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소식지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소식지

발행처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56149)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동학로 742

TEL. 063-530-9400 FAX. 063-538-2893

E-mail. 1894@1894.or.kr

COPYRIGHT THE DONGHAK PEASANT REVOLUTION FOUNDATION.

ALL RIGHTS RESERVED

목차열기
2019년 가을 37호
1894년 강원도 농민군의 활동과 동학농민혁명의 의의

  1894년 강원도 농민군의 활동과 동학농민혁명의 의의


 박준성 | 역사학연구소 연구원



 

  세상을 뒤흔들었던 거대한 역사의 사건은 자료의 발굴과 연구의 축적에 따라 점점 풍부해진다. 현실의 요구와 이해에 따라 기존에 알고 있던 사실도 새로운 관심의 대상이 되고 다시 보게 된다.


  사회적 문제가 심각할 때 과거 역사를 돌이켜 보면서 제도의 운영과 인물의 교체로 해결할 수 있다고 보면 개선으로 대안을 내세울 것이고, 제도 자체를 바꾸어야 한다고 보면 개혁에 관심을 가지게 될 것이다. 구조와 체제 자체를 변혁하지 않고는 사회의 모순을 해결할 수 없다고 본다면 혁명을 꿈꾸게 될 것이다.


  지금 서 있는 자리가 입장(立場)을 좌우한다. 만화 <송곳>의 명대사 가운데 하나인 "서는 데가 바뀌면 풍경도 달라지는 거야”하는 말이 바로 그런 뜻이다. 입장에 따라 과거의 역사는 재해석되면서 지금 여기의 역사로 살아난다. 그런 점에서 모든 역사는 현대사이다. 현실을 보는 관점도 입장에 좌우되기는 마찬가지다.


  촛불항쟁이 시작되기 전에 노동자들이 먼저 투쟁에 나섰다. 가능하지 않다고 했다. 하나하나 촛불이 늘어나고 촛불항쟁이 시작되면서도 1987년 6월항쟁과 같은 전민항쟁으로 번지지는 못할 것이라고 했다. 그해 6월 10일 거리에 나섰던 사람들조차도 자신들이 발걸음이 6월항쟁이라는 역사를 만들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1980년 5.18민중항쟁 때도, 1960년 4월혁명 때도, 1946년 10월 인민항쟁 때도, 1919년 3.1운동 때도, 1894년 동학농민혁명 때도 항쟁에 참여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만들어 낼 미래의 역사를 가늠하기 어려웠다.


  전국적 규모로 타올랐던 민중의 항쟁은 1894년 근대적인 갑오개혁과 1920년대 무단통치의 방식을 바꾸는 문화정치, 1960년 이승만 자유당 정권이 무너진 뒤 집권한 민주당 정권, 1987년 4.13호헌조치를 폐지시키는 직선제 개헌과 2016~2017년 촛불항쟁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혁명보다 어렵다는 개혁은 지속되지 못하였다. 민중의 항쟁으로 이룬 성과를 독차지한 세력이 자신의 힘으로 수구 특권 기득권 세력을 제압할 힘이 없다면 민중의 요구를 해결하면서 민중의 힘을 빌려 개혁을 추진해야 했다. 스스로가 보수 기득권 세력의 일부였던 개혁세력은 민중적 개혁을 추진할 실력과 의지가 없었다. 그 결과 식민지와 분단의 근현대사는 이식자본주의가 정착되고 모순이 심화되면서 국토와 체제의 분단 못지않게 극단화된 계급의 양극화라는 내부 분단이 형성되었다. 그 뿐 아니라 개발이라는 명목으로 자연은 계속 파괴되었고 다양한 차별이 양산되었다.


  현실 개혁의 주체가 되지 못한 항쟁의 주체는 대리자들의 ‘예방혁명’에 현혹되었다. 개혁을 디딤돌로 삼아 변혁으로 나가지 못하였다. 민중의 항쟁은 늘 부분적인 승리 이후 패배로 귀결되었다. 그렇다고 과거의 패배가 역사의 실패는 아니었으며, 반복되는 패배로 귀결될 것이라는 허무적 전망의 근거가 될 수도 없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은 근현대 민중항쟁의 역사에서 가장 앞자리에 있던 높은 봉우리였다. 1894년 동학농민군은 1월 고부봉기에서 고부 관아를 점령한 뒤 황토현 싸움에서 전라도 감영군과 싸워 승리하였고, 장성 황룡촌 싸움에서는 1811~12년 ‘홍경래 난’ 이후 83년 만에 중앙에서 파견된 경군의 한 부대와 싸워 이겼다. 나아가 호남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중심지인 전주성까지 점령하였다. 1894년의 갑오개혁을 이끌어 냈으며, 우리 역사에서 처음으로 농민들이 지방 행정에 참여하여 자치 질서에 영향을 미친 ‘집강소 체제’를 형성하기도 하였다. 9월 이후에는 일본군의 침략에 맞서 대대적인 반침략 저항 운동에 나섰다. 밑으로부터 민중이 조직체계를 갖추고, 무장을 한 뒤 서울까지 진격하겠다고 선언하고 일 년 내내 전국 곳곳에서 항쟁을 계속한 대규모 사회변혁운동은 1894년 동학농민혁명 말고는 그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없었다.


  1894년 강원도에서도 동학 농민군이 자신의 생존과 사회의 변혁을 이루고자 투쟁에 나섰다. 집강소가 설립된 전라도 지역의 농민군 활동 소식은 강원도에도 전달되었을 것이다. 농민전쟁의 수습책으로 실시된 정부의 개혁이 후퇴하고 친일 내각을 앞세운 일본의 내정 간섭이 드러나면서 농민들의 불만과 위기감이 높아갔다. 농민들은 지배층의 욕심으로 외세가 조선 땅에 들어왔다고 인식하고 지배층에 대한 불신과 불만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각지에서 농민들은 계속 폐정개혁을 요구하였다. 그동안 자제하던 양반과 부민들에 대한 투쟁의 강도도 다시 높이기 시작했다. 강원도에서도 동학 조직을 매개로 움직이던 농민들이 8월부터 드러내놓고 활동하기 시작했다.


  1894년 당시 강원도 행정구역은 강릉대도호부, 원주목, 양양·삼척·회양·춘천·철원·영월·이천의 7개 도호부, 고성·간성·통천·평해·평창의 5개 군, 흡곡·울진·금성·김화·안협·평강·낭천·양구·인제·홍천·횡성의 11개 현이었다. 강원도에서 농민군이 활동한 지역은 평창·정선·영월·강릉·삼척·홍천·원주·횡성·양양·기린·간성·인제·춘천·김화·금성 등지였다. 강원도 전체 고을의 반 이상 지역에서 농민군이 활동하였다. 그 가운데서도 평창·정선·영월·강릉·삼척·홍천·원주 등지에서 활동이 활발하였다.


  8월 중순 무렵부터 평창 쪽에 결집해 있던 영월과 평창·정선 등 5개 읍의 농민군 수천 명이 9월 들어 먼저 강릉을 향하여 진군하기 시작하였다. 9월 4일 오전, 1천여 명이 넘는 농민군 본대가 강릉부 관아를 점거하였다. 전라도 쪽 전봉준 세력이 집강소 체제를 벗어나 움직이기 시작한 9월 10일 무렵이나, 최시형이 9월 18일 기포령을 내리고 북접 교단지도부가 활동에 나선 때보다 보름여 앞선 때였다. 관아를 점령한 농민군은 먼저 강릉부 관아 동문에 “삼정의 폐막을 고치고 보국안민 한다”는 방문을 내걸었다. 곧 이어 각 마을의 주민들을 불러 모아 삼정을 삭감하겠다고 선포하였다. 요호라 불리는 부자들을 잡아들여 토지와 재산, 전답문서를 빼앗고, 수탈을 일삼던 이서배들을 잡아 족쳤으며, 민간의 송사를 처리하였다.


  강릉·양양·원주·횡성·홍천 등 5읍의 접주로 불렸던 농민군 지도자 차기석과 접주 박종백이 이끄는 강원도 중부내륙 지역의 농민군도 10월 13일 밤에 홍천군 내촌면 물걸리 동창(東倉)을 점거하였다. 농민군이 먼저 중부내륙의 중심지인 동창을 친 것은 교통의 요지를 장악하고 세곡을 군량미로 확보하려는 의도였다. ‘삼정이정’의 의지도 포함되었을 것이다.


  강릉부를 점령했던 농민군은 영동 일대의 최대 지주이면서 승지를 지낸 이회원과 이서배들의 반격에 밀려 평창 쪽으로 퇴각하여야 했다. 중부 내륙의 농민군도 지평현감 출신 맹영재의 토벌대와 관군들에 의해 홍천 서석에서 수백 명이 목숨을 잃는 치열한 투쟁을 전개하고 내면 쪽으로 후퇴하였다. 강원도 농민군은 충청도, 경기도 쪽 농민군과도 연대하여 싸우려 하였으나 지방의 토호들이 이끄는 민보군, 관군, 일본군에 의하여 그 뜻을 이루지 못한 채 투쟁의 막을 내려야 했다.


  1894년 강원도 농민군은 패배했으나 투쟁의 경험과 정신은 1919년 ‘3.1운동’으로 이어졌다. 대표적인 사례가 홍천군 내촌면 물걸리 만세시위운동이다. 1919년 4월 3일, 강원도 홍천군 내촌면·화촌면·서석면·내면, 인제군 기린면의 5개면 주민 3천여 명은 동학을 계승한 천도교인들을 중심으로 만세 시위운동을 벌였다. 그 자리에서 8명이 일본군의 총에 맞아 희생당하였다. 해방 후 1946년 10월 전국에서 처음으로 1894년 동학농민혁명의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위령제를 연 곳도 홍천이었다.


  1894년, 개화파 정권이 농민들의 요구를 수렴하여 개혁을 완성하고, 농민군과 합력하여 침략 외세와 맞서 싸워도 승리를 가늠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조선의 지배세력은 자신들의 기득권과 특권을 유지하려고 오히려 일본군의 요구를 받아들였고, 일본군의 조종과 지원을 받으며, 침략 외세에 맞서 싸우려는 농민군을 진압하는 데 앞장섰다. 농민군은 침략자 일본군, 친일개화파 정권의 정부군, 각 지방의 보수 유생 토호 세력에 의해 10만 명 이상의 희생자를 남기며 패배했다.



▣ 복원된 강릉관아 전경 I 동학농민혁명 당시 농민군이 강릉관아, 임영관(臨瀛館)을 점령하고 폐정개혁을 실시했다



  1894년 동학농민군은 탐관오리·양반·토호들의 탄압과 경제적 수탈을 금지 하고, 노비제도를 폐지하여 신분상의 차별 대우를 없애고, 무명잡세를 폐지하고 고리대를 무효화하고, 친일분자를 처벌하고 미곡의 일본 유출을 금지하고, 양반과 정부의 지배체제를 비판하고 일본과 외세의 조선 침탈을 반대하며 싸웠다. 투쟁 과정과 동학 조직에서 농민군은 자신들이 꿈꾸던 세상을 미리 경험해 보기도 하였다. 충청도의 접주였던 홍종식은 투쟁의 과정에서 경험했던 농민군의 수평적 관계의 실체를 이렇게 증언했다.


“이 때에 있어서 제일 인심을 끈 것은

커다란 주의나 목적보다도 또는 조화나 장래의 영광보다도

당장의 실익 그것이었습니다.

첫째, 입도만 하면 사인여천이라는 주의 하에서

상하·귀천·남여·존비 할 것 없이

꼭꼭 맞절을 하고 경어를 쓰며 서로 존경하는 데서 모두 심열성복이 되었고,

둘째, 죽이고 밥이고 아침이고 저녁이고 도인이면

서로 도와주고 서로 먹으라는 데서 모두 집안 식구같이 일심단결이 되었습니다.

그때야말로 참말 천국천민들이었지요.”



▣ 기미만세상(己未萬歲像) | 강원도 홍천군 내촌면 물걸리



▣ 녹도 전적지(강원도 정선군) I 동학농민혁명 당시 1894년 11월 6일 정선에 모여 있던 농민군이 일본군 및 강원감영 병사들과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곳



  1894년 동학농민혁명에서 농민군은 생존권을 확보하여 먹고 살 걱정 없는 세상, 위아래 차별 없이 사람대접 받는 평등한 세상을 꿈꿨다. 그런 꿈을 상징적으로 요약할 수 있는 구호가 “밥이 하늘이다”, “사람이 하늘이다”였다. 지금도 절박한 생존권의 문제 앞에서 ‘밥이 하늘’이라고 외쳐야 하고, 사람 사이의 차별이 증폭되어 인간의 자존과 존엄이 짓밟히는 세상이라면 1894년 동학농민군이 외쳤던 ‘밥이 하늘인 세상’ ‘사람이 하늘인 세상’은 여전히 ‘지금 여기’의 꿈이다. 살기 위해서는 먹어야 하고 혼자로는 살 수 없으니까 사람들을 만나야 한다. 그러므로 행복의 요체는 좋은 사람들 만나 맛있게 잘 먹고 스스럼없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일상이다. 사람 사이에 차별 없이 평등하고, 입으로 먹을 식량 걱정 없는 상태가 단어 뜻대로 ‘평화(平和)’로운 상태이다. 이렇게 본다면 동학농민군의 추구하던 꿈은 행복하고 평화로운 세상이었다. 여전히 지금 여기서 우리가 만들어 가야할 꿈, ‘오래된 미래’이기도 하다.



  박준성 | 역사학연구소 연구원, 노동자교육센터 운영위원으로 활동하면서 한국근현대 민중항쟁과 노동운동 관련 연구에 힘을 기울이고 있다. 역사문제연구소 산하 ‘갑오농민전쟁백주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1989) 때부터 동학농민혁명 연구에 힘써왔으며, 저술로는 「박준성의 노동자 역사 이야기」, 「1894년 강원도 농민군의 활동과 반농민군의 대응」 등이 있다.



정기구독 신청

발행처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56149)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동학로 742

TEL. 063-530-9400 FAX. 063-538-2893

E-mail. 1894@1894.or.kr

COPYRIGHT THE DONGHAK PEASANT REVOLUTION FOUNDATION.

ALL RIGHTS RESERVED

2025년 겨울 62호
목차
目次 cont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