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석동학농민혁명추모사업회를 찾아서
일 시: 2017년 10월 30일(월) 12:00
장 소: 서석동학농민혁명추모사업회 사무실
대 담: 심형기 | 서석동학농민혁명추모사업회 회장

심형기 서석동학농민혁명추모사업회 회장
문) 이번 호 『녹두꽃』 지역대담에는 강원도 서석면에서 활동하고 있는 서석동학농민혁명추모사업회 심형기 회장님을 모셨습니다. 강원도라서 그런지 10월인데도 벌써 쌀쌀합니다. 회장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먼저, 녹두꽃 독자를 위해 회장님 자기소개와 근황에 대해 말씀해주십시오.
답) 반갑습니다. 이곳 홍천군은 해발 약 350미터로 겨울이 다른 곳보다 조금 일찍 찾아옵니다. 그래서 10월말이면 초겨울로 접어든다고 볼 수 있어요. 녹두꽃 독자분들게 먼저 인사 드립니다. 저는 강원도 홍천군 소재 서석동학농민혁명추모사업회 회장을 맡고 있는 심형기입니다. 저는 이곳 홍천에서 태어나고 홍천에서 성장한 홍천 토박이입니다. 저는 이곳에서 서석면의 면장을 지냈고, 홍천군의회 의원으로 활동하였습니다. 서석면장과 홍천군의회 의원으로 활동하면서 동학농민혁명과 인연을 맺게되었습니다. 그런 연유로 2016년부터 추모사업회 회장직을 맡아 수행하고 있습니다. 우리 홍천군 서석면에서는 1977년 풍암리 자작고개 전투지에 동학혁명군위령탑을 건립하던 해부터 그동안 지속적으로 동학농민군 위령제를 모셔왔습니다. 최근에 추진한 동학농민혁명 관련한 사업으로는 지난 9월 30일 제17회 홍천군 서석면동학문화제를 추진하였고, 10월 23일에는 자작고개 전투에 참전하였다가 돌아가신 800여 분의 명복을 빌어드리는 홍천군 동학농민혁명 추모제례를 엄숙하게 거행하였습니다.

문) 이곳 강원도 홍천군 서석면에서 동학농민혁명 정신선양을 위한 단체가 창립되어 활동한 것은 꽤 오래 전 부터였지요? 동학농민혁명 백주년을 준비하던 시기부터 서석면에 위령제를 모셔오던 분들을 중심으로 추모사업회가 구성되어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서석동학농민혁명추모사업회 연혁 등에 대해 말씀해주십시오.
답) 1894년 10월 22부터 23일 사이에 이곳 자작고개에서 800여 명의 전사자를 낸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1976년도에 당시 강원교육대학교에 근무하시던 조동걸 교수께서 자작고개 현장에 대한 오랜 조사와 발굴을 통해 동학농민혁명 유적지임을 확인하여 그 이듬해인 1977년 전투지였던 풍암리 자작고개 마루에 동학혁명군위령탑을 건립하고 문화재지정 신청을 하여 강원도기념물 제25호로 지정을 받았습니다. 이때로부터 동학농민군의 숭고한 넋을 기리기 위해 유가족과 관심 있는 지역유지 분들을 중심으로 ‘서석면동학혁명추모사업회’를 구성하여 현제에 이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추모사업회 역사가 40년이 넘은 셈이지요.
문) 강원도의 동학농민군 활동지역은 평창, 정선, 영월, 강릉, 삼척, 홍천, 원주, 횡성, 양양, 기린, 간성, 인제, 춘천, 금성, 김화 전역에 걸쳐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평창, 정선, 영월, 강릉, 삼척, 홍천 등이 중요한 활동 지역이었다는 사실이 연구조사 등을 통해 확인되고 있습니다. 강원도지역 특히 회장님 고향인 홍천지역을 중심으로 동학농민혁명 관련 유적지에 대한 얘기를 해주시기 바랍니다.
답) 동학농민군 장야평전투지가 홍천군 화촌면 장야촌(現 화촌면 장평리)입니다. 이곳에서 맹영재가 이끄는 관군과 싸워 30여명 사상자를 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후 동학농민군이 자작고개 진등에서 이동하여 관군과 치열한 접전을 벌였는데, 이전투를 자작고개전투라고 합니다. 이 전투에서 동학농민군 800여명이 전사했다고 합니다. 연이어 관군에게 패배한 동학농민군이 내면을 거쳐 양양으로 피했고, 결국 양양에서 차기석 대접주도 체포되었다고 합니다.

문) 강원지역 유적지는 크게 두 가지 성격으로 분류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 첫 번째가 고성·영월·원주·인제 등지에 있는 동학 2대 최시형 교주의 활동과 관련한 유적지들이고, 두 번째는 갑오년 여름 이후 11월까지 동학농민군이 관군과 일본군을 맞아 치열하게 접전을 벌였던 강릉, 정선, 평창 등을 비롯하여 홍천군 서석면 장야평과 물걸리, 자작고개 등의 유적지입니다. 홍천지역 이외에도 강원도 지역에 유적지들이 많이 있는데, 예컨대 강릉 관아 터나 강릉 선교장 등도 동학농민혁명 관련하여 중요한 유적지이고, 현재 강릉여자중학교가 들어서 있는 자리는 갑오년 당시 동학농민군을 처형했던 곳으로 확인되고 있는데....
답) 그렇습니다. 문선생님 얘기하신 것처럼 갑오년 여름 동학농민군이 점령했던 강릉 관아 터, 동학농민군을 처형했던 처형지 등 강원도에 관련 유적지들이 아주 많습니다. 이곳에서 멀지않은 곳이 인제군 갑둔리라는 곳이 있는데 이곳이 수운 최제우 선생의 동경대전을 해월 최시형 선생이 포교를 하면서 간행한 장소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강원도지역의 유적지가 정비되지 않고 방치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일본군을 몰아내기 위해 제2차 동학농민혁명이 단행되자 여기에 합류하기 위하여 봉기했다가 맹영재가 이끄는 관군에게 맞섰던 장야촌에는 현재 아무런 표식 하나 세워져 있지 않습니다. 풍암리 자작고개에 동학혁명군위령탑이 세워진 것이 그나마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나머지 동학농민군 활동지나 전투지 등에 대한 연구조사와 함께 정비사업을 체계적으로 추진해주기를 기념재단에 간곡하게 청합니다.
문) 1894년 9월 동학농민군이 2차 봉기를 단행하면서 전국 각지에서 반일구국항쟁을 위한 동학농민군 활동이 치열하게 전개됩니다. 이런 전개과정 속에서 10월 21일 장야평전투, 22일 23일 풍암리 자작고개전투가 벌어졌습니다. 이 지역 토박이로서 이 전투에 대해 들었던 얘기들을 편안하게 기억을 되살려 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답) 음력으로 10월 22일 그러니까 양력으로는 11월 19일이니까 강원도는 추워지는 때지요. 그때 이곳 자작고개에 모인 동학농민군의 숫자는 수천 명이었다고 해요. 당시 관군을 이끌던 지평현감 맹영재가 중앙정부에 “폭도들의 수가 수천여 명이 된다”고 보고했다고 합니다. 이들은 이곳에서 관군과 맞서 최후 일전을 벌리다 최소한 800여명 이상이 전사한 것으로 조사되었습니다. 서석면의 위치가 군사적으로 동쪽으로는 양양군과 평창군, 남으로는 강릉 원주, 서쪽으로는 홍천 서울, 그리고 북쪽으로는 춘천 인제방향의 도로가 한눈에 보이는 능선입니다. 당시 이곳 자작고개에는 밤나무가 자생하는 야산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엄폐와 은폐가 용이했던 요새였고, 인접한 내촌면 동창에는 정부양곡 보관창고가 있어 동학군의 식량 공급처로 활용 할 수 있는 이점이 있는 지역입니다. 그래서 동학농민군이 이곳에서 전투를 벌인 것으로 보입니다.
문) 197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이곳 풍암리 마을에는 10월 23일 같은 날 30여 호가 제사를 모셨다고 하지요? 한날 제사를 모셨던 그분들이 모두 자작고개전투 때 전사한 동학농민군이었다는 얘기겠지요?
답) 그렇습니다. 동학농민군에 가담해서 일전을 벌리다 많은 분이 돌아가셨는데 1976년도에 조동걸 교수팀에서 자작고개전투에 대해 조사를 하던 당시만 해도 풍암리에 같은 날 조상님의 제사를 모신 집안이 28가구였습니다. 모두 1894년 10월 22일과 23일 치열하게 벌어진 전투에서 사망한 동학농민군이었지요. 그동안 여러 곳으로 이주하여 현재는 28가구 중 9가구만이 남아 거주하고 있습니다.
문) 이곳 서석면 풍암리 자작고개에 동학혁명군위령탑이 세워져 있는데 위령탑을 건립하게 된 경위나 건립 이후 지속적으로 이어진 위령제 등에 대해 말씀해주시죠.
답) 1976년 당시 춘천교육대학교에 재직 중이시던 조동걸 교수께서 갑오실기에 기록된 근거와 구전(口傳)되던 내용들을 가지고 한 달여 동안 이곳에 기거하며 탐문조사를 했었습니다. 그 유가족과 주민들을 통해 갑오년에 이곳에서 벌어진 슬픈 역사를 찾아낸 것이지요. 그렇게 확인된 내용을 바탕으로 지역주민들이 자율적으로 ‘동학혁명위령탑건립추진위원회’를 구성하게 되었습니다. 건립추진위원회를 구성한 후 각 가정을 방문하여 콩이나 팥, 옥수수 등 곡식을 거두어 내다팔아 그 돈으로 자작고개 전투지 일대 땅 300평을 매입하였고, 여기에 홍천군비 일부를 지원받아 조그마하게 시멘트로 높이 올리고 그 위에 오석(烏石)을 올렸지요. 그 검은 돌비에 ‘동학혁명군위령탑’이라고 새겨져 있습니다.
문) 위령탑 건립 이후 매년 위령제를 지내왔지요?
답) 위렵탑은 1977년 12월 3일(음력10.23.)에 건립하였습니다. 건립하던 전 해부터 서석면 주변에 사는 분들 등을 대상으로 제삿날을 조사하였는데, 10월 23일이 제삿날인 분들이 많았습니다. 모두 자작고개전투에서 돌아가셨지요. 맨 처음 위령제는 위령탑 준공식과 겸해 진행되었습니다. 이듬해부터 서석면장이 제주(祭主)가 되어 추모제를 올려왔고, 10여 년 전부터 제주를 홍천군수로 격상시켜 매년 추모제를 모셔오고 있습니다.
문) 회장님은 이곳에서 출생하여 이곳에서 성장하셨고, 공직에 몸담고 이곳에서 쭈욱 생활하셔서 위령탑 건립이나 추모제례 모시는 일 등을 소상하게 알고 계시죠? 또한, 어릴 때부터 자작고개전투 등에 대해 많응 얘기를 들으셨을텐데...
답) 저는 1945년에 이곳 풍암 2리에서 태어나 서석국민학교를 다녔습니다. 자작고개가 등하굣길이었는데, 여름 장마철이면 백골과 굵은 뼈와 잔뼈들이 여기저기 굴러다니던 것을 보았습니다. 당시 제가 여덟 살 무렵에 본 이 뼈들은 6.25전쟁 때의 인골이 아닙니다. 백골이 되려면 시간이 걸리잖아요... 어릴 적에 보았던 백골은 6.25전쟁 때 돌아가신 분들 것이 아니라 당시로부터 50년 전에 일어난 동학농민군 유골이지요. 그로부터 20여 년 후인 1973년 새마을사업으로 자작고개에 신작로 공사가 진행되었어요. 그때 다시 유골들이 여기저기서 많이 나왔습니다. 그래서 서석면 주민들이 이곳에 대해 관심이 갖게되었고, 그 연장선상에서 현지조사가 이루어졌습니다. 자작고개에 유골들이 굴러다녀서 밤에는 어른들이나 아이들이나 무섭고 두려워서 이 고개를 잘 넘어다니지 않았습니다.
문) 전라도나 충청도는 유적지가 비교적 잘 정비된 곳도 있는데, 강원도는 유적지 정비가 별로 이루어지지 못했지요? 서석면 풍암리 자작고개전투지 외에 다른 곳 유적지 정비현황은 어떤지요? 강원도나 해당 지방자치단체에서 관심을 갖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되는데 이점에 대해서도 말씀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답) 강원도 내에 동학관련 유적지 정비는 매우 미흡한 수준입니다. 앞서 말씀 드렸던 것처럼 서석면 주민들이 힘을 모아 자작고개전투지에 위령탑을 세운 게 그나마 다행스럽지요. 강원도지역 동학농민혁명 관련 유적지는 강릉이나 평창, 영월, 횡성 등 여러 곳에 동학농민군 활동지와 전투지 등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곳들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나 조사가 이루어진 게 별로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해당 지방자치단체의 관심이 절실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동학농민혁명은 전라도에서 시작되었지만 이후 일제의 불법적인 침략에 맞서 국권을 수호하기 위한 전국적인 반일민족항쟁이었습니다. 그래서 특별법이 제정되었고, 그 애국애족 정신을 범국민적으로 선양해나가고 있습니다. 전국적인 차원에서 동학농민혁명 정신 선양사업을 추진하는 기념재단에서 강원도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각별한 관심을 보여주셨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민주화운동인 동학농민혁명이 이곳 서석면에서 활기차게 이루어진 것은 홍천군의 자랑거리라는 인식을 이끌어 내기 위해서라도 내년에라도 전국을 순회하면서 개최되고 있는 동학농민혁명기념대회가 내년에는 강원도에서 개최될 수 있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문)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강원도 지역의 인식이나 관심이 충청·전라도 지역주민들과는 좀 차이가 있을 텐데 어떻습니까? 강원도 홍천지역 동학농민혁명 정신 선양사업 추진에 오랫동안 몸담아오셨는데 이 과정에서 느낀 점들을 말씀해주십니다.
답) 동학농민혁명은 그동안 교과서에서도 ‘동학난’으로 기록되어 국가에 반역한 행위로 가르쳐왔잖아요? 그래서 참여자 후손들조차도 밖으로는 자신들과는 무관한 것처럼 쉬쉬해왔습니다. 이렇게 어두운 시절을 지나오면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했던 집안은 천민 집안이고, 반란을 일으킨 죄인이라는 인식이 자리잡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제사도 숨어서 지내다시피 해왔습니다. 그러다가 2004년 특별법이 제정된 이후 동학농민혁명은 새롭게 그 역사적 의미가 제대로 조명받았습니다. 그런데 동학농민혁명으로부터 2~3대를 넘어 오다보니 서석면에 살던 분들도 뿔뿔이 흩어지고, 남아 계신 분들은 연로하셔서 기억도 가물거리고... 늦은 감도 없지 않습니다. 그래서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제대로 된 평가와 인식이 대중적으로 확산되어 정립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다행히 문화체육관광부 소속으로 기념재단이 설립되어 전국적으로 동학농민혁명 정신 선양사업을 추진하고 있어서 다행입니다.
문)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유족이나 지역 어른들에게 당시의 상황에 대해 전해들은 이야기가 있으면 해주시기 바랍니다.
답) 제가 이곳 서석면 면장으로 재직할 때 동학 유가족에게 들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자작고개전투 때 돌아가신 분의 제삿날 제사를 지낼 때 한 밤중에 불빛이 밖으로 새나가면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한 가정이라고 인식될까봐 불빛이 새어나가지 않게 방문에 천을 치고 문을 잠근 후 제사를 모셨다고 하더라구요. 얼마나 가슴이 아프던지... 이밖에도 어릴 때 들은 얘기가 여러 가지 있는데, 형님이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했다가 관군이 쏜 총탄에 죽자 동생이 조선낫을 치켜들고 ‘우리 형을 죽인 놈이 어느 놈이냐!’고 관아로 쫏아갔다가 동생마저 죽임을 당했다는 얘기, 어느 집에서는 갑오년에 돌아가신 할아버지 산소를 이장하던 중 몸에 탄환이 박혀 있어서 그걸 몸에서 빼내고 안장했다는 얘기,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했다가 쫓길 때 관군과 일본군이 무차별적으로 동학도 집안 사람들을 죽이니까 대가 끊어질까 우려해서 참여했던 분이 피신하면서 장손 아이를 곡식을 담아두는 큰 독(항아리)에 넣고 꼼짝 말고 가만히 있으라고 타이른 후 산속으로 피신했다가 돌아오니 다행히 아이가 독 안에서 잠이 들어 죽임을 당하지 않고 살았다는 ‘쌀독 이야기’ 등 어릴 때 어른들이 해주셨던 얘기들이 지금도 기억납니다. 참으로 가슴 아픈 얘기들이지요.
문) 혹여, 덧붙이고 싶은 얘기가 있으면 해주시기 바랍니다. 우리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에 바라는 것 등에 대해 말씀해주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답) 동학농민군 수백 명이 희생된 자작고개전투지를 국가사적으로 승격되어야 합니다. 국가가 역사현장을 보존하고 관리하여 후대에 애국애족 정신을 함양하는 교육의 장으로 활용해야 합니다. 고동안 홍천군, 강원도 관련부서와 꾸준히 협의해왔으며, 실제로 2008년도에 국가사적지로 신청하기 위해 기초조사를 실시하기도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어느 대학 교수의 ‘동학농민군 유골이 발견되지 않았다’는 발언을 이유로 이곳을 국가사적지 지정하는 것에서 배제되었습니다. 너무나 애석한 일입니다. 그럼 제가 어릴 때 보았던 수많은 그 동학농민군 유골은 다 뭐란 말입니까? 이런 것이 말 그대로 탁상공론 아닌가요? 갑오년 이후 자작고개에 도로가 확장되는 등 형질이 많이 변경되었으니까 이런 점들이 충분히 고려되어 조사가 제대로 진행되면 유골이 안 나올 리가 없습니다. 1950년대와 1970년대 이곳에 신작로가 나던 때 풍암 2리(자작고개 뒷마을)에 거주하던 어른들이나 아이 할 것 없이 수많은 동학농민군의 유골을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봤고, 그래서 주민들이 십시일반해서 그곳에 위령탑까지 건립하였는데... 몇몇 학자들이 들어와서 며칠 동안 조사해 보고 유골이 없으니 근거가 명확치 않다. 그러니 이곳을 국가사적지로 지정하는 것은 타당치 않다고 말하고, 이를 근거로 국가사적지에서 배제한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하루 빨리 이곳에 대한 재조사를 추진하여 국가사적으로 지정해야 마땅합니다. 이곳 전투에 대해서는 당시 해당 관청의 기록 등으로도 명확하게 확인되잖습니까? 현장에서 유골을 직접 보았던 사람들이 사망하기 전에 조사를 서둘러야 할 겁니다.
문) 바쁘신 중에서도 이렇게 귀한 시간을 내주셔서 고맙습니다. 긴 시간동안 수고 많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