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곁의 동학농민군 이야기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유족 증언록 특별전
기획 | 기념재단 연구조사부 정명광
일러스트|허인석

▣ 전시실 입구
지난 6월 24일 동학농민혁명기념관 기획전시실에서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유족 증언록 특별전】 “우리 곁의 동학농민군 이야기”라는 주제로 기획특별전을 개막하였다. 2004년 『동학농민혁명참여자등의명예회복에관한특별법』이 제정되고, 특별법에 따라 동학농민혁명참여자명예회복 심의위원회에서 2004년부터 2009년까지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3,644명, 유족 10,567명을 등록하였다. 이번 전시는 조사과정에서 새롭게 확인된 동학농민군들의 활동내용을 중심으로 1차 사료, 재단 및 유족회에서 제작한 유족 증언록 등의 내용을 추가하여 스토리텔링 기법을 통해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와 그 유족들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를 한 편의 동화처럼 그려냈다. 전시구성은 총 4부로 삶과 죽음, 남겨진 편지, 그날의 기억, 다시 피어나는 희망 등으로 구성되었다. 동학농민혁명이라는 역사적 순간에 이름을 남기지도 못하고 스러져 가야했던 많은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들을 돌아보고, 그동안 자랑스러운 선조들을 그저 가슴속에만 품으며 고난의 세월을 묵묵히 견뎌야만 했던 유족들의 아픔을기억하며,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위해 목숨을 바친 그들의 슬프지만 아름다운 동화를 소주제별로 소개하였다.



▣ 전시실 내부

1부|삶과 죽음
1894년 갑오년, 새로운 세상을 꿈꾸며 굴곡진 역사 속으로 뛰어들었던 동학농민군은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들어야만 했습니다. 생사를 가르는 운명의 순간, 그 시간 속에 그들이 있었습니다.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보낸 16년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한다고 집을 나선 남편 김우백. 그러나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한 대가는 참으로 컸습니다.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붙잡히고 맙니다. 여러 달 동안 옥살이를 하면서 가혹한 형벌을 받고 죽을 지경에 이르자 겨우 방면이 됩니다. 극진히 간호하면 금방 일어설 수 있을 거라는 기대와 달리 김우백은 16년 동안이나 병석에 누워 있었습니다. 박씨 부인은 사경을 헤매는 남편을 지극정성으로 돌봤지만 이러한 정성을 뒤로하고 김우백은 결국 16년 만에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남편이 세상을 떠난 뒤에도 박씨 부인은 어린 두 아들을 잘 길러내고 시부모에게도 효성을 다합니다. 그런 그녀의 지극한 효열은 보수적인 무안향교와 지역의 어른들을 움직였습니다. 무안 향교는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했던 김우백의 부인을 열녀로 포양하게 됩니다. 김우백은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생사를 가늠할 수 없는 세월을 16년 동안이나 보냈습니다. 그가 16년 동안 ‘삶’ 속에 있었던 건 박씨 부인이 있었기 때문 아닐까요?

▲ 동학농민군 김우백 관련 경통 1912년 57.4 × 90.5cm 동학농민혁명기념관_김정완 기증|1912년 무안향교에서 무안 박씨를 포양(褒揚)하기 위해 지역 유림들에게 보낸 통문이다.

2부|남겨진 편지
고향, 집, 가족도 뒤로 한 채 역사의 소용돌이 속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던 많은 동학농민군들. 그런 그들에게는 그리움, 걱정, 원망, 기대, 기원, 존경, 근심 등 수많은 단어들로 가슴을 채우고 한없이 기다리던 가족이 있었습니다. 1894년이 끝나갈 때 즈음 동생에게 보낸 편지에는 동학농민군들의 비장한 각오와 삶에 대한 절박함이 담겨있었습니다.
하늘을 이불 삼고 땅을 자리 삼고...
1894년 늦은 가을, 전라도 나주에 사는 유광팔에게 도착한 한 통의 편지. 편지는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만들겠다며 집을 떠난 형이 보낸 것이었습니다. 형은 효성이 지극해 부모를 봉양하는데 온 힘을 다했습니다. 학문에도 정진해 문장가로 이름도 날렸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형은 모든 것을 훌훌 털어버리고 홀연히 집을 떠났습니다. 당시 조선의 현실은 참담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늘 세상이 올바른 방향으로 흘러가기를 바랐던 강직한 형. 1894년 형 유광화는 그렇게 동학농민혁명이라는 거대한 역사의 소용돌이 속으로 걸어 들어갔습니다.
“번거로운 인사말은 접어두고 동생 광팔 보시게
나라의 근심과 재난은 백성이 근심할 바이므로 내가 수년 동안 집을 나와 머무른 것이네.
집안일을 돌아보지 못하게 되어 자식의 도리를 못하고 있는데 자네가 형 대신 집안을 돌보고 있으니 다행이라 하겠네. 왜군과 함께 여러 날을 싸우는 것은 보은을 입었기 때문이네.
그러나 형세가 극히 어려워진 까닭에 하늘을 이불 삼고 땅을 자리 삼는 고초가 가히 형용할 수가 없네. 전날에 보내준 얼마간의 재물은 요긴하게 썼는데 최근의 형편이 전보다 몹시 심해진 고로 다시 돈과 비단을 청하네. 이 소식을 잘 살펴 급히 재물을 보내주게.
죽고 사는 것은 나라의 운명과 함께 하길 바라고 또 바랄뿐이네.
뒷일은 자네에게 부탁하겠네. 예를 갖추지도 못했네.
갑오년 늦가을 형 광화 보냄.”

▲ 동학농민군 유광화 편지 1894년 29 × 24cm 동학농민혁명기념관_김순덕 기증|1894년 동학농민군 유광화가 고향에 있는 동생 유광팔에게 보낸 편지이다.

3부|그날의 기억
1894년 그날, 들불처럼 일어났던 조선의 동학농민군들.
“옳지, 하늘이 어찌 무심하랴. 이놈의 세상은 망하고 새 세상이 나와야 한다.” 사람답게 사는 세상에 대한 순수한 열망으로 시작되었지만 누군가는 아버지를, 자식을, 소중한 가족을 잃어야만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소중한 누군가를 잃었다고 말할 수조차 없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기억합니다. 새로운 세상을 위해 스러져간 용감했던 당신을... 그날을 기억합니다. 당신을 잃어야했던 1894년 어느 날을...
고갯마루를 자작자작 적신 동학농민군의 피
홍천에는 ‘자작고개’가 있는데 동학농민혁명 당시 전투가 어찌나 치열했던지 그날 쓰러져간 동학농민군들이 흘린 피가 고갯마루를 자작자작 적실 정도로 흥건했다고 하여 자작고개라 불린다고 합니다. 최주호의 할아버지 최도열은 강원도 홍천에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해 10월 23일 홍천 서석 전투에서 희생되었습니다. 그 와중에 최도열 집안의 남자들은 어린아이 셋만 남기고 거의 다 희생되고 말았습니다.
- 동학농민군 최도열의 손자 최주호 증언

4부|다시 피어나는 희망
1894년 그해, 우리는 수많은 희생을 치러야 했습니다. 하지만 추운 겨울이 가면 새봄이 오고 노랑나비가 날아오듯이 그 혹독하고 추운 겨울은 새로운 봄을 위한 시련이었습니다. 추웠던 그해 겨울은 그렇게 새로운 희망을 품고 있었습니다.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는 노랑나비가 되어...
1894년 겨울 이씨 부인은 첫째 아들 교민, 둘째 아들 교식, 셋째 아들 교섭을 데리고 시가로 떠납니다. 그때는 그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시가와 친정, 친척집을 번갈아 찾아다니는 세월이 길어질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이씨 부인의 남편 김영원은 1889년 동학에 입도해 1894년 3월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했습니다. 같은 해 7월에는 도집강 최승우를 도와 폐정개혁에 힘쓰다가 11월 남원성 싸움에서 패전하고 관군에 쫓겨 산 깊숙이 숨어 6년간을 지내야 했습니다. 남편이 회문산 산속에서 관군의 눈을 피해 숨어있는 동안 이씨 부인은 세 아들을 혼자서 기르고 지켜야 했습니다.

▣ 동학농민군 김영원 접주 임명장 1894년 25.5 × 41.5cm 김창식 소장|1894년 동학교단에서 김병원(김영원의 다른 이름)을 접주로 임명하는 임명장
※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유족 증언록 특별전】 “우리 곁의 동학농민군 이야기”에 도움 주신 분
김우백의 증손자 김정완, 임대현의 손자 임천근, 유광화의 손자 유길홍, 한달문의 손자 한우회, 가병수의 고손자 가순옥, 고순택의 손자 고재호, 김복환·김진환의 손자 김국태, 김학두의 증손자 김종원, 윤치문의 증손자 윤영식, 이기학의 손자 이득만, 최도열의 손자 최주호, 최원국의 손자 최병관, 최윤주의 손자 최병두, 황종모의 증손자 황금고, 곽윤중의 손자 곽사호, 김영원의 손자 김정갑·증손자 김창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