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의 동학농민혁명 유적지 - 2

완산칠봉 장군봉 팔각정
덕진공원 - 김개남 장군 추모비, 손화중 장군 추모비, 전봉준 선생상
전주시 덕진구에 위치한 덕진공원은 드넓은 호수를 안고 있는 시민공원으로, 전주의 명소를 꼽을 때 빠지지 않는 곳이다. 여름이면 만발한 연꽃이 지천으로 피어나 장관을 이루는 중앙의 호수는 옛 전주 땅인 완산부를 도읍으로 정한 후백제의 왕 견훤이 풍수지리를 따라 땅을 파고 물을 끌어들여 만들었다는 설과 고려시대에 자연히 이루어진 것이라는 두 가지의 기원설이 존재하고 있다.
이곳이 동학농민혁명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전주를 대표하는 공원이라는 입지로 인해 많은 조형물들이 들어서 있으며, 그 중에 정문으로 들어서서 오른쪽으로 시선을 향하면 커다란 바위가 올려져 있는 비석 두 개와 단상위에 위풍당당히 서 있는 청동상이 한 구역에 설치된 것을 볼 수 있다. 이 조형물들은 각각 동학농민혁명의 삼대 지도자인 김개남, 손화중, 전봉준 장군을 추념하는 것이다.
전봉준 장군을 기념하는 ‘전봉준선생상’은 동학농민혁명과 관련하여 전주에 최초로 세워진 기념조형물이라는데 의미가 있다. 1981년 10월에 전주청년회의소와 풍남청년회의소에서 건립했으며, 보국안민이라는 글귀가 한글로 음각되어 있는 기단 위에 전봉준 장군의 전신상이 서있는 형태이다. 청동으로 제작된 전봉준 장군의 전신상은 머리에 패랭이를 쓰고 높이 치켜든 한 손에 사발통문으로 보이는 종이뭉치를 움켜쥐고 있다. 그러나 청동상의 얼굴이 실제 전봉준 장군과는 거리가 먼 형태를 하고 있어 정확한 고증을 거치지 않고 제작되었다는 혹평을 듣고 있기도 하다.
전봉준선생상의 근처에는 머리 위에 사이좋게 바위를 하나씩 얹고 있는 비석 두 개를 볼 수 있는데, 이 바위에 ‘개남아 개남아 김개남아’라는 글귀가 새겨진 것은 김개남장군추모비이며, 바위에 ‘사람이 한울이다’, 중단부에 ‘보국안민 척양척왜’가 새겨진 것은 손화중장군추모비이다. 김개남장군추모비는 1993년 5월 30일에 <김개남장군을 추모하는 사람들>이, 손화중장군추모비는 1998년 11월 7일 <손화중장군을 추모하는 사람들>이 동학농민혁명군의 뜻을 기억하고 계승한다는 의미로 각각 세웠다고 한다.
이처럼 동학농민혁명의 삼대 지도자를 추모하는 기념물들이 한 장소에 모여 있는 경우는 드문 것이며, 덕진공원에 세워져 있다는 점에서 여름철에 방문한다면 호수 가득 피어있는 연꽃도 감상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김개남장군 추모비, 손화중장군 추모비
완산칠봉 전투지

완산칠봉(외칠봉)
완산칠봉은 내칠봉과 외칠봉으로 나누어진 봉우리의 군집을 일컫는다. 내칠봉은 장군봉, 옥녀봉, 무학봉, 백운봉, 용두봉, 탄금봉, 매화봉으로, 외칠봉은 장군봉, 검무봉, 선인봉, 모란봉, 금사봉, 매화봉, 도화봉으로 이루어져 있다.
동학농민혁명군이 전주성을 점령한 바로 다음날인 4월 28일 홍계훈의 관군이 전주에 도착했다. 홍계훈은 도착과 동시에 전주성을 공격하기 위해 풍남문과 직선상에 위치하고 있는 내칠봉에 진을 친 것으로 보인다. 완산칠봉은 최고해발 186m인 낮은 산이지만, 전주성이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전략적 요충지였기 때문이다. 이날부터 5월 8일까지 전주성을 수성하는 농민군과 탈환하려는 관군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연이어 벌어졌다.
전주성을 둘러싼 관군과 농민군의 첫 전투는 4월 28일 저녁 6시경 일어났다. 관군 측에서 먼저 전주성 안으로 대포 3발을 발사하였고, 이를 효시로 관군과 농민군 사이에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되었다. 선공을 당한 농민군은 남문과 서문을 통해 성을 나와 완산으로 진격했으며, 성벽 위의 농민군들은 일제히 관군을 향해 포를 발사했다. 농민군은 사력을 다해 전투를 벌였으나 유리한 위치를 차지한 관군을 상대로는 역부족이었다. 패배한 농민군이 성안으로 후퇴하자 홍계훈은 10여명의 부하들과 함께 완산에서 내려와 풍남문을 향해 연거푸 대포를 발사했다. 그러나 성문이 견고해 파괴되지 않았다. 이때 홍계훈이 발사한 대포 중 일부는 전주성 안으로 떨어져 경기전에 손상을 입히기도 했다. 전주성에서의 첫 전투에서 농민군은 30여명이 사망하고 100여명이 체포되는 상당한 손실을 입었다.
다음날인 29일에는 농민군이 먼저 북문으로 나와 황학대를 공격했으나 경군의 포격에 많은 희생자를 내고 성으로 다시 물러났다. 두 번의 패배를 겪은 농민군은 30일에는 경군의 도발에도 전투를 벌이지 않고 전열을 가다듬었다.
전열을 가다듬은 농민군들은 5월 1일 남문을 개방하고 공격했으나 경군의 포격에 마찬가지로 300여명의 희생자를 내며 패배하였다.
2일에도 경군은 전주성에 포격을 가했고 이번에는 농민군들이 서문을 통해 용머리고개를 공격했지만 역시 100여명의 희생자를 내고 후퇴했다. 기세가 오른 관군은 성 안으로 여러 차례 포격을 가했으며 농민군들은 포탄을 피해 지붕이나 마루 아래로 숨는 것밖에 방법이 없었다.
그리고 다음날인 3일, 마침내 전주성을 중심으로 한 농민군과 관군의 최대 격전이 벌어졌다. 농민군들은 결전의 의지로 서문과 북문에서부터 유연대를 공격했다. 농민군의 대대적인 공격을 받은 유연대의 관군들은 남쪽으로 후퇴했다. 농민군은 이들의 뒤를 쫓으며 기세를 몰아 다가산, 용머리고개를 점령하고 경군의 본영을 목전에 두었으나, 본영으로부터 집중적인 포격을 받게 되어 용장 김순명, 아기장수 이복용 등 500여명의 전사자를 내고 성으로 후퇴했다. 전봉준 장군도 이 전투에서 허벅지에 총탄을 맞는 부상을 입었다. 오전 10시에 시작된 전투가 오후 6시경에야 끝났다는 것에서 얼마나 치열한 공방전이 이어졌는지 알 수 있다.
연이은 패전에 농민군은 전력에 큰 손실을 입었고 사기 또한 저하되어 이후로는 전투가 벌어지지 않았다. 심지어는 농민군 사이에 전봉준 장군을 결박해 관군에 바치고 목숨을 보존하자는 주장까지 나왔다고 한다. 이런 동요는 전봉준 장군이 직접 나서 “나의 말을 따라 다들 사지에 들어왔는데 어찌 조금 더 참지 못하느냐”고 언급하며 겨우 잠재울 수 있었으나 고립된 농민군의 상황은 점점 좋지 못한 쪽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전라감영 터

전라감영터
전라감영은 동학농민혁명 당시 동학농민군 대도소가 설치되었던 곳이다. 현재는 전라북도 기념물 제 107호로 지정돼있다.
농민군과 관군과의 전투는 5월 3일까지 이어진 이후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그러던 중 홍계훈은 정부에서 동학농민군의 토벌을 위해 청군에 도움을 요청하였으며 청군이 조선에 들어온 것을 이유로 일본군 또한 군대를 파견했음을 알게 된다. 일본의 움직임은 조정이 바라던 바가 아니었기에 이들을 돌려보낼 필요가 있었고, 이를 위해서는 일본군이 핑계로 사용한 청군의 파견을 물릴 필요가 있었다. 결국 조정은 청군에게 도움을 요청하게 된 원인인 동학농민혁명군을 해산시켜야만 했고, 그들의 주장을 일부 수용하여 화약을 맺자는 결론을 냈다.
농민군들은 국가가 위기에 봉착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관군의 화약제의에 동의하여 5월 8일에 전주화약(全州和約)을 맺고 전주성을 나와 해산하였다.
전주화약을 통해 관군 측에서는 농민군이 전주성에서 철수하는 것을 조건으로 농민군 측에서 제시한 폐정개혁안의 27개 조항을 국왕에게 보고할 것을 약속했다. 폐정개혁 27개 조항은 탐관오리의 처벌과 제거, 삼정의 개선, 대원군의 국정 참여, 외국상인의 불법 상업 활동 금지 등 당대의 총체적인 정지⋅사회⋅경제의 모순철폐를 주장하였다.
전주성에서 물러난 동학농민혁명군은 각 고을의 행정권을 장악하고 집강소를 설치했다. 집강소는 자치적인 행정과 폐정개혁활동을 수행한 기관으로 현재 지방자치제도의 원형이라 할 수 있다.
전주에는 전라감사 김학진의 집무실인 전라감영의 선화당을 집강소로 운영하여 전라도 일대의 행정을 장악했다. 민중자치를 실현했던 집강소 중에서도 관과 민이 함께 영향을 주고 받으며 합리적인 지역통치를 실행하고자 했던 전라감영의 선화당의 의미는 매우 큰 것이라 할 수 있다.
전라감영의 위치는 옛 전북도청의 자리이며 현재는 이를 복원하기 위한 논의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1951년 화재로 인해 선화당이 소실된 이후 1996년에 처음으로 복원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졌으며, 이후로 계속적인 간담회와 심포지엄, 토론회 등을 통해 복원 여부에 대해 많은 의견이 제시되었다. 전라북도에서는 전주감영을 비롯하여 전주 4대문의 복원사업을 추진하고자 계획 중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