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옥마을의 명물, 동학혁명100주년기념관
동학혁명100주년기념관 관장 이윤영

문) 이윤영 관장님 안녕하십니까? 본인의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답) 안녕하십니까? 저는 전임 관장이셨던 표영삼 선생님의 뒤를 이어 4년 전인 2011년부터 동학혁명100주년기념관 관장을 맡고 있는 이윤영입니다.
문) 관장님께서는 동학, 동학농민혁명과 어떤 인연이 있으십니까?
답) 저는 김제 원평의 전통유학가문에서 태어나 엄격한 교육을 받으며 자랐습니다. 또한 어머님의 영향으로 불교, 원불교 법당에 따라다니기도 했고 저의 고향이 증산도의 성지였기에 주변 사람들을 통해 이를 접하는 등 어려서부터 여러 종교를 경험했습니다.
군대를 제대한 이후 한동안 방황기를 거칠 때가 있었는데, 그 당시 종교에 귀의해 볼 것을 제의받고 천도교(동학)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천도교(동학)에 입도한 후 부안의 박기중 종법사님에게 수련을 받았으며 이후 표영삼 선생님을 찾아가 동학과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역사를 배웠습니다. 그리고 동학농민혁명 100주년이 되었던 1994년에 동학농민혁명을 전공하신 교수님들과 함께 동단협(동학농민혁명관련단체협의회)에서 활동하며 교류하게 되었고, 그 영향으로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학술적 접근을 시작했습니다.
문) 동학혁명100주년기념관은 어떻게 설립되었습니까?
답) 동학농민혁명이 100주년을 맞이하기 1년 전인 1993년, 천도교(동학)에서 동학농민혁명을 기념하기 위해 국가에 지원금을 요청하는 동시에 교도들의 성금을 모집했습니다. 이 두 가지 일은 모두 순조롭게 진행되었고, 천도교(동학)에서는 서울시 종로구에 위치한 대교당과 수운회관 근처에 동학혁명기념관 설립을 계획했습니다. 그러나 기초공사를 하던 중 지하수맥문제로 기존건물이 위험하다는 진단을 받아 공사가 무산되고 말았습니다. 이에 천도교(동학)에서는 기념관을 설립할 새로운 후보지역을 물색했고 당시 전주교구로 활용하기 위해 2년 전부터 땅을 매입해 두었던 한옥마을과 우금티 전적지, 그리고 황토현 전적지가 후보지로 거론되었습니다. 이중 논의를 통해 현재의 위치인 한옥마을에 설립하는 것으로 최종 결정되었고, 1994년 말 공사가 시작되어 1995년 5월 31일 동학농민혁명군의 전주 입성일에 맞춰 동학혁명100주년기념관이 개관되었습니다.
문) 동학혁명100주년기념관의 전시품은 어떻게 구성되었습니까?
답) 현재 동학혁명100주년기념관은 5개의 주제별로 구역이 나뉘어 있습니다. 그 중 제1실은 ‘새로운 세상’이라는 주제로 천도교의 창도에서부터 교조신원운동까지 내용을 다루고 있으며, 당시 실생활 유물들을 함께 전시하고 있습니다.
제2실은 ‘혁명의 불꽃’으로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전체적인 역사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 시작부터 우금티 전투, 최후의 항쟁을 거쳐 지도자들의 피체와 사형되는 과정까지 내용을 담았습니다. 저희 기념관에 전시된 내용 중 약간 독특한 점은 동학농민혁명이 마무리된 시점을 동학의 2대 교주인 최시형 교주님이 사형된 때로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최시형 교주님께서는 동학농민혁명의 지도자로서 청산기포 당시 직접 동학농민군의 출병을 명령하기도 하셨으며, 체포이후에는 다른 지도자분들과 같은 죄목을 선고 받고 사형당하셨습니다. 즉 최시형 교주님을 마지막으로 처형된 동학농민혁명 지도자로 보고 그분이 사형 당하심으로서 동학농민혁명이 마무리된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3실의 주제는 ‘좌절은 넘어’로 동학농민혁명이 단순히 실패로 끝난 것이 아니라 그 정신은 계속해서 이어져갔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독립선언문에 서명했던 민족대표 33인 중 천도교(동학) 소속이 15명이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러나 천도교(동학) 소속 15명 중 7명이 동학농민혁명 당시 접주로서 동학농민혁명군을 이끌었던 분들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렇게 동학농민혁명은 일제강점기 이후 3.1운동, 항일의병활동으로 꾸준히 그 정신을 이어나갔던 것입니다. 또한 천도교(동학)에서 일제의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개벽, 어린이지 등을 꾸준히 발행하여 문화운동을 주도한 사실들을 밝히고 있습니다.
다음으로 4실은 ‘희망의 꿈들’이라는 주제로 해방 이후 남북 분단저지운동과 4.19혁명, 5.18민주항쟁 등 동학농민혁명 정신을 계승한 사건들에 대한 내용을 담았습니다. 그리고 어린이와 청소년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동학농민혁명사 전체를 요약한 연표를 마지막에 배치했습니다.
제5실은 영상실로 동학농민혁명 관련 영상을 시청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두었습니다. 그리고 기념관 출구 앞에는 현재까지 조사된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3644분의 명단을 전시해두었습니다. 아직 역사에 묻혀 밝혀지지 부분이 많지만 이곳을 방문하시는 분들이 동학농민혁명과 근현대사의 전체적인 흐름을 손쉽게 이해하실 수 있도록 배려했습니다.
문) 동학혁명100주년기념관을 개장한 지 오랜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 동안 많은 일들이 있었을 텐데 특별히 기억에 남는 일이 있으십니까?
답) 기념관이 처음 건립되었을 당시만 해도 전주한옥마을은 도심 속의 오지였습니다. 그로 인해 방문객도 거의 없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사람들이 많이 방문하지 않는 문화시설물을 찾아 홍보하는 프로그램에서 이곳을 찾아와 촬영을 하고 싶다고 부탁했던 일이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황당한 일이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재미있는 추억이 된 것 같습니다.
최근에는 주말에 2~3천 명 연휴에는 5~6천 명 가량의 방문객 분들이 이곳을 방문해주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번 5월 석가탄신일이 끼어있던 연휴 중에는 기념관 개관 이후 처음으로 하루 방문객 숫자가 1만 명을 넘어서는 쾌거를 기록했습니다. 이처럼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가지고 방문해주신 것이 앞으로도 잊지 못할 기억으로 남을 것 같습니다.
문) 그간 기념관을 운영해오시면서 어려운 점이 있으셨다면 무엇을 꼽고 싶으십니까?
답) 어디나 마찬가지겠지만 역시 재정적 지원이 부족한 점을 꼽고 싶습니다. 학예사를 고용할 비용도 없어서 제가 관장과 동시에 학예사의 역할도 함께 하고 있을 정도입니다. 자문위원회 등 꼭 필요한 회의도 비용이 부담되어 자주 개최하지 못하고 있으며 무엇보다 전시자료의 구입이 어렵다는 점이 매우 아쉽습니다.
문) 동학혁명100주년기념관은 지난해 여름에 리모델링을 통해 재개관되었는데, 당시 어떤 변화가 있었습니까?
답) 저희 기념관은 처음 부지를 구입할 당시부터 천도교(동학) 전주교구로 활용할 계획이었기에 리모델링 전까지는 1층을 교구로, 2층을 기념관으로 활용해왔습니다. 그러나 2층에 위치한 기념관은 접근성도 부족했을 뿐더러, 1층만 둘러보고 가시는 방문객 분들이 많다는 문제점이 있었습니다. 이런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1층의 교구를 2층으로 올리고 기념관을 1층으로 옮겼으며, 전시물도 자세한 이해를 도울 수 있도록 여러 주제별로 세분화하여 내용을 정리했습니다.
문)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에 바라는 점이 있으십니까?
답) 동학농민혁명 관련단체 전부가 참여할 수 있는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조사활동이 진행되었으면 합니다. 이후 국가기념일이 제정되고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후손에 대한 완벽한 명예회복이 이루어진다면 그 분들의 보훈혜택에 확실한 기준이 필요할 것입니다. 또한 기념재단이 전국 기념사업단체에 대한 중심 본부로서 모두가 하나로 뭉칠 수 있는 기준이 되어 주기를 바랍니다.
문)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십니까?
답) 제가 약 30년간 여러모로 연구해왔던 동학, 동학농민혁명에 내용을 천도교(동학) 기관지인 신인간에 ‘동학비사’라는 제목으로 연재를 시작할 것이며 또한 책으로 출판할 계획입니다. 무엇보다 객관적인 사실에 의한 역사에 의거해 연재 및 출판해볼 계획이니 기대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