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소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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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가을 37호
일본 근현대사 최초 동학농민혁명 관련 기사 일본 아사히신문에 게재되다

  일본 역사학자로부터의 편지

  일본 근현대사 최초 동학농민혁명 관련 기사 일본 아사히신문에 게재되다



  2019년 1월 23일 일본에서 동학농민혁명재단으로 한 통의 편지가 도착했다. 발신자는 2006년부터 매년 한·일 역사연구를 위해 한국을 방문하여 ‘동학농민군의 발자취를 찾는 기행’팀의 나카츠카 아키라(中塚明) 나라여대 명예교수였다. 나카츠카 교수는 2006년부터 일본의 역사학자, 역사교사, 시민운동가 등으로 구성된 ‘동학농민군의 발자취를 찾는 기행팀’을 구성하여 13년 동안 매년 우리나라 전역에 분포한 동학농민혁명 전적지를 답사해왔다.


  “동학농민혁명은 조선 백성들이 자국의 국권 수호를 위해 일본군에 맞서 일어난 대사건임에도 불구하고 이 대사건을 작은 소요 정도로 치부하며 덮어버리려는 일본의 잘못된 역사인식을 두고 부끄럽고 부당한 처사”라고 나카츠카 교수는 말한다. 편지와 함께 동봉된 신문기사(사본)는 동학농민혁명 전적지 역사탐방에 참여한 적이 있는 죠마루 요이치(上丸洋一, 일본 아사히신문 기자)가 2019년 1월 15일부터 21일까지 총 다섯 차례에 걸쳐 동학농민혁명 관련 기사를 아사히신문(朝日新聞)에 게재한 내용이었다. 나카츠카 교수는 일본 최대 신문사가 동학농민혁명 관련 기사를 다룬 것은 일본 근대사 이래 최초의 일이라고 밝혔다.


한중(寒中) 문안인사 드립니다.

일본의 조일신문(朝日新聞, 아사히신문) 석간에

「동학농민전쟁을 찾아서」 라는 기사가 5회에 걸쳐 연재되었습니다.

작년 가을 「제13회 동학농민군의 전적을 찾아가는 여행」 에 참가한

조일신문(아시히신문)의 기자, 죠마루 요이치(上丸洋一)씨가 쓴 것입니다.

일본의 큰 신문에서 동학농민전쟁에 대해 정면으로 마주하며 쓴 기사는

일본 근대사상 처음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도움을 준 한국 여러분들에게도 전달 드리고 싶어 복사본을 만들어 보냅니다.

아직 추운 때입니다. 건강하시기를 기원합니다.


2019년 1월 23일

나카츠카 아키라(中塚明)


* 번역 | 박아영 동학농민혁명기념관 학예연구사 




▣ 나카츠라 아키라 교수가 보낸 편지


  아사히신문(朝日新聞)에 연재된 ‘동학농민전쟁을 찾아서’라는 기행문 형식의 기사는 그동안 일본이 역사적 사실을 은폐하고, 역사의 뒤안길에 암장(暗葬)하려는 불온한 의도를 정면으로 반박ㆍ비판하는 내용이다. 이 기사는 동학농민혁명의 봉기 배경, 주요 사상, 전투 양상 그리고 일본의 역사적 사실은폐 등으로 구성되었다. 기사 일부를 간추려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 동학농민혁명의 사상과 봉기 배경, 그리고 일본 역사학자의 사과


“동학농민전쟁은 나의 조부 세대에 일어났습니다. 그렇게 크게 오래된 일이 아닙니다.

3만 명이라고도얘기되는 조선 농민이 학살당했습니다.

일본인의 한 사람으로서 마음 깊이 사죄합니다.”

- 나카츠카 아키라(中塚明)


  동학농민혁명은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는 사상으로 당시 조선의 봉건적인 사회에서 모든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실현하고 일본의 침략과 지배에 대항하여 나라를 지키고자 하는 반외세 혁명이다. 하지만 이 사건은 그동안 민란(民亂) 또는 동학난(東學亂)으로 왜곡되어 왔다.


  동학농민혁명의 발자취를 찾아온 일본의 역사탐방팀은 충청남도 태안의 갑오동학혁명추모탑 앞에서 엄숙하게 묵도하였다. 함께 역사탐방에 참여했던 동학농민혁명유족회 문영식 이사는 “이 주변은 많은 농민의 시신이 흩어져 냇가가 피로 물들었다고 들었습니다.”고 전했다. 실제로 일본의 침탈에 맞서 국권을 수호하기 위해 죽창을 들고 일어난 동학농민군은 일본의 근대 신무기에 수만 명의 목숨이 희생되었다. 역사탐방팀을 이끌어온 나카츠카 교수는 동학농민군의 위령탑으로 가는 길목에서 동학농민군과 우리나라에 다음과 같이 사죄의 뜻을 전했다. “동학농민전쟁은 나의 조부 세대에 일어났습니다. 그렇게 크게 오래된 일이 아닙니다. 3만 명이라고도 불리는 조선 농민이 학살당했습니다. 일본인의 한 사람으로서 마음 깊이 사죄합니다.”



▣ 나카츠라 아키라(中塚明) 나라여대 명예교수_2017년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방문 당시 사진


  나카츠카 아키라(中塚明) | 나라여대 명예교수. 한일관계사, 청일전쟁과 동학농민혁명사 연구의 권위자. 일본학술회의 회원, 나라현 역사교육자협의회 회장 등을 역임하고 있다. 2006년 이후 일본인으로 구성된 ‘동학농민군의 발자취를 찾는 기행팀’을 구성하여 13회에 걸쳐 우리나라를 방문하였다. 전국의 동학농민혁명 전적지 탐방을 통해 동학농민군 학살에 대한 일본의 반성을 촉구해왔으며, 저서로는 『1894년, 경복궁을 점령하라』, 『동학농민전쟁과 일본 - 또 하나의 청일전쟁』 등이 있다.



  ● 동학농민군의 전투 양상 - 불살생(不殺生)의 정신



▣ 아사히신문(朝日新聞)에 게재된 동학농민혁명 관련 기사 (2019.1.15.~1.21)


  무참하게 살생을 자행한 일본군과 달리 동학농민군은 가능한 적을 죽이지 않는, 생명을 존중하는 모습이 여러 연구문헌을 통해 알 수 있다. 충청도 연산에서 농민군의 전투 모습을 일본 「동학당토멸대대」(후비보병 독립 제19대대) 대장, 미나미 고시로(南小四郞)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정오, 병사가 출발하려는 순간, 전면의 산에 검은 옷을 입은 수천의 적이 수백의 기를 나부끼며 나타났다. 잠시 후에 주위의 산은 순간 백의의 병사로 빼곡했다. 농민군은 적어도 3만 이상은 되어 보였다.” -미나미 고시로(南小四郞) 「동학당정토약기」


  위의 상황은 동학농민군이 일본군을 시각적으로 위협하여 상대를 죽이지 않고 쫓아내려고 한 것으로 보인다. 또 일본의 동학농민혁명을 연구한 이노우에 가츠오(井上勝生, 일본 북해도대학 명예교수)의 「메이지 일본의 식민지배」라는 저서에서 “660명의 동학당토멸대대는 1894년 11월 파병되어 이듬해 2월 작전종료까지의 기간 동안 기록상 겨우 병사자를 제외하고는 1명의 전사자를 냈을 뿐이다.”고 밝히고 있다. 



  ● 일본군의 전투 양상 – “모조리 살육하라”


  일본군은 동학농민군을 어떻게 살생했을까?


 ❍ 1894년 12월 3일 : 마을로부터 다음 마을까지 6리의 거리, 먼저 간 다른 부대에 의해 민가 수 백호가 태워졌다. 많은 사체가 길가에 나뒹굴고 있으며, 개나 새가 먹고 있다.

 ❍ 1895년 1월 2일 : 밤, 동학농민 5명을 체포해 왔다. 고문의 끝, 총살, 사체는 태웠다. 

 ❍ 1895년 1월 12일 : 해안을 따라 전진. 적의 잔당 11명을 체포해 죽였다. 다른 3명은 몸과 옷에 불이 붙은 채로 도망가 최후에는 바다에 뛰어들어 죽었다. 

 ❍ 1895년 1월 31일 : 농민군 잔당 7명을 체포해서 밭에 일렬로 세우고, 총에 검을 붙여 일제히 찔러 죽였다. 보고 있던 조선 정부군 병사는 경악했다.


  위의 내용은 2012년 이노우에 가츠오 교수가 동학농민혁명 당시 전투에 참가했던 일본군 병사 중 도쿠시마현 출신 병사가 쓴 종군일지를 찾아 공개한 일기이다. 일본의 동학당토멸대대(후비보병 독립 제19대대)는 시코쿠 4개의 현에서 병사를 소집하여 구성되었다. 토멸대대의 파견에 따른 육군참모차장 가와카미 소로쿠(川上操六)는 전선(電線)으로 이렇게 명령했다. “동학당에 대해 처벌은 열렬히 할 것을 요함. 향후 모조리 살육할 것” - 「일청전쟁과 조선」, 박종근  



  ●  동학 농민군 지도자 유골- 일본 훗카이도대학 연구실에서 발견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한·일 교류 연구는 빛바랜 신문 뭉치에 쌓인 사람의 두골 6기가 골판지 상자에 담겨 1995년 홋카이도 대학 연구실에서 발견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6기 머리뼈 중 1구의 유골의 표면에 “한국 동학당 수괴”의 수급라는 문구가 쓰여 있었고, 1906년 일본인 사토 마사지로가 ‘전남 진도에서 채집’하여 일본으로 무단 반출했다는 문서가 첨부되어 있었다. 동학농민군 지도자 유골에 대한 연구에 참여했던 이노우에 교수는 “일본은 1895년 1월, 동학농민군을 조선남서부 진도로 몰아넣고 토벌했다. 그런데 공식 전사(戰史) 「메이지 27, 8년 일청전사」 전 8권은 3만 명 이상의 조선 민중이 전사한 동학농민전쟁에 대해 어째서인지 거의 기술하지 않았다. 제8권에 겨우 3쪽 분량 「폭도진정(暴徒鎭定)」의 경과가 기록되어 있는 정도이다.”고 밝혔다.

-이노우에 가츠오(井上勝生), 「메이지 일본의 식민지 지배」



  ●  양심 있는 일본인들의 반성 



 

“우리가 한국을 방문한 것은 한국뿐만이 아닌 일본을 알기 위해서이기도 합니다.”

- 나카츠카 아키라(中塚明)


  일본 내에서도 잔혹한 일본역사를 반성을 촉구하는 목소리들이 있다. 역사탐방을 지속적으로 해오고 있는 나카츠카 교수는 “우리가 한국을 방문한 것은 한국 뿐 만이 아닌 일본을 알기 위해서이기도 합니다.”고 전했다. 일본의 역사 왜곡을 밝히고 반성하는 것이 일본뿐 아니라 동아시아 평화를 위하는 길이라고 생각하는 나카츠라 교수는 「역사의 위조를 바로잡다」라는 저서를 내기도 했다. 2006년을 시작으로 13년 동안 매년 실시된 일본 역사탐방의 참여자는 3백여 명에 달한다. 2019년 역사탐방을 마치면서 89세인 역사가 나카츠라 교수는 “13회 동안 계속해 오면서 그만둘 수 없었습니다. 건강이 허락하는 한 내년에도 계속할 것입니다. 부디 꼭 참가해 주십시오.”라고 참여자들에게 인사말을 남겼고 참여자들은 박수로 화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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