민혁명 정신선양에 많은 기여를 하시고 계시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먼저, 녹두꽃 독자들을 위해 선생님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답) 제가 여기 내려온 지는 5년이 되었습니다. 서울에서 37년간 직장생활을 했어요. 서울에서 생활할 때 늘 언젠가는 고향에 내려와 증조부님께서 참여하신 동학농민혁명의 숭고한 정신을 선양하는 일에 기여하면서 말년의 생애를 마무리해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런데 그게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쉽지 않아 5년 전에서야 내려오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가장 먼저 저는 동학농민혁명유족회와 상의하여 이차 춘자 영자 증조부님의 위폐를 정읍 황토현전적지에 자리한 구민사에 모시는 일부터 시작했습니다.



 

문) 정읍 황토현전적지 전봉준장군 동상 바로 옆에 건물을 말씀하시는 거지요? 그곳에 언제 증조부님의 위패를 모셨는지요?


답) 3년 전인가? 아마 동학농민혁명 120주년이던 2014년이었을 거예요. 그때 제 증조부님을 포함하여 서른여덟 분인가? 하여튼 그렇게 위패를 함께 모셨어요. 5년 전에 제가 여기 장성에 내려와서 보니까 지금은 행정구역상 광주로 되어 있더라구요. 하지만 옛날에는 장성군 황룡면이었습니다. 옛날에는 이곳이 장성의 끝머리 마을이라고 해서 ‘토말 ’‘토말마을’그렇게 불렀지요. 흙토(土)자에 끝말(末)자. 증조부께서 여기 살면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신 거죠. 그리고 조부님과 아버님께서 여기서 살다가 지금은 돌아가시고 안 계시지요. 작은아버지는 지금도 이곳에 살고 계십니다. 5년 전에 제가 서울생활을 정리하고 여기 내려 와가지고 이이화 선생님, 이상식 교수님 등과 상의해서 학술대회를 개최를 했습니다. 우리 동학농민군 후손들이 많은 경우 지난 100년 동안 반란군 후손으로 핍박을 받아온 탓에 가계들이 여의치 않아요. 그나마 저는 사업도 하고 그래서 조금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편이라서 학술대회를 여는 경비를 내기도 하고, 지난 봄 장성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창립을 위한 총회 때도 제가 500만원을 지원했습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 목숨까지 내놓으신 증조부님을 생각하면 아깝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문) 네, 장성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창립에 선생님께서 큰 도움을 주셨다는 얘기는 이상식 교수님께 들었습니다. 지난 5월에 전국동학농민혁명유족회가 사단법인으로 문화체육관광부로부터 설립인가를 받았는데, 유족회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계시지요?


답) 네, 앞서도 얘기했습니다만 동학농민혁명이 끝난 때로부터 특별법이 제정된 2000년대 초까지 참여자 후손들은 숨죽이고 살아야했습니다. 그래서 형편들이 참 여의치들 못해요. 그나마 제가 좀 경제적으로 여력이 있는 것 같아서 힘닿는 대로 애국애족 정신을 선양하는데 보탬이 될 일이라면 지원을 조금씩 하고 있습니다. 그동안은 전국 동학농민혁명유족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기회가 적었습니다. 그래서 우선 이곳 장성지역에서부터 활동을 시작했는데, 앞으로 서울의 동학농민혁명유족회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려고 마음먹고 있습니다.



문) 매년 5월 27일에 장성 황룡전적지에서 동학농민군 승전기념식을 갖지요? 1894년 갑오년 당시 음력으로 4월 23일 서울에서 파견되어온 경군을 크게 물리친 날을 양력으로 환산해서 매년 승전기념식을 열어왔지요? 1994년부터 광주전남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를 창립시킨 이상식 교수님이 중심축이 되어서 광주광역시, 장성군, 천도교 등이 힘을 모아 행사를 추진해오고 있는데, 올해 기념식도 성대하게 열렸었지요? 그때 행사장에서 선생님을 뵙고 오늘 이렇게 뵙게 되었네요. 올해 행사에도 선생님께서 큰 힘이 되어주었다고 이상식 교수님께서 말씀하시던데...


답) 제가 5년간에 걸쳐서 제 자비로 지원을 했습니다. 무슨 행사를 하나 치룰려면 회의하랴 행사 준비하랴 돈이 꽤 들어가잖아요? 올해도 지난 5월 27일 날 열린 제123주년 장성황룡승전기념식 때도 돈이 꽤나 들었습니다. 장성군에서 지원을 했지만 500만원 밖에 지원이 안 되어... 그러다보니 제가 좀 힘을 보탰습니다. 참가자들에게 식사를 제공하는 비용만해도 400만 원 정도 드는데... 부족한 경비는 제가 보충도 하고 그랬습니다. 동학농민혁명 정신 선양사업을 추진하는데 참가자들에게 “회비도 내고, 당신들 밥값도 내고 그래야합니다”그러면 사람들 참가가 크게 줄어들기 마련이지요. 그래서 장성황룡 승전기념식에 들어가는 비용은 제가 좀 지원하기도 했습니다.



 

문) 증조할아버지이신 이춘영 장군께서 장성황룡전투에서 장태를 무기로 활용하여 서울에서 내려온 경군을 물리치는데 큰 공을 세우셨다고요?


답) 저희 증조할아버지께서 갑오년 당시 장성지역 동학접주셨고, 총사령관이었다고 해요. 그래서 집강소도 증조부께서 거주하시던 토말마을에 설치되었다고 해요. 장성이 말입니다 광산김씨, 울산김씨, 변씨, 기씨 등의 양반행세가 보통을 넘는 고장이었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우리 증조부가 계시던 이곳 토말마을은 완전히 동학군의 세상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집강소도 이곳 토말마을에 설치했다고 이이화 역사학자나 이상식 교수님 그런 분들게 얘기를 들었습니다.



문) 장성지역 동학농민혁명 정신 선양사업 추진에 있어서 선생님께서 많은 기여를 하고 계시는데, 선생님께서 근년에 큰 수술을 하셨다고 얘기를 들었습니다. 저도 선생님 수술했다는 소식을 이상식 교수님께 듣고 걱정했었는데, 지난 5월 황룡 승전기념식 때 건강한 모습을 뵈어 반가웠습니다. 선생님 건강상태는 현재 어떻습니까? 완전히 회복되신 건가요?


답) 제가 작년 11월 영동세브란스 병원에서 뇌종양 수술을 했습니다. 이게 뇌종양이라는 게 무섭더라구요. 한쪽 몸을 사용할 수가 없었는데, 제가 동학농민혁명 정신 선양사업에 관심을 기울이니까 우리 할아버지를 비롯한 동학농민혁명 영령들께서 살펴주셔서 그런지 이렇게 다시 건강을 되찾아 지금은 아주 호전되어 좋습니다. 수술을 했던 영동 세브란스 병원 의사들도 이렇게 병세가 호전된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라고, 세브란스 병원에서 뇌종양 수술을 수도 없이 했지만 이렇게 기적적으로 호전되어 회복된 경우는 처음이라고 말하더군요.



문) 참, 다행입니다. 정말로 갑오선열께서 살펴주신 것이 확실한 것 같습니다.(웃음) 선생님께서는 증조부님 활동에 대해 주로 어떤 경로를 통해 들으셨나요? 그리고 기억나는 얘기가 있으면 해주시기 바랍니다.


답) 할아버지에게 아버지가 듣고, 아버지나 작은 아버지들께 저는 증조부님 얘기를 들었습니다. 증조부께서 장성황룡강전투를 한 다음에 전주성을 점령하는 일에도 함께했다고 해요. 그런 다음에 잡으러 다니니까 장성 토말마을 저쪽에 있는 수용산이라고 하는 곳으로 피신을 하셨다고 그래요. 증조부께서는 황룡강전투 이전에 있었던 정읍 황토현전투에서도 참여했다고 들었습니다. 황토현전투 때는 장성에서 1,000명의 동학도를 데리고 가서 참전했다고 합니다. 그 당시 ‘소똥이’라고, 우리 집 마부였다고 합니다. 그 시절에는 양반상놈, 말하자면 신분질서가 아주 확고했잖아요? 근데 동학도들이 이를 말도 안 된다고 하면서 모두가 평등하다고 말한 거잖아요? 우리 집안이 ‘경주이가’입니다. 양반이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희 증조부께서는 양반, 상놈이 따로 있느냐 말도 안 된다고 하시면서 그 마부인 ‘소똥이’라는 사람을 동학에 입도시켜주고, 접장으로 대했다고 해요. 아주 획기적인 일이잖아요. 안 그래요? 우리 증조부께서는 남원으로 가서 최시형 2대 동학 교주에게 입도를 했다고 합니다.



문) 동학농민혁명 전체 전개과정에서 전승으로는 황토현전투, 황룡강전투, 전주성함락 이렇게 얘기합니다. 동학농민군이 승리한 전투는 다 나름대로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 것 같습니다. 황토현전투는 최초로 전라감영군을 크게 물리쳤다는 의미가 있고, 황룡전투는 서울에서 파견되어 내려온 조선의 정예부대인 경군을 크게 물리쳤다는 의미를 지니는 것 같습니다. 전주성 함락은 조선왕조가 생긴 이래 감영이 점령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던 만큼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임금이 파견한 경군을 물리친 황룡전투도 그 의미가 남다른데 이 전투에서 동학농민군이 승리하는데 장태가 큰 역할을 했다고 하거든요. 그런데 이 장태를 증조부이신 이춘영 장군께서 만들었다고 얘기되기도 하지요?


답) 네, 원래 장태는 이방언 대접주가 만들었다고 하는데, 그분 활동지역은 저 아래 남해안 장흥지역이었잖아요? 여기는 장성입니다. 그리고 장태가 큰 것은요 길이가 6m, 높이가 3m 그랬다고 합니다. 그때 시절에는 교통수단이 좋지 않아서 이방언 장군이 장태를 만들어서 여기 장성까지 가지고 왔다고 보기는 어렵지요. 황룡전투에서 사용된 장태는 이곳 장성에서 우리 증조부님 지휘 아래 만들어진 것이 분명합니다. 그 당시에 장태를 제작하기 위해 대나무를 기증했다는 얘기가 후손들을 통해 전해지고 있는데, 지금도 그 후손 몇 분이 살아계세요. 그분들 얘기에 따르면 장태를 만들기 위한 대나무는 주로 장성 가정리라는 곳에서 가져왔다고 합니다. 이렇게 대나무를 옮겨와서 사람들이 장태를 엮었는데, 황룡 포전에 큰 가마솥을 걸고 밥을 지어 주먹밥을 만들어서 장태를 엮은 사람들을 먹였다고 합니다. 말하자면 장성 황룡전투 때 사용한 장태는 저의 증조부 지휘 하에 이렇게 만들어서 전투 때 사용하여 대승을 거둔 것이지요. 그래서 증조부님을 장태장군이라고 말했다고 해요. 그런데 이후에 저의 증조부님 시신도 거두지 못해서... 후손으로서... 안타깝고 참 죄스럽고, 부끄럽고 만감이 교차합니다.



문) 이춘영 증조할아버지께서 황룡강 전투나, 전주성 전투 등에 적극적으로 참여를 했다는 이야기를 어느 분에게서 들으신 것입니까?


답) 저희 할아버지께 들었습니다. 저희 할아버지 존함이 귀자 익자이신데, 증조부님의 큰아들이었습니다. 조부께서는 3.1독립운동 등으로 전라남도 인물로 되어있습니다. 그분이 살아계실 때 고려대학교 사학과 교수들이 오셔서 며칠 계셨고, 또 역사학자 이이화 선생님께서 이곳에 내려와서 저희 집 큰집에서 며칠씩 묵으면서 자료를 조사하거나 할아버지와 대화를 나누시곤 하셨습니다. 이이화 선생님과 저희 할아버지 두 분이 사진 찍은 것도 있고... 이이화 선생님이 한두 번 오신 게 아니라 아주 자주 오셨고, 여기 오시면 며칠 씩 계시고 그러셨어요.



문) 그러면 증조부님에 관한 얘기를 할아버님께 직접 들으신 거네요. 선생님은 장남이신가요? 증조부님이 이춘영, 조부님은 귀익, 아버님 함자는 어떻게 되는지요? 주로 동학농민혁명 관련된 내용은 어느 분께 들으셨나요?


답) 제가 장남이자 집안 장손입니다. 아버지는 현자 종자를 쓰셨습니다. 1990년대에 돌아가셨지요. 우리 할아버지께서도 장손이셨는데, 천도교 광산교구장을 지내셨지요. 그리고 저희 아버지는 둘째였는데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신 후 대를 이어서 천도교 광산교구장을 하셨어요. 증조부님에 대한 얘기는 아버지께 많이 들었고, 작은아버지께서 아직 살아계시는데 그분께도 많이 들었습니다. 오늘 인터뷰에 함께하려 했는데 일이 있으셔 가지고 같이 못 오셨어요. 작은아버지께서 할아버지께 들은 얘기들을 제게 많이 해주셨지요. 증조부께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한 얘기를 많이 알고 계십니다. 그분 얘기로는 여기 장성 월산봉이라는 곳이 있는데, 그곳에서 전투가 벌어져서 장태를 밀면서 전진하여 경군을 물리쳤다고 얘기하더라구요. 할아버지께 들었다고 그러면서요. 대포도 빼앗고 총도 많이 빼앗았다고 해요. 지금 장성 우시장 있는 곳에서 전투가 시작되어서 월산봉에서 총알을 피하기 위해 장태를 굴리고 내려오면서 경군을 공격했다고 합니다.



 

문) 황룡전투 때 무기로 활용된 장태에 대해 들은 얘기는 없으신지요?


답) 총알을 피하기 위한 무기로 사용하기 위해 장태를 크게 제작했대요. 큰 것은 가로 6m, 세로 3m라고 들었어요. 그 안에 볏짚은 잔뜩 집어넣어서 총알이 날아와도 뚫지 못하게 만들었대요. 그렇게 해서 장태를 밀고나가는 사람 등에는 ‘궁궁을을’부적을 써 붙였다고 해요. 그렇게 하면 총알도 피해간다고 했다 그래요. 지금 생각하면 좀 어이없는 말 같지만 사람의 믿음이라는 게 작용하는 바가 적지 않잖아요? 실제로 장태는 이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데 큰 역할을 했대요. 경군 대장 이학승을 전시시키는 등 크게 전공을 올릴 수 있었다고 합니다. 지금 장성 황용전투지 한 쪽에 이학승 비가 서 있잖아요? 이렇게 황룡전투를 승리한 다음 증조부께서는 전주성을 함락시키는 전투에도 참가했다고 해요. 그러다가 나중에 동학농민군이 우금치전투에서 패배한 이후 후퇴하면서 관군에게 쫓길 때 이곳 토말 인근 수련산(주민들이 수용산이라 부르기도 함)으로 피신했다고 해요. 장성에서는 제일 높은 산이 여기 수련산이지요.



문) 제가 『동학농민혁명참여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 백서』를 확인해보니 이춘영 증조부님은 참여자 등록이 되어 있는데, 그분의 후손은 등록되어 있지 않던데, 여기에 무슨 사연이 있는지요?


답) 제가 동학농민혁명참여자 후손으로 등록이 안 되어 있다고 하는 얘기를 유족회 이기곤 회장님께 들었어요. 증조부께서 참여자 등록이 되어 있는데 그 후손이 유족으로 등록이 안 되어 있다는 게 이해가 잘 되지 않았는데, 나중에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이이화 선생님이나 이상식 교수님 등을 통해서 아버지께서 살아생전에 그 일을 추진해서 증조부께서 참여자로 등록되지 않았나 싶어요. 90년대에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바람에 연락이 끊겨서 후손 등록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 같아요. 제가 그 무렵에는 벌여놓은 사업들 때문에 사실 여기에 관심을 기울이지 못했거든요. 솔직히 말씀드려서 먹고살기 바쁘고, 저희 할아버님이 손이 9남매인데 증조부께서 동학농민혁명을 하시다보니 재산이 없어서 학교를 한명도 보내지 못했어요. 그리고 할아버지께서는 상해 임시정부의 김구선생님께 독립운동을 하신다고 가셔버리고, 일본 놈 밑에서는 글을 배울 필요가 없다고 하셨는데, 실질적으로는 돈이 없어서 집안이 몰락을 해 버렸어요.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난 당시에 집이고, 소고 다 팔아가지고 솥을 걸어서 동학농민혁명군들 밥을 해서 먹인 거에요. 황룡강 기슭에서 장태를 만들면서 그 사람들 식량을 대야 하니까... 저희 큰댁이 이쪽 위에 있는데 거기에 증조할아버지 관련 자료가 다 있었습니다. 그런데 큰물이 져서 행랑채가 떠내려 가버리고 해서 자료가 하나도 남은 것이 없습니다. 예전에는 저희가 밥술 꽤나 먹고 살았는데 동학농민혁명군을 위해서 논이고 밭이고 다 팔아서 써 버리고 나니까 집안이 몰락해버린 것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살아계실 때 유족회 활동을 열심히 하셨어요. 저는 5년쯤 전부터 유족회 활동을 참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유족회 장성지부장이기도 합니다. 앞으로도 유족회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후손으로 등록할 여건이 갖춰지면 추진하려구요.



문) 장성 기념사업회의 조복례 회장님이나 이개호 국회의원님, 지자체와 협력하셔서 기념사업이 좀 더 활성화되기를 기대하겠습니다. 무엇보다도 유족께서 다들 연세가 많으셔서 건강을 잘 챙기셨으면 좋겠습니다.


답) 이이화 선생님이나 이상식 교수님 등등 그동안 기념사업을 해오신 분들, 그래서 특별법을 제정하도록 견인한 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의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역에서 펼쳐지는 기념사업단체 기념행사나 우리 기념재단에서 추진하는 정신 선양사업에 대해 깊은 애정과 관심을 가지고 바라보고 또 기꺼이 참여하고 그러고 있습니다. 유족들이 좀 더 일찍 적극적으로 이런 일들을 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는 점에서 한편으로는 미안하기도 하구요. 기념재단에서 추진하는 정신 선양사업이 적극적으로 활성화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하고, 기념재단 발전 또한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이렇게 찾아봐서 인터뷰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문) 선생님 무엇보다도 건강을 각별히 챙기셔야 합니다. 앞으로 장성지역 기념사업이 활성화 될 것 같아 기분이 참 좋습니다. 선생님 긴 시간 동안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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