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학자 이이화 인터뷰
일 시: 2017년 7월 26일 (수) 10시
장 소: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회의실
대 담: 이이화 | 역사학자, 전봉준장군동상건립위원회 이사장, 문병학 | 기념재단 기념사업부장

이번 호 명사대담은 2017년 7월 26일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재야 사학자 이이화 역사학자를 만나 진행하였다. 이이화 선생은 1986년 역사문제연구소를 설립하여 극심한 부침으로 점철된 한국 근현대사의 굴절과 왜곡을 바로세우고, 역사의 대중화 구현에 크게 기여를하였다. 특히 1989년 갑오농민전쟁백주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를 출범시켜 동학농민혁명 관련 사료발굴 및 편찬사업에 힘을 기울 였고,전국 각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백주년 기념사업 단체 창립의 산파 역할을 적극적으로 수행하였다. 그 결과 역사문제연구소 ‘백추위’,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동백특위’, 동학농민혁명100주년기념사업회(전북 전주) 등이 참여한 동학농민혁명백주년기념사업단체협의회 창립으로 이어졌다. 이후 1994년 3월에는 반란군의 후손으로 숨죽이며 살아온 참여자 유족의 모임인 동학농민혁명유족회 창립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 주요경력 | 역사문제연구소장, 갑오농민전쟁백주년기념사업추진위워원회 대표, 동학농민혁명백주년기념사업단체협의회 공동대표, (사)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이사, (재)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이사장, 동학농민혁명참여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 심의위원, 서원대 석좌교수, 전봉준동상건립위원회 이사장 등
| 주요저술 | 『한국사 이야기』(전 22권), 『인물로 읽는 한국사』(전 10권), 『한국의 파벌』, 『허균의 생각』, 『동학농민전쟁 인물열전』, 『동학농민전쟁 사료총서』(전 30권, 편서), 『조선후기 정치사상과 사회변동』, 『민란의 시대』, 『전봉준, 혁명의 기록』 등 100여 권
문) 선생님 요즘도 이런 저런 역사관련 단체모임과 저술 활동 등으로 많이 바쁘시죠? 먼저 『녹두꽃』 독자들께 선생님의 근황을 말씀해주십시오.
답) 네 요즈음 조금 바쁩니다. 근래 전봉준동상건립위원회 이사장을 맡았어요. 늙고 역량이 없어서 사양했는데 맡기네요. 신영우 전성준 손주갑 등 몇몇 분이 힘이 되어주고 있어요. 여기저기 인터뷰도 하고 친구와 친지들을 만나면 동상건립위원에 가입해 달라고 회원 카드도 내밀고 은행 구좌가 적인 명함도 주고.... 또 여러 단체에서 요청하는 동학농민혁명 등 한국사 강의도 나가요. 한국사 국정교과서 파동 탓인지 한국사에 대한 관심이 많아져 강의 요청도 많습니다.
문) 선생님께서 역사 관련단체 활동 등을 하도 많이 하시니까 어떤 얘기를 시작으로 대담을 풀어가야 하는지 얼른 가닥이 잡히지 않습니다.(웃음) 지면 제약도 있고 하니 대담은 동학농민혁명 관련 얘기로 국한하겠습니다. 역사문제연구소를 설립한 때가 1986년이지요? 벌써 30년 전의 일이네요. 역사문제연구소 창립과 그 활동이 가지는 의미가 다양하겠지만 그 중에서도 ‘역사 대중화’ 라는 단어가 얼른 떠오릅니다. 역사문제연구소의 설립취지랄까 지향했던 점 등에 대해 말씀해주십시오.
답) 역사문제연구소를 설립할 때는 6월 항쟁이 세차게 일어날 즈음이었습니다. 한국사 전공자들이 여러 사정으로 근현대 연구를 소홀히 다루고 있었어요. 독재정권 탓이었지요. 그리해 19세기와 일제시대 그리고 해방 후 이승만 독재 등을 연구하고 발표하는 연구단체가 필요하다는 데에 의견을 모았어요. 임헌영 박원순 서중석 등 한국 근현대사에 관심이 있는 인사들과 연구자들이었죠. 그리해 역사문제연구소를 발족시키고 이를 대중화하자고 각오를 다졌지요. 그러자 일반의 관심이 대단히 높아졌습니다. 전두환 노태우 정권이 우리 연구소를 주목도 하고 말입니다. 계간지 『역사비평』을 발행해 대중화에 나섰습니다. 우리가 비평회나 발표회를 기지면 수백 명이 모여들었어요.

문) 역사문제연구소 활동과 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고 생각됩니다. 역사문제연구소 산하 갑오농민전쟁백주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약칭 백추위) 때 활동한 분들이 이후에도 동학농민혁명 연구는 물론이고 전국 각 지역에서 펼쳐진 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 추진의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하였습니다. 신영우 배항섭 김양식 왕현종 김선경 송찬섭 박준성, 그리고 지금은 고인이 된 우윤 선생님 등등 많은 분들이 떠오르는데... 그때 그 시절에 있었던 일들에 대해 말씀해주세요.
답) 1989년 봄입니다. 근현대사 중에 주목되는 동학농민전쟁에 대한 연구와 사료를 모아야 한다는 의견을 모았어요. 동학농민혁명 백주년을 앞두고 심도 있는 연구를 해야 한다는 뜻을 맞추었어요. 지금 거론한 인사들은 모두 진보적인 소장그룹의 근대사 전공자들입니다. 당시 신영우 교수를 빼고는 모두 강사급이거나 박사과정을 밟고 있었어요. 의욕이 넘치는 연구자이었다는 생각이 지금도 듭니다. 우리 내부에서 정기적으로 세미나를 벌이고 연구 발표도 가졌어요. 현장을 살펴보는 역사기행도 다녔고요. 애로가 많았습니다. 그때 봉고차를 한 대 빌려 3박 4일 정도 답사를 했어요. 여관비와 밥값이 모자라 쩔쩔 맨 적도 있었습니다. 때로는 지방의 관계 인사들이 경비에 보태라고 봉투를 주기도 했어요. 하도 경비가 모자라던 판이라 그냥 받았지요.

문) 선생님께서는 1980년대 후반부터 백주년 때까지 전국 각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학술대회, 역사특강 등을 통해 백주년 기념사업 추진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단체창립의 산파역할을 아주 톡톡하게 수행하셨지요? 경북의 상주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창립준비위원회가 개최한 학술회의 등등 여러 지역의 역사강연이나 학술회의 때는 제가 선생님을 모시고 갔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그렇게 해서 백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강원도, 서울 등 9개 단체가 창립되었고, 마침내 1993년 12월 13일 전주에서 동학농민혁명백주년기념사업단체협의회(약칭 동단협)가 결성되었습니다. 그때 선생님께서 동단협 공동대표로 추대되었고, 동단협이 주최한 백주년 기념사업이 성공적으로 펼쳐졌습니다. 백주년 기념사업이 동학농민혁명의 역사적 의미에 대한 범국민적인 인식 제고로 이어졌고, 여기에 힘입어 2004년 특별법이 제정되기에 이르렀습니다. 특별법이 제정된 후 동단협과 유족회 연합하여 재단법인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으로 거듭났고, 나중에 이 재단의 정신선양사업은 특수법인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으로 승계되었습니다. 선생님께서 그 재단의 이사장을 맡아 헌신하셨는데, 당시 재단 운영비가 없어서 이사님들과 운영위원들께 꽤 큰 액수의 회비를 갹출하고, 뜻있는 분들의 서화(書畫)를 기증받아 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판매하기도 했는데, 그때는 많은 분들께서 역사를 바로세우는 뜻깊은 일이라며 기꺼이 응해주셨지요. 그 시절에 대해 얘기해주십시오. 그때 사무실이 경복궁 안에 있어서 아주 신났었는데...
답) 동단협이 결성될 적에 제가 찾아다닌 지방의 기념사업 단체의 대표와 향토사학자들을 한 자리에 모아 단체협의회를 만들었지요. 지금 고인이 된 우윤 씨의 노고가 많았습니다. 동백장 넓은 방이 전국 각 지역에서 달려온 기념사업 관계자들로 꽉 들어찰 정도로 호응이 대단했어요. 전주에 있는 동학농민혁명백주년기념사업회 인사들이 고생을 많이 했어요. 동단협 창립 초기부터 문병학 선생이 전주사업회 사무국장과 겸해서 동단협 사무국 일을 맡아보았지요? 그때 동단협에 참여했던 분들의 의지와 열기가 참 높았어요. 백주년 행사가 잘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아주 감회가 새로웠습니다. 최초로 각 지역이 연대한다는 역사적 의미가 있었습니다. 그리해 백주년 행사를 성공적으로 잘 치렀습니다. 전주시청 앞 광장에서 행사를 했지요. 그때 한승헌 이사장을 비롯해서 신순철 사무총장, 이종민 교수 등 전주사업회 임원들의 노고가 참 많았습니다. 그런 노력의 결실로 2000년에는 대한민국 국회에 ‘동학농민혁명 국회의원 연구모임’이 만들어지게 되었지요. 그때 회장을 김태식 국회의원이 맡았고, 정읍출신 윤철상 의원이 총무를 맡아서 수고를 많이 했지요. 국회의원 연구모임 주최로 국회에서 토론회도 가지고 역사특강도 갖고 그러면서 특별법 제정을 준비했지요. 저와 신순철 신영우 우윤 정남기 등이 국회에 나가 그 당위성과 의의를 설명하느라 바빴습니다. 2004년 특별법이 제정된 후 민간 주도의 재단이 발족되었고, 국무총리를 위원장으로 하는 심의위원회도 구성되어 문광부에서 14명의 직원이 파견을 나와서 업무를 보았지요. 저는 민간의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이사장직과 심의위원회의 명예분과 위원장직도 맡아보았습니다. 마침 그 시기에 문광부 소속의 문화재청 청장이 유홍준 교수였어요. 그래서 문화재청이 있는 건물 아래 층에 비집고 들어가 사무실을 얻었지요. 지금 고궁박물관 건물입니다. 다른 단체에서 부러워하더라고요. 재단 설립은 여러 인사들의 후원이 있어 이루어졌습니다. 목적사업비를 받아 명예회복사업을 추진했으나 사무원 보수도 주어야 하고, 필요한 다른 사업도 진행해야 했기 때문에 늘 경상비가 모자랐어요. 그래서 서화전을 열기로 했어요. 민족미술협회의 김정헌 교수와 화가 임옥상 교수와 전각가 채의진 선생 등 여러 화가들이 서화전에 작품을 내주었어요. 이 작품을 대한변호사협회 박재승 변호사와 최열 환경운동가, 유족으로 언론재단 이사장이었던 정남기 선생 등이 작품을 구입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근근히 끌어갔습니다. 그 어려울 때 문병학 선생도 사무처장을 맡아보았잖아요? 요즈음 생각해 보면 그래도 그때가 참 보람이 있었어요. 그러다가 운현궁 아래로 사무실을 얻고 이사를 했고, 정기로 회비를 내는 이사를 10여 명 두고 재단의 운영경비를 충당했지요. 모두 고마운 분들입니다. 특히 상임이사를 맡은 신영우 교수의 노력이 컸습니다. 특별법에 따라 문광부 주도의 특수법인 기념재단이 설립될 때 민간 재단의 모든 재산과 사료와 비품을 넘겨주었습니다. 그때 재단이 빚을 꽤 지고 있었는데 저와 신영우 교수, 신순철 교수, 전봉준장군 양손인 전성준, 유족회 손주갑 선생 등이 빚을 모두 갚고 특수법인으로 넘겼지요. 빚 한 푼 없이 모든 재산을 넘겨 준 것이지요. 그런데 이후 특수법인으로 출범한 기념재단 임직원들이 고마움을 몰라주는 것 같아 좀 섭섭했습니다.

문) 역사문제연구소의 여러 성과들 중 『동학농민전쟁 사료총서』(전 30권)를 발행한 일을 빼놓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이 사료총서가 1996년 발간되어 동학농민혁명 연구의 지평을 확장시키는데 크게 기여했지요? 여기 저기 흩어져 있는 사료를 모으는 일이 쉽지 않았을 텐데, 사료를 모으는 과정과 출판하면서 겪었던 일들에 대해 말씀해주십시오.
답) 본래 1950년대 국사편찬위원회에서 동학란 기록이라는 이름으로 사료집이 발간되었습니다마는 관찬(官撰) 사료 중심이어서 빠진 게 많았어요. 그래서 우리 연구자들이 중심이 되어 수집한 사료를 모으고 새로 도서관 등을 조사해 30권짜리로 편집해 간행했습니다. 일본 사료는 강창일 교수(현 국회의원)와 목포대 고석규 교수가 수집해주었고 실무는 우윤 선생과 왕현종 교수가 맡아 애썼지요. 또 부록으로 동학과 천도교 사료를 편집했는데 고 표영삼 선생이 전적으로 담당했습니다. 서지가인 이종학 선생이 사운연구소의 이름으로 출간해 주었습니다. 이 사료집이 간행되자 연구자들이 많이 이용하였고 유족과 기념단체 관계자들이 많이 활용하였습니다. 제가 기념사업을 한 일 중에 가장 보람 있는 사업이었다고 자부합니다.
문) 동학농민혁명 백주년 기념사업이 성공적으로 추진되면서 혁명의 의미가 범국민적으로 확산되었습니다. 그런 흐름이 김대중 국민의정부 때 ‘동학농민혁명 국회의원 연구모임’(회장 김태식)으로 이어졌고, 특별법 제정을 위한 준비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런 준비과정을 거쳐 마침내 참여정부 때인 2004년 대한민국 제17대 국회에서 의원입법으로 [동학농민혁명참여자등의명예회복에관한특별법]이 제정되었습니다. 실로 110년 만에 반란사건이 혁명으로 명실상부하게 복권된 것인데, 이때 감회를 말씀해주십시오.
답) 앞에서도 간단하게 언급했지만 백주년 기념행사는 여러 곳에서 거행되어 그 의미를 널리 알리는 데에 큰 공헌을 하였다고 봅니다. 성공적인 백주년 기념사업 추진이 동학농민혁명군 서훈사업 추진으로 이어졌고, 백주년 기념사업을 펼친 때로부터 꼭 10년 만에 특별법이 제정되었어요. 이런 측면에서 동학농민혁명 100주년 기념대회는 큰 의미를 갖습니다. 특별법 제정 과정에서 윤철상 의원이 여야 합의를 받으러 다니는 등 애를 많이 썼지요. 특별법에 보상이나 유족들에 대한 지원이 빠져 있어 조금 섭섭하긴 했지만...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김대중, 노무현 정부의 인사들이 협력해 준 공로도 크지요. 아무튼 특별법에 따라 반역자에서 혁명군으로 명예를 회복하였고 국가의 공인을 받은 효과를 가져왔습니다. 동학농민혁명은 반봉건 반침략의 민족운동으로 자리매김을 한 것입니다. 이게 한국사 교과서에도 반영되었습니다. 오늘날에는 한국 근현대사에서 동학농민혁명을 시작으로 3.1운동, 4.19혁명, 6월항쟁으로 이어져 촛불시민혁명으로 결말을 지었다는 평가와 함께 미완의 혁명이 완성 단계로 나가는 중요한 사건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민주운동, 통일운동의 정신적 자산이 되어야 합니다.

문) 일제강점기와 해방 후 세계사적 차원의 동서냉전체제 구축 과정에서 민족내부의 좌우대립, 민족분단, 한국전쟁 등 극심한 정치적 혼란 등으로 가팔랐던 한국 근현대사의 부침 속에서 동학농민혁명은 반란사건으로 치부된 채 역사의 뒤안길에 버려져왔습니다. 이런 속에서 참여자 후손들은 숨죽이며 살아야했습니다. 역사문제연구소 ‘백추위’활동 시절 선생님께서 특별히 관심을 기울였던 부분이 바로 동학농민혁명 유족회를 창립하는 것이었습니다. 전국에 흩어져 있는 유족들을 찾아 규합하여 마침내 1993년 동학농민혁명유족회창립준비위원회를 발족시켰고, 100주년이 되던 1994년 3월 3일 고려대 교우회관에서 동학농민혁명유족회 창립대회가 개최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로부터 23년 만인 지난 5월 8일 동학농민혁명유족회가 문화체육관광부로부터 설립허가를 받아 사단법인으로 거듭났는데, 이를 바라보는 선생님의 감회가 남다를 것 같습니다. 유족회 창립과정에서 겪었던 어려움이나 기억에 남는 일화가 있으면 말씀해주십시오.
답) 네, 그렇습니다. 우리 팀이 답사를 다니고 조사활동을 벌이면서 현지에 있는 향토사학자인 최현식 최순식 이기화 이런 분들을 만나 많은 얘기를 들었습니다. 생생한 스토리텔링이지요. 또 유족들을 찾아다니면서 어떻게 살아왔는지, 조상의 얘기는 어떻게 들었는지를 수집했습니다. 비참한 얘기들이 주를 이루었습니다. 고향에서 도망쳐 성을 바꾸고 머슴살이를 하였다든지, 할아버지는 동학을 입 밖에 내지도 않았으나 할머니가 소곤소곤 들려주었다든지, 도망치면서 아이를 버리고 가서 남의 집에서 자랐다든지 죄다 서러운 얘기들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수십 만 명이 죽었다는데 우리가 찾아낸 유족 숫자는 100여 명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산발적으로 만날 게 아니라 이들을 모아 대화도 나누고 친목도 도모하고 조상의 명예를 회복하는 사업에도 협조하게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처음에는 서울 중구 필동에 있던 역사문제연구소에서 수 십 명을 모아 서로 대화하는 시간을 주선해 주었습니다. 차츰 그 규모가 커졌고 정식으로 동학농민혁명유족회를 창립하기 위한 준비위원회 발족으로 이어졌습니다. 이분들이 만나면 얘기가 끝도 없지요. 몇몇 유족 분들이 대단한 열성을 보여 유족회가 발전을 거듭하였고, 현손까지 포함해 그 수도 1만여 명이 넘었습니다. 다만 안타가운 점은 손자 대까지 만이라도 의료비나 기초생활비 등 국가보조가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게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살짝 귀뜸 하나 해줄까요? 특별법이 통과될 때 야당인 한나라당에서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후손이 독립유공자 후손 대우를 받는 것에 대해 반대하여 성사되지 못했습니다.

문) 지난 2016년 8월 박원순 서울시장님이 전북 전주를 방문했었습니다. 그때 제가 전봉준 장군 순국 터로 알려져 있는 전옥서 좌감옥 터(서울 종로구 서린동)에 동상을 건립해야 한다고 강하게 건의하였습니다. 이후 서울시와 협의를 거쳐 지난 4월 서울특별시 법인으로 (사)전봉준장군동상건립위원회가 출범했고, 오래 전부터 서울 남산공원에 전봉준장군 동상을 건립하기 위해 노력해온 선생님께서 동상건립위원회 이사장을 맡으셨습니다. 범국민적인 성금으로 동상을 건립하려고 다각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계시는데, 동상 건립의 역사적 의미나 동상 건립을 위한 사업추진 경과 등에 대해 말씀해주십시오.
답) 저는 한참 전부터 서울에 전봉준 동상 건립을 위해 문제를 제기하고, 남산의 안중근의사기념관이나 백범공원 언저리에 세울 것을 주장하면서 건의도 했지만 어려움이 많아 포기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난해 문병학 선생이 박원순 시장에게 건의해서 구체적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서울에서 박원순 시장을 만났을 때 기념재단 문병학 부장의 건의가 아주 감동적이어서 부지를 제공하겠다고 답했다 그러더라구요. 애썼어요. 저는 종로의 전옥서 터는 꿈도 꾸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답사를 해보니 종로의 전옥서 터가 서울시 소유의 땅이었습니다. 개인 소유였다면 성사되기 어려울 것 아닙니까? 행운이 찾아온 것입니다. 서울시에서 이를 허락해 주어 지금 신영우 상임이사와 하정우 대외협력팀장이 종로구청과 적극적으로 협의해나가고 있습니다. 이제는 원만하게 이루어질 것입니다. 지금 전봉준장군동상건립위원회는 국민모금운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제가 농담 삼아 1만원 이상, 1억 미만만 내달라고 부탁하고 다닙니다. 동상 작품도 공모형식을 빌어 결정할 것입니다. 또 1만원 기금 내고 동상이 건립되면 아들 손자 데리고 동상 앞에서 가서 내가 기금을 내 세웠다고 자랑하라고 일러줍니다. 국민의 호응이 좋습니다. 잘 성사되리라 믿습니다. 다만 한 가지 부탁의 말을 드리면 민족의 상징이 될 전봉준동상 건립기금을 내는 것은 액수가 적고 많음을 떠나 민족통일 또는 민주가치의 실현에 동참한다는 의식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문) 귀한 말씀 더 오랜 시간 듣고 싶은데, 지면의 제한 등으로 인해 아쉽지만 오늘 대담은 이쯤에서 마쳐야할 것 같습니다. 바쁘신 중에도 긴 시간 내주신 것에 대해 깊이 감사드립니다. 선생님 내내 강건하시기를 빕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