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소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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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겨울 30호
시인, 우석대 교수 안도현 인터뷰
시인, 우석대 교수 안도현 인터뷰
일 시: 2017.10.19.(목) 13:00
장 소: 우석대학교 교수연구실
대 담: 안도현 | 시인, 우석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문병학 | 기념재단 기념사업부장
  이번 호 명사대담은 한국문단의 대표적인 시인 안도현 교수를 만났다. 우석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재직 중인 안도현 시인은 시(詩) ‘서울로 가는 전봉준’(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1984년)으로 한국문단에 등단한 이후 문화예술분야는 물론이고 다양한 사회활동을 통해 우리 사회의 발전에 많은 기여를 하고 있다.
안도현 | 1961년 경북 예천에서 태어나 원광대 국문과와 단국대 대학원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다. 198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서울로 가는 전봉준’이 당선되어 등단했다. 첫 시집 『서울로 가는 전봉준』을 시작으로 『모닥불』 『그대에게 가고 싶다』 『외롭고 높고 쓸쓸한』 『그리운 여우』 『바닷가 우체국』 『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하여』 『너에게 가려고 강을 만들었다』 『간절하게 참 철없이』 『북항』등 10권의 시집을 냈다. 『나무 잎사귀 뒤쪽 마을』, 『냠냠』, 『기러기는 차갑다』 등의 동시집과 다수의 동화를 쓰기도 했으며, 어른을 위한 동화 『연어』는 출간 이후 100쇄를 넘겼고, 12개국의 언어로 해외에 번역 출간되었다. 최근에는 『백석평전』 『그런 일』 등의 산문을 냈다. 소월시문학상, 윤동주상, 백석문학상, 임화문학예술상 등을 받았다. 현재 우석대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전주에 살고 있다.

문) 늘상 만나던 작가회의 모임이나 술자리가 아니라 오늘 이 자리는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소식지 [녹두꽃]의 명사대담 인터뷰라서 호칭을 뭐라고 해야 좋을지 모르겠네요. 뭐라고 하죠? 뭐가 좋을까요? 안 시인님, 안 선생님, 안 교수님?.... 어쨌거나 『녹두꽃』 독자들을 위해 먼저 근황을 말씀해주십시오.
답) 지금은 대학에 있습니다만 이십대 중반부터 중학교 국어교사로 살면서 선생이라는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 ‘안도현 씨’라는 말이 때로는 어색하게 들리기도 해요. 가을로 접어들면서 학교 강의하랴, 외부강연 다니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제가 거절을 잘 못하는 스타일이라 강연 요청을 받아놓고는 금세 후회하는 일이 많습니다. 최근 몇 년 동안 일 년에 100군데 넘는 곳을 돌아다녀야 하는 신세입니다. 내년부터는 강연을 대폭 줄이고 책 읽고 글 쓰는 일에 집중하려고 마음먹고 있습니다.

문) 198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서울로 가는 전봉준’이라는 시가 당선되면서 등단하셨지요? 그 당시 동학농민혁명, 갑오년의 역사가 대중적으로는 ‘동학난’ 혹은 ‘반란사건’으로 인식되던 때였지요? 시대적으로 상당히 앞선, 아니 당시 시대적 상황에서는 상당히 도발적인(?) 시를 쓰셨는데... 특별한 창작동기라든가 그런 것이 있었습니까?
답) ‘광주’로 상징되는 80년대 초반에 대학을 다니면서, 그리고 시를 쓰면서 제 머리 속을 떠나지 않았던 것은 ‘역사 속으로’라는 화두라고 단정 지어 말씀 드릴 수 있습니다. 광주에서 많은 사람들이 억울하게 죽었는데 그걸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외면하고 산다는 것은 죄를 짓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81년 이후 5공 초기 몇 년간은 비판의 산실이라 할 대학에서도 침묵이 강요되었고, 그런 시대상황 속에서 갑갑한 현실을 깨뜨리는 문학을 끊임없이 꿈꾸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광주’는 저희 세대에게 빚이면서, 교사였습니다. 대학 3학년 때부터 우연찮은 기회에 한국근현대사와 관련된 역사서와 사회과학 책들을 많이 읽게 되었는데 시집이나 소설집에만 목매달고 있던 저 같은 문학청년에게는 그게 굉장한 변화의 계기를 만들어주었습니다. 『서울로 가는 전봉준』이 신춘문예 당선작으로 신문에 실린 게 84년 1월 1일인데, 비록 실패한 혁명가의 초상이 시에 비장하게 그려져 있었지만, 그 당시로는 또 다른 혁명과 변화의 꿈을 꾸던 많은 이들에게 신선하게 받아들여졌던 모양입니다. 광주의 비극을 동학농민혁명의 좌절과 오버랩 시키고 싶은 의도에서 쓴 시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이십대 무렵에 꿈꾸던 혁명은 다분히 낭만적인 요소가 있었던 게 사실입니다. 그게 억압과 불평등의 현실을 견디는 유일한 길이었기는 하지만요.

서울로 가는 전봉준

눈 내리는 만경들 건너가네
해진 짚신에 상투 하나 떠가네
가는 길 그리운 이 아무도 없네
녹두꽃 자지러지게 피면 돌아올거나
울며 울지 않으며 가는
우리 봉준이
풀잎들이 북향하여 일제히 성긴 머리를 푸네

그 누가 알기나 하리
처음에는 우리 모두 이름 없는 들꽃이었더니
들꽃 중에서도 저 하늘 보기 두려워
그늘 깊은 땅 속으로 젖은 발 내리고 싶어하던
잔뿌리였더니

그대 떠나기 전에 우리는
목 쉰 그대의 칼집도 찾아주지 못하고
조선 호랑이처럼 모여 울어주지도 못하였네
그보다도 더운 국밥 한 그릇 말아주지 못하였네
못다 한 그 사랑 원망이라도 하듯
속절없이 눈발은 그치지 않고
한 자 세 치 눈 쌓이는 소리까지 들려오나니

그 누가 알기나 하리
겨울이라 꽁꽁 숨어 우는 우리나라 풀뿌리들이
입춘 경칩 지나 수군거리며 봄바람 찾아오면
수천 개의 푸른 기상나팔을 불어제낄 것을
지금은 손발 묶인 저 얼음장 강줄기가
옥빛 대님을 홀연 풀어헤치고
서해로 출렁거리며 쳐들어갈 것을

우리 성상(聖上) 계옵신 곳 가까이 가서
녹두알 같은 눈물 흘리며 한 목숨 타오르겠네
봉준이 이 사람아
그대 갈 때 누군가 찍은 한 장 사진 속에서
기억하라고 타는 눈빛으로 건네던 말
오늘 나는 알겠네

들꽃들아
그날이 오면 닭 울 때
흰 무명띠 머리에 두르고 동진강 어귀에 모여
척왜척화 척왜척화 물결소리에
귀를 기울이라

문) 교수님 고향이 경북 예천이지요? 경상도에서 전라도로 건너와 자리를 잡는 것도 흔치 않는데, 거기다가 전라북도가 발상지인 동학농민혁명의 최고 지도자 전봉준 장군에 대해 남다른 관심을 가진 것도 예사롭지는 않습니다. ‘서울로 가는 전봉준’으로 등단한 이후 작품 활동을 하시면서 동학농민혁명을 주제로 창작한 시가 더 있지요? 시의 내용과 창작하게 된 배경 등에 대해서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답) 경상도가 고향인 제가 전라도에 살면서 이곳이 동학농민혁명의 고장이라는 것을 인식하게 된 점을 정말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시를 쓰면서 역사적 현실을 외면하지 않는 시인을 꿈꾸던 때였으니 더욱 그렇습니다. 이삼십 대에는 동학농민혁명 유적지와 전적지, 각종 동학농민혁명 관련 행사라면 어디든 찾아갔습니다. 마치 역사를 제 몸에 쟁여두는 심정이었지요. 아래의 시도 그런 경험을 바탕으로 쓴 시입니다.

만경평야의 먼 불빛들

우리의 몸 바깥이 아니라
몸속에 어둠이 있다
그 어둠을 죽이려고 피어난 게 아니라
스스로 용단을 내려 물러가기를 바라면서
집집마다 이마에 하나씩 불빛을 다는
만경강 유역에 나가 보라
정겨운 싸움이 있다
영차      영차
안간힘 쓰고 줄다리기 하는 먼 불빛들
갑오년 동학패들 사발통문 돌리던 그 벌판에
잔혹한 어둠 속에
불빛 아래
노동이 비로소 꿈이 되는 것을 보라
내일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한세상 똑부러지게 살다 가야겠다고
그리고 내일까지는 기다리며 있겠다고
살아 꽃피며 수군거리는

문) 동학농민혁명 120주년이던 2014년 경상북도 상주시에서 열린 동학농민혁명 학술대회 때 경북지역 기념사업 현황과 전망에 대해 발표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자료를 읽다가 내용이 하도 충격적이어서 손으로 가슴을 꽉 누른 채 밖으로 나가 연거푸 담배를 피웠던 기억이 있습니다. 충격적인 내용은 다름 아니라 교수님 고향 예천군과 인근 상주시 사이에 흐르는 강변에서 갑오년 당시 일어났던 일입니다. 교수님 고향 앞으로 흐르는 게 내성천이지요? 그 내성천 모래밭에 동학농민군 11명을 생매장했다는 기록을 읽게된 것입니다. 1894년 9월 동학농민군과 민보군이 치열하 게 대결을 했는데 그 과정에서 민보군이 동학농민군 11명을 생포하였습니다. 당시 전라도는 동학농민군 세력이 강하여 민보군을 압도를 했지만, 안동·예천·상주 등 경북지역은 농민군 못지않게 민보군 세력도 강력했습니다. 그래서 민보군에게 농민군 11명이 생포되었는데 민보군이 이들을 산채로 내성천 모래밭에 묻어버린 것입니다. 동학농민군이나 민보군 모두 대체로 이 지역에서 살던 이웃들이었을 텐데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었는지... 이념이라는 게 이렇게도 잔인한 것이구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 치가 떨렸습니다. 이런 일이 교수님 고향, 내성천에서 이루어졌습니다. 혹여 청소년기에 그런 얘기를 들어보기는 하셨나요? 어릴 때 내성천에서 멱을 감기도 하셨을 텐데... 세상에나... 그 현장에 1999년 예천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에서 ‘동학농민군 생매장 터’라는 비를 세워놓았습니다. 한낱 미물일지라도 생명을 죽이는 일은 영 내키지 않는 법인데 어떻게 산 사람을 파묻을 수 있었는지... 이념이라는 게 뭔지 참 별 생각이 다 들었어요.
답) 아, 그 이야기는 처음 듣습니다. 예천의 한 고등학교에 가면 민보군이 쓰던 건물이 아직도 남아 있다고 하던데 거기도 아직 가보지 못했습니다. 상주의 동학 근거지는 가봤고요. 동학은 전라도라는 지역에 한정해서 설명하면 곤란하다고 생각합니다. 18세기말 전국 각처 기층 민중들의 분노와 염원을 압축하고 있는 게 동학이지요. 저는 말씀하신 내성천 가에서 태어났습니다. 내성천은 은모래가 전국에서 가장 잘 발달된 곳인데 거기에 동학농민군의 피가 뿌려졌겠군요. 다음에 고향에 가면 그 매장 터에 세워진 비를 꼭 가봐야겠습니다.


문) 이후 동학농민혁명 최고지도자 녹두장군 전봉준의 일대기를 다룬 산문집 『전봉준』을 펴내셨는데.... 이 책을 집필하시게 된 특별한 이유가 있었는지요? 중학생 정도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도록 쉽게 써서 청소년들에게 녹두장군 전봉준을 알리는데 많은 기여를 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답) 청소년들이 읽는 전봉준 전기인데, 그 책을 쓰면서 전봉준의 일대기를 제대로 공부할 수 있었습니다. 전봉준이 동학농민군의 영웅적인 최고 지도자였지만 저는 농민군 하나하나가 다 전봉준이라고 생각합니다. 동학농민혁명이 실패로 돌아간 후 동학의 흔적들이 자료로 남아 있는 게 적다는 게 무엇보다 안타까웠습니다. 하지만 동학농민혁명은 신화나 전설 속의 이야기가 아니라 불과 120여 년 전에 우리가 발 딛고 사는 땅에서 일어난 엄연한 현실적 역사입니다. 우리 현대사는 동학을 압살하고 왜곡한 부끄러운 시간들을 너무 오래 쌓아왔습니다.


문) 1994년 동학농민혁명 1백주년을 앞둔 1989년부터 전주를 중심으로 동학농민혁명 100주년을 준비하자는 움직임이 강하게 형성되었고, 그 결과 당시 왕성하게 활동하던 민주주의민족통일전북연합 등 전북지역 30여개 시민사회단체가 모여 1992년 여름에 연합 형태로 동학농민혁명백주년기념사업회가 창립되었습니다. 창립하던 때부터 동학농민혁명을 주제로 한국 문단에 발표된 시를 모으는데 힘을 기울여 1993년 가을에 동학농민혁명 100주년 기념 시선집(詩選集) 『황토현에 부치는 노래』(창작과비평사)을 펴냈습니다. 이 책이 출판되기까지 교수님께서 중심적인 역할을 맡으셨는데, 그 시집 뒤 부분에 ‘갑오농민전쟁과 한국현대시’라는 글을 지금 한국작가회의 이사장이신 최원식 교수님께서 쓰기도 하셨는데... 시선집 출판에 대한 기억을 떠올려 주시지요.
답) 그 무렵 저도 전주에서 100주년기념사업회가 꾸려지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동학농민혁명의 문학적 성과, 특히 그동안의 시적인 작업들을 모아 보자는 생각에서 제가 그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시선집을 만들면서 천 명 가까운 시인에게 원고청탁서를 보냈고, 우리나라의 거의 모든 시집을 훑어보았지요. 동학농민혁명 관련 시가 250여 편에 이르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 중에서 90여 편을 추려서 엮었습니다. 저는 문학청년 시절에 신동엽의 서사시 <금강>을 읽으면서 문학과 역사가 어떻게 접점을 찾는지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금강>은 3.1 운동, 동학농민혁명과 한국전쟁, 그리고 4.19로 건너오는 역사의 물줄기를 정확히 짚어냈다는 것, 요즘 말로 하면 민중적, 반외세적 시각에서 그려낸 작품이었습니다. 시선집 작업을 하면서 조운의 「고부 두성산」을 찾아낸 것은 정말 행운이었습니다. 90년대 초 광주의 조그마한 출판사에서 나온 <조운문학전집>에서 발견했는데, 이 시는 동학농민혁명을 그린 최초의 현대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시가 처음 실렸던 지면은 1947년에 조선문학가동맹에서 낸 『연간조선시집』입니다.


문) 흔히 21세기를 지식정보화시대, 문화의 시대라고 말합니다. 동학농민혁명이 20세기 한 세기 동안 반란사건으로 왜곡 축소되다가 2004년 참여정부 때인 제17대 국회에서 특별법이 제정되어 110년 만에 그 명예가 회복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동학농민혁명의 역사적 의미를 널리 알리고 그 숭고한 정신을 범국민적으로 확산시켜나가기 위해서 문화콘텐츠 개발이 절실하다는 얘기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문예창작학과 교수로서 해주고 싶은 얘기는 없으신지요?
답) 이제까지 동학을 소재로 한 여러 장르의 예술작품이 만들어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전봉준의 일대기가 공영방송의 드라마로 제작된다는 소문은 들었던 것 같은데 아직 그걸 본 적이 없습니다. 영화도 마찬가지입니다. 청소년들과 젊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게임의 콘텐츠로서도 동학은 무한한 가능성이 있는 소재입니다. 2016년 겨울 전 국민이 촛불을 치켜들면서 우리는 정권을 교체했고, 새로운 정부는 적폐청산과 함께 개혁의 속도를 내고 있습니다. 역사는 먼 과거가 아니라 현재 우리 가까이에 있다는 인식 그게 역사의식을 갖는 일이지요. 새로운 이 정부에서 다시 찾게 된 표현의 자유와 함께 동학농민혁명의 정신이 우리 국민의 정신으로 더 넓게 퍼져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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