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원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를 찾아서
일 시: 2018년 2월 14일(수) 10:30
장 소: 남원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사무실
대 담: 정수영 | 남원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회장

문) 이번호 『녹두꽃』 지역대담에는 전북 남원에서 활동하고 있는 남원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정수영 회장님을 모셨습니다. 먼저, 녹두꽃 독자들을 위해 회장님 자기소개와 함께 근황에 대해 말씀해주십시오.
답) 반갑습니다 남원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정수영입니다. 부족한 제가 기념사업회 회장으로서 중책을 맡은 지 벌써 한해가 되었습니다. 중학교 은사님이자 우리 초대 남원기념사업회 회장님이신 한병옥 선생님을 모시고 기념사업회 창립을 준비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십여 년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남원 기념사업회 창립 초창기 때부터 심부름을 하다가 회장이라는 중책까지 맡게 되어 어깨가 많이 무겁습니다.

문) 남원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가 2004년에 창립되었지요? 한병옥 선생님이 창립준비는 물론이고 초대 회장을 맡은 이후 근 10년 가까이 애쓰신 것으로 아는데, 남원기념사업회의 창립 배경 혹은 그 연혁 등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답) 동학농민혁명참여자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공포된 2004년 5월에 창립했으니 벌써 13년이 되었습니다. 남원지역 동학조직을 체계화한 대접주 김홍기의 증손 김동규 선생님 등등 몇 분이 기념사업회를 조직하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 과정에서 남원지역 시민사회단체인 경실련에 몸담고 계시던 한병옥 위원장님을 찾아갔지요. 그렇게 해서 불모지인 이곳 남원에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가 창립되기에 이르렀고, 한병옥 선생님께서 초창기 8년동안 조직을 애지중지 키워오셨습니다. 그 뒤를 이어 황의동 회장님이 4년, 그리고 제가 회장을 맡아 1년째 이어오고 있습니다.
문) 남원지역에는 1860년대 초 동학(東學) 창도 초창기 역사와 1894년 동학농민혁명 시기 김개남 장군의 활동의 본거지로서 갖는 의미를 찾을 수 있는데 어떻습니까?
답) 말씀하신 것과 같이 수운 최제우 선생은 1861년 12월 교룡산성에 있는 선국사 암자인 덕밀암에서 6개월 간 체류하였습니다. 그곳을 은적암이라 이름 짓고 그곳에 머물며 동학의 경전인 동경대전과 용담유사의 중심이 되는 내용을 상당부분 저술하였습니다. 주목할 만한 것은 은적암에서 저술한 『논학문』을 통해 ‘동학’이라는 용어를 최초로 기술하였다는 점입니다. 이후 남원을 거점으로 하는 포교활동이 꾸준히 이어져 1890년대에는 남원지역에 동학이 완전히 정착되었습니다. 호남 동학의 근원이었던 남원은 동학이라는 사상과 농민들의 혁명이 공존했던 지역이며, 김개남 장군의 근거지로서 전라좌도 동학농민군 활동의 근거지이기도 합니다.
문) 남원기념사업회 활동에 참여자 후손분들도 적극적으로 함께하고 있지요?
답) 김개남 장군과 함께 남원을 점령한 김홍기 대접주의 후손 김동규 선생님, 전라좌도를 대표한 류태홍 접주의 후손 류윤근 선생님 두 분이 기념사업회 창립 초창기부터 적극적으로 함께해왔습니다. 다행스럽게 김동규 선생께서 수십 년간 보존해온 ‘남원군종리원사 부동학사’, ‘순교약력’ 등을 통해 남원지역 동학농민혁명의 윤곽을 파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남원지역의 대접주였던 김홍기 선생의 묘가 임실군에 있는 관계로 아직까지 표지석을 세우지 못하고 있습니다. 남원시 예산으로 행정구역이 다른 임실에 기념시설물을 설치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올해는 어떻게 해서든지 김홍기 대접주 묘가 있는 임실에 표지석을 세우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문) 남원지역 동학농민혁명을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김개남 장군입니다. 동학농민군이 전주성을 함락시킨 후 전주화약을 체결하고 성 밖으로 나와 집강소를 설치하고 활동하던 시기인 6월 12일경부터 김개남 장군은 순창과 지금의 전남지역인 옥과·담양·동복·낙안·순천·곡성 등을 순회하면서 세력을 확장한 후 6월 25일경 남원성으로 들어온 것으로 확인됩니다. 김개남 장군이 남원성에 주둔하면서 요천변에서 농민군이 훈련을 했다고 하는데, 지금도 남원 기념사업회에서 매년 요천변에서 다양한 정신선양사업을 추진하고 있지요?
답) 남원은 서쪽으로 순창·동복, 북쪽으로 임실·오수·장수, 남쪽으로 구례·순천, 동쪽으로는 인월·운봉을 넘어 경상도 함양지역으로 연결되는 요충지입니다. 김개남 장군은 이곳에 주둔하면서 전라도는 물론이고 경상도까지 연계하여 세력을 떨쳤습니다. 김개남장군은 남원에 대도소를 설치하고 일본군과 싸우기 위해 재봉기를 준비할 때 상당히 격렬하게 행동했습니다. 아무래도 동학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들어온 일본군과 싸우기 위해서는 더욱 무장을 강화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무기와 군량, 식량을 얻기 위해서는 양반과 부농, 관군의 것을 빼앗는 방법 외에는 없었습니다. 김개남 장군이 보수층이 두터운 남원에서 거칠게 행동했던 터라, 지금까지도 기득권 세력은 남원의 동학농민혁명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이 강합니다.
문) 남원 기념사업회에서는 매년 방아치전투 위령제를 매년 지내고 있지요? 남원 동학농민군 추모제례 의식을 비롯하여 남원 기념사업회에서 추진하고 있는 정신선양사업에 대해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답) 창립된 이후부터 방아치전투위령제를 산동면 부절리에서 모셔왔습니다. 그러다보니 시민들과 함께 하는 것이 다소 미흡했습니다. 그래서 제8회 동학농민군 방아치전투 추모제부터 시민들과 함께하기 위해 광한루 앞 요천변에서 제례의식을 갖고 있습니다. 이밖에도 저희 남원기념사업회에서는 동학농민혁명 주제 학생글쓰기대회, 퀴즈대회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펼쳐왔습니다. 한편으로 동학농민혁명 애국애족 정신을 청소년들에게 알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하여 각급학교 교사들과 연계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적극적으로 모색하고 있습니다.
문) 동학농민군이 전주성을 점령하자 조선정부가 청나라에 파병요청을 했고, 일본군도 조선에 진출하게 됩니다. 이에 따라서 조선정부와 동학농민군이 화약을 맺고 각 지역으로 돌아가 폐정개혁을 단행하고 있는데 일제가 경복궁을 무단으로 점령하고 친일내각수립, 청일전쟁을 도발합니다. 이에 동학농민군이 남원에서 이른바 ‘남원대회’를 열어 반일 민족항쟁인 제2차 봉기를 위한 준비단계로 들어갑니다. 남원대회에 대한 기념사업 계획은 어떤지요?
답) 남원대회는 일본군의 침략에 분노한 농민군 내부의 분위기를 가라앉히고, 각 지방으로 흩어져 일사불란한 명령체계를 갖추지 못했던 농민군에게 내부결속을 강화하는 전기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수만 명의 동학교도들이 참가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 남원대회는 일본군을 몰아내기 위한 2차 봉기의 전초라는 성격을 갖습니다. 농민군 내부의 이견을 좁히고 결속을 다지려했다는 점에서 남원대회의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동안 저희 남원 기념사업회에서 ‘동학농민군 남원대회’에 대하여 어떤 방식으로 기념사업을 전개할까 많이 논의가 있었지만 아직까지 명확한 추진계획을 세우지 못한 실정입니다. 기념일 제정 등등 지역과 단체간 이견이 해소되지 못하고 있는 현 상황에서 ‘남원대회’에서 교훈을 얻어 화합을 통해 발전하는 방안을 모색하는 계기가 마련되었으면 합니다.
문) 남원지역 동학농민혁명에서 1894년 11월 방아치, 운봉 등지에서 벌어진 동학농민군과 민보군 사이의 전투를 빼놓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방아치전투에 대해 말씀해주십시오.
답) 남원시내에서 산동면 부절리 방아치 입구까지 약 8km 정도입니다. 방아치 입구에 이르기 직전에 유명한 깃대바위가 있지요. 방아치전투에 참여한 농민군은 그 수가 엄청났던 것 같아요. “남원에서 출발한 농민군 선두가 쪽뜰에 도착하였을 때도 남원의 농민군 후미는 출발도 못했다.”는 얘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밖에도 “전투에 참여한 농민군들이 부엌문짝을 방패로 삼고자 떼어가서 그 지역 부엌문짝이 남아나질 않았다.”는 얘기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농민군이 전투에 참여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지요. 지금은 광주 대구 간 고속도로가 깃대바위 앞 시야를 막아 넓은 쪽뚤을 볼 수 없지만, 당시 방아치전투 때 농민군이 깃대바위에 깃대를 꽂고 드넓은 쪽뚤에서 전열을 다듬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현장에 가서보면 그랬을 거라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 동학농민군은 방아치를 넘어 운봉을 점령하여 경상도 진출의 교두보로 삼으려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11월 14일부터 15일까지 이틀간 민보군과 치열하게 접전을 벌여 수천 명의 사상자를 내고 말았습니다.
문) 초기 동학사상이 전파되던 때의 수운 최제우 선생님이 기거했거나 활동했던 역사 현장들에 기념시설물들이 설치되어 있지요? 기념시설물을 설치하게 된 경위 등에 대해 얘기해 주시기 바랍니다.
답) 남원에 있는 기념시설물 중 세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첫 번째는 <동학농민혁명 유적지 광한루원>이라는 표지석입니다. 1894년 11월 28일 민보군에게 남원성을 빼앗기고 물러난 뒤 많은 농민군들이 관군과 일본군에게 잡혀 성 밖 저자거리에서 참살 당하였습니다. 그 위치는 광한루원 정문에서 보이는 잔디광장 시작지점으로 추정합니다. 이곳은 국가사적지라서 기념물을 설치하지 못하고 정문 옆 서쪽 주차장 부근에 ‘동학농민혁명 유적지 광한루원’이라는 표석을 2014년에 세웠습니다. 두 번째는 <은적암 터 표지석>입니다. 교룡산성 홍예문에서 20여분 올라가면 수운 최제우 선생이 관의 탄압을 피해 은거하시던 은적암 터가 나오는데 1989년 천도교에서 표지석을 세웠습니다.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불교계의 한 사람인 백용성 스님의 첫 출가지이기도 한 이곳 은적암은 수운선생이 동학을 밝히는 논학문을 집필하셨던 곳이기도 합니다. 세 번째는 <동학의 성지 남원>이라는 표지석입니다. 남원시 산곡동에 위치한 ‘동학의 성지 남원’이라는 기념시설물은 호롱불 형태의 조형물로서 2005년 남원문화원에서 설치하였습니다.
문) 최근 남원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에서 정유재란 당시 왜적이 전남 구례를 거쳐 남원으로 침략해 왔던 진출로에 불망비를 건립하였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 의미와 추진경과에 대해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답) 남원에는 일제의 만행과 관련된 흔적이 많은 곳 중의 하나입니다. 고려 말 황산대첩, 조선시대 정유재란 당시 1만 명의 희생과 인질포획, 악랄하고 잔학한 코베기(귀베기) 살육 등이 그것입니다. 일본의 잔인하고도 반성 없는 어리석은 태도는 앞으로 또 다른 침략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우려스럽습니다. 우리가 일본을 철저하게 극복하지 않으면 한반도의 평화는 위험합니다. 이런 점들을 상기하고 후대에 알리기 위해 일본군이 침략해왔던 진출로에 불망비를 세웠습니다. 2년간의 준비기간을 거쳐 전북 남원시와 전남 구례군 경계인 밤재에 건립하였습니다.
문) 끝으로, 못다 한 이야기가 있거나 녹두꽃 독자들에게 꼭 전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해주시기 바랍니다.
답) 호남 동학의 근원이었던 남원은 동학사에 있어서도 경주와 더불어 동학의 2대 성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즘 만들어진 자료를 보면 동학창도는 표기되어 있지만 동학이란 말이 처음 등장하고 다수의 경전이 완성된 은적암에 대한 이야기는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희 기념사업회에서는 조금 더 열심히 홍보해야겠다는 그런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동학과 농민혁명이 공존하는 유일한 장소이자 일제 침략에 따른 아픔이 서린 남원의 정체성을 살리고 그 의미를 계승·발전시키는 일에 좀 더 노력을 기울이도록 하겠습니다. 각 지역에서 애쓰시는 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단체 임원님들과 회원님 그리고 녹두꽃 독자님들께 하시는 일 마다 건승 하시고 건강하시길 기원드립니다.
문) 네, 바쁘신 중에도 인터뷰에 응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남원의 역사적 전통 복원에 힘쓰면서 동학농민혁명 정신선양사업에 힘을 기울이고 있는 남원기념사업회의 발전을 기원합니다.
